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48화 (148/203)

148. unreal - 비현실적인 (3)

148.

***

늦은 밤.

연극을 보고 돌아온 우리는 호텔 라운지에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그만큼 베네딕트의 연기가 주는 여운이 길게 남은 탓이었다.

“와, 정말 엄청났습니다. 베네딕트의 연기는 정말 명불허전이고요.”

“그러니까요. 분명 같은 대본인데 한국에서 본 작품과 다른 느낌이었어요.”

윤석훈 기자와 장현웅은 베네딕트의 공연을 통해 얻은 감동을 나눴다.

나는 과일 향이 은은한 와인을 마시며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즐겼다.

“맞아요. 우열을 떠나서 완전 다른 맛이에요. 이게 연극을 보는 재미인가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저도 요즘 공연 예술에 푹 빠졌다니까요? 근데 문제는 서준이 이 녀석 때문에 눈만 높아져서 그게 고민이에요...”

“왜 갑자기 내 탓이야?”

“너 때문이지. 이제 웬만한 연극은 만족할 수 없는 눈이 되어버렸다고.”

위스키 한 모금을 마신 윤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현웅 씨 마음이 어떤지 저도 알 것 같네요. 마치 최고급 한우만 먹다가 갑자기 일반 육우 먹으려니까 손이 안 가는 그 기분이잖아요?”

“어? 맞아요. 정확해요!”

공감을 이뤄낸 두 사람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를 향한다.

아무래도 처음 관람한 공연이 내 작품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대치가 올라간 탓이었다.

“이렇게 멋진 작품을 쓰신 분이 권 작가님이라니, 새삼 놀라게 되네요. 그런 의미에서 베네딕트가 출연한 이번 연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 기자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꺼낸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자기 작품과 배우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다. 하긴, 명색이 동행 취재 중인데 이런 질문은 당연한 거였다.

나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입을 뗐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작품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베네딕트가 연기한 말로의 모습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더군요. 이제는 제가 크리스토퍼 말로라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베네딕트가 연기한 말로의 모습을 좋아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고요.”

싱크로율을 떠나 베네딕트의 연기는 크리스토퍼 말로의 삶에 대한 태도, 문학과 예술에 대한 깊이마저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연기였다.

내 답변에 윤 기자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흠. 이보다 더 깔끔한 답변은 없겠는데요?”

윤 기자는 흡족한 얼굴로 수첩에 메모를 한다. 아마 내 얘기를 잊기 전에 기록하려는 모양.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장현웅이었다.

나와 윤 기자가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자 어느새 녀석은 연습장을 꺼내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현재 연재 중인 웹툰을 위한 과정.

가볍게 온 출장이지만 윤 기자도, 장현웅도 모두 제 일에 열심이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러고 보니 드디어 내일이네요?”

메모를 마친 윤 기자가 묻는다.

주어가 생략됐지만 뜻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바로 내일, 내 책이 처음으로 유럽에 선보이는 날이었다.

***

“뭐라고? 권 작가님이 공연장에 오셨었다고?”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베네딕트가 숨을 고르다 말고 묻는다.

“그래. 일행분과 오셔서 커튼콜까지 관람하다가 가셨어.”

“아니, 왜 그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은 거야?”

“작가님이 원하셨거든.”

“...”

권서준 작가가 원했다는 말에 베네딕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마음을 바로 이해한 탓이었다.

‘나를 배려한 거야. 내가 작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권서준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아쉽군.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최근 베네딕트의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같은 작품, 같은 배역에 출연하고 있지만 매일같이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새로운 크리스토퍼 말로의 모습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조금씩 알 것 같은 크리스토퍼의 심정.

연기를 이어갈수록 더욱 그의 삶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 모든 게 권 작가님의 대본 덕분이야...’

배우로 하여금 배역에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 적당한 여백과 여운은 관객을 넘어 배우까지 배역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마치 늪에 빠진 기분.

그러나 넘치는 행복감에 벗어나고 싶지 않은 늪이었다.

‘그래. 이게 진정한 연기의 매력이지.’

연기를 시작하고 이렇게 행복한 적은 처음이었다.

매일 크리스토퍼 말로로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오랜 헐리웃 출연으로 인해 목말랐던 욕구가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벅찬 감동을 음미하던 베네딕트가 입을 열었다.

