149. unreal - 비현실적인 (4)
149.
***
나른한 오전.
로건 위원장은 휴일 아침임에도 일찍부터 일어나 업무를 확인했다.
급한 일정을 처리하던 중에 잭이 어제저녁에 보낸 메일이 보인다.
[부커상 1차 후보자 명단]
유일하게 처리하지 못한 업무.
순간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던 잭의 모습이 떠오른다.
‘잭의 말대로 내가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걸까?’
아직 출판도 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진 않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 역시 반대했을 의견이었다.
‘그러나 한번은 보고 싶군.’
사실 이토록 권서준 작가에게 몰입하는 건 그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 때문이었다.
심사 위원장으로서 오래 일하다 보니 작품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
평생 글에 몸 바친 사람이었지만 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작품을 즐기지 못한 채 오로지 자를 대고 판단만 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진짜 좋은 작품이란 뭘까’하는 의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재미와 감동만 있다고 작품성이 있는 걸까? 아니면 상징성과 구조, 치밀한 구성이 더 작품성이 있는 걸까?
물론 둘 모두를 잡으려 했던 작가도 더러 있었다.
‘다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지. 그저 애매한 작품이 나왔을 뿐.’
그런 의미에서 베네딕트가 연기한 연극 「거장의 숨결」은 로건 위원장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둘 모두를 잡은 작품 같았으니까...’
다만 베네딕트의 연기력이 출중해서인지, 아니면 대본 자체가 엄청난 작품성을 지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확인해 보려는 거고.’
메일 내용을 확인하던 로건 위원장은 끝내 답장하지 못한 채 다시 메일을 닫는다.
‘그래, 오늘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결심을 굳힌 로건 위원장이 조심스럽게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몇 시간 뒤에 있을 ‘오늘의 작가’ 행사 때문이었다.
“당신, 오늘 어디 가요?”
부스럭대는 소리에 깬 아내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다. 로건 위원장은 아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깨웠군.”
“휴일인데 어디 가시려고요?”
“부커상 선정 문제로 런던 북페어를 좀 다녀오려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아내가 이내 뭔가 떠오른 듯 입을 뗀다.
“참, 오늘 베네딕트가 라디오 출연이 있대요.”
평소 베네딕트 광팬인 로건 위원장의 성향을 아는 아내의 배려였다.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주말은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시간을 즐길 수 없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하니까.’
위이잉.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초인종이 울린다.
차량이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
런던 북페어.
현대 문학의 기조와 함께 업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이었다.
게다가 출판계 종사자들과 수많은 작가와의 자연스러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교류의 장이기도 했고.
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이번 행사를 통해 얻게 되는 수많은 인맥과 경험이 결국 향후 내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
10시 무렵.
우리는 호텔에서 간단히 브런치를 먹은 뒤 런던 올림피아 전시장으로 향했다.
올리버 편집장이 행사 일정 내내 차량을 지원해준 덕에 이동하는 데에 불편함은 없었다.
“와, 하늘 색깔 진짜 예쁘다.”
장현웅이 차창 밖을 보며 감탄을 터트린다. 동시에 들고 있는 카메라로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웹툰 원고와 배경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장현웅의 감탄에 윤석훈 기자 역시 창밖을 보며 감탄을 내뱉는다.
“작가님, 안개의 도시로 유명한 런던의 날씨가 이렇게 좋은 걸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요?”
윤석훈 기자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오늘 출판을 앞둔 나를 위해 건네는 덕담이었다.
“그러게요. 느낌이 좋네요.”
화창한 하늘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평소보다 차분하게 오늘 있을 행사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어느새 저 멀리 런던 올림피아 전시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
런던 북페어 전시장.
오전에 시작한 행사는 벌써부터 수많은 출판업계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그에 비해 한산한 권서준 작가의 부스.
그러나 지켜보는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떠오른다.
‘지금이야 찾는 이가 없지만 걱정할 건 없지. 조금 뒤엔 많은 것들이 달라질 테니까.’
확실할 수 있었다.
그만큼 권서준 작가의 작품이 지닌 가치는 놀라울 정도였다.
흐뭇하게 부스를 둘러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 저 친구는 잭인데?’
출판업계 전문가로서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부커 재단 소속 직원이면서 냉정하고 깔끔한 일 처리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부커상 후보 선정 때문에 온 거겠지?’
이 시기부터 부커상 후보 선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건 모든 출판관계자가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외인 건 이곳은 오늘 막 출판이 시작된 권서준 작가의 부스라는 점이었다.
‘근데 잭이 들고 있는 책은 분명 권서준 작가의 책인데...’
올리버 편집장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잭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탁.
잠시 뒤, 잭은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옮겼다.
잭이 떠나고, 올리버 편집장이 부스 담당 직원을 찾았다.
“이봐, 잭 저 친구는 언제 온 건가?”
올리버 편집장이 묻자 부스 담당 직원은 시계를 한 번 보고 대답한다.
“아마 한 시간은 넘었을걸요?”
한 시간이라면 행사 시작과 거의 동시였다. 달리 말하면 다른 후보자들의 부스는 둘러보지 않은 채 바로 이곳을 찾았다는 뜻.
“요즘 한창 바쁠 텐데 대체 여긴 어쩐 일이지?”
“아, 오늘 있을 권 작가님 인터뷰를 맡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뭐?”
올리버 편집장의 눈이 커진다.
“권 작가님의 인터뷰를 저 친구가?”
내정되어있던 인터뷰 담당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대타가 잭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잭이 런던 문화원 소속 직원과 친분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내키지 않는 작가의 인터뷰를 쉽게 맡을 사람은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혹시...’
아직은 확실할 수 없는 가정.
그러나 여러모로 좋은 징조였다.
‘일이 잘 풀리려나?’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드리운다.
그 사이, 행사장 입구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1년여 만에 만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바로 권서준 작가였다.
‘오늘의 작가, 아니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나셨군.’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른다.
***
우리는 서울만큼이나 막히는 도로를 벗어나 런던 올림피아 전시장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올리버 편집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단 부스부터 보시겠어요?”
올리버 편집장의 안내에 따라 행사장 안에 들어섰다.
보자마자 엄청난 규모에 압도된다.
이렇게 대규모의 도서전은 나 역시 처음이었다.
“와... 진짜 엄청나네.”
장현웅은 입을 떡 벌린 채 연신 사진을 찍는다. 현장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담기 위해 메모도 잊지 않았다.
그 사이, 주변 부스에서는 출판 관계자들의 열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서준아, 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장현웅이 물었다.
“작품과 관련해서 출판, 해외 출판권 등을 논의하는 거야. 런던 도서전은 일반 도서전과 달리 주로 비즈니스적인 측면이 강하거든.”
그야말로 책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 바로 런던 북페어였다. 그만큼 수많은 출판 관계자들의 이목이 쏠리는 곳이었고.
‘달리 말하면 여기서 주목을 받는 것만큼 좋은 마케팅도 없다는 뜻이지.’
올리버 편집장이 괜히 런던 북페어 일정에 맞춰 출간하고, ‘오늘의 작가’ 행사에 나를 세운 게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나 역시 보여줘야 하고.’
생각에 잠긴 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피어슨 출판사 부스에 다다랐다.
“자, 이곳이 작가님 작품을 판매할 부스입니다.”
내 책과 이미지로 세팅된 부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곳곳에서 신경 쓴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내 시선을 끈 건 그 뒤에 설치되어 있는 벽면에 붙은 문구였다.
‘Author of the Day’(오늘의 작가).
커다란 글씨 아래 세 명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바로 3일간 진행될 행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사진은 거의 한 벽면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새삼 런던 북페어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부분.
“서준아. 네 사진도 있어. 대박...”
장현웅이 커다란 내 사진을 보며 감탄을 터트린다.
‘오늘의 작가’ 행사에 선정되었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감회를 일으켰다.
“편집장님께서 힘을 많이 써주셨네요.”
나는 솔직하게 올리버 편집장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애초에 ‘오늘의 작가’ 행사는 런던 문화원의 초청과 동의 없이는 선정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걸 이뤄낸 게 바로 올리버 편집장이었다.
“작가님의 작품이 잘 돼야 저희에게도 좋으니까요. 윈윈을 위해 최선을 다한 거죠.”
당연하다는 올리버 편집장의 말투.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더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엔 올리버 편집장의 계획이 떠오른다.
‘오늘의 작가 행사를 통해 작품을 선전하려는 거야.’
3일간 이어질 북페어.
오늘이 첫 시작인 만큼 좋은 성과를 내야만 했다.
영미권에 퍼져있는 동양 문학에 대한 은근한 배척. 게다가 무명 작가에게 쏟아질 무시까지.
이번 행사를 통해 해결해야 할 고정관념이 많았다.
물론 이미 난 준비가 된 상태였다.
***
전시장에 도착한 로건 위원장은 주변을 둘러봤다.
세계 각지에서 온 출판관계자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는 이미 미팅이 진행되고, 각종 거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로건 위원장은 우선 부커상 1차 후보에 오른 작가들의 부스를 먼저 확인했다.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갖춘 부스는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내가 안목이 있지.’
자연스럽게 마지막 행선지는 권서준 작가의 부스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 비해 지나치게 한산했다.
“...”
로건 위원장은 굳은 표정으로 부스를 살펴본다.
몇 번 지나치면서 계속 확인했지만 그 동안 책 판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미팅을 진행하는 출판관계자도 보이지 않았다.
‘흠. 역시나 무명에 가까운 동양 작가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드물군.’
어쩌면 이게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베네딕트의 발언과 피어슨 출판사의 선택 때문에 어쩌면 자신이 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한 걸음을 한 걸까?’
로건 위원장은 살짝 드는 후회는 애써 누르며 ‘오늘의 작가’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래, 세미나마저 별로면 더 고민할 이유는 없지.’
이제 곧 행사가 시작할 차례였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이 나타난다.
“위원장님.”
놀랍게도 잭이었다.
올리버 편집장이 놀라 물었다.
“잭?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그보다 어제저녁에 보내드린 제 메일은 받으셨나요?”
순간 로건 위원장의 얼굴이 씁쓸해진다.
“아, 오전에 확인했네. 아무래도 이번 행사까진 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자신의 직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에 돌려 답했다.
“그럼 그 메일은 잊어주십시오.”
“그래, 내가 행사가 끝나면 최대한 빨리 확정을... 뭐라고?”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로건 위원장이 되묻는다. 잭은 좀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연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권서준 작가의 작품, 위원장님께서 꼭 보셔야 합니다.”
“...”
하루아침에 달라진 잭의 태도.
로건 위원장은 당황한 나머지 눈을 크게 깜빡인다.
“그게 대체...”
“아, 시간이 다 됐네요. 제가 오늘 권서준 작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거든요.”
로건 위원장의 눈이 더욱 커진다.
“뭐? 인터뷰 진행?”
그토록 반대하던 사람이 인터뷰 진행까지 맡았다고?
‘이게 대체...’
하루 사이에 너무 달라진 잭의 반응에 로건 위원장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다.
로건 위원장은 자연스럽게 들고 있는 책으로 시선이 흐른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답은 이곳이 아닌 책에 있었다.
“...”
오랜만에 볕이 좋은 날.
로건은 그 자리에 선 채 권서준 작가의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