“작가님께선 런던 도서전 때문에 오신 거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소문에 의하면 이번 도서전 때 차기 소설이 출간된다고 하더군.”

“소설? 권 작가님의 소설 말인가?”

순간 베네딕트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래. 피어슨 출판사에서 이번에 출간한다고 하더군.”

“그 작품, 어떻게 해서든 구해주게.”

다급한 베네딕트의 모습.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에이전트는 예상한 듯 미소를 짓는다.

“물론이지. 안 그래도 준비 중이니 걱정하지 말게. 따끈따끈한 초판본으로 구해다 줄 테니까.”

에이전트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한다.

역시 오래 손발을 맞춰온 에이전트답게 베네딕트의 마음을 잘 읽고 있었다.

‘기대 되는 군.’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

벌써부터 베네딕트의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자, 오늘도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게. 아, 내일 라디오 스케줄은 알고 있지?”

베네딕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 관련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혼을 불태우는 열정적인 연기자인 동시에 자신은 프로였으니까.

“늦지 않으려면 한 시간 전에 만나면 될 것 같아.”

“좋아. 시간 맞춰서 준비하겠네.”

“그래, 이제 좀 쉬어.”

숙소를 빠져나가던 에이전트가 한 가지 잊은 듯 다시 돌아온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여기, 내일 인터뷰 예상 질문지네. 한 번 보고 준비하면 좋을 거야.”

에이전트가 파일 하나를 건넨다.

베네딕트는 자연스럽게 질문지를 읽어 내려간다.

근황과 작품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다소 틀에 박힌 질문들. 그러나 한 질문만큼은 베네딕트의 눈에 띄었다.

[본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뮤즈는?]

질문을 본 베네딕트가 미소를 짓는다.

“가장 답하기 쉬운 질문이군.”

베네딕트의 머릿속엔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늦은 밤.

퇴근한 로건 위원장이 집에 들어섰다.

거실엔 아내가 켜놓은 TV 소리만 작게 들릴 뿐 고요했다.

‘수잔은 이미 자는 모양이군.’

평소보다 늦은 퇴근에 로건 위원장은 조용히 옷을 걸고 거실로 들어왔다.

연극광답게 그의 집 응접실엔 온통 연극 포스터와 소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려 40여년을 모아온 컬렉션.

그리고 최근 그의 컬렉션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베네딕트였다.

‘베네딕트야말로 영국 연극계의 희망 같은 존재니까.’

연기에 혼을 담는 몇 안 되는 배우.

당연한 듯 베네딕트의 팬이 되었고, 그가 출연하는 연극과 영화는 꼭 관람했다.

그뿐 아니라 평소 즐겨보지 않는 TV 시리즈까지 챙겨보게 되었다.

이번에 본 연극 「거장의 숨결」도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 주연이 아니라면 보지 않았을 동양 작가의 작품.

물론 작품이 보여주는 힘은 대단했다.

베네딕트가 헐리웃 영화를 거절하고 연기할 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연극이야 당연히 흥할 수밖에 없지. 베네딕트가 주연인데. 대본을 잘 쓴 건 분명 맞지만 소설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대본이 부족해도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로 커버가 가능한 게 연극이었다.

‘온전히 작가 혼자서 그 세계를 끌고 가야 하는 소설과는 완벽히 다른 분야라고.’

그런 의미에서 권서준 작가의 소설은 기대보다는 우려가 됐다.

동양 작가에 대한 무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접해온 대다수 작가의 작품이 그랬으니까.

‘따지고 보면 도서전에도 안 가는 게 맞긴 해...’

그런데,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다.

권서준 작가의 연극과 대본을 보고 나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자꾸만 로건 위원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호기심에 로건 위원장은 평소답지 않은 행보를 보이는 중이었다.

‘뭐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호기심과 달리 로건의 눈빛엔 여전히 불신이 가득 차 있었다.

***

늦은 밤.

잭은 자정이 되도록 퇴근하지 못했다.

“후우.”

모든 근심의 이유는 답장 없는 로건 위원장의 메일 때문이었다.

[부커상 1차 후보자 명단]

1차 후보자 선정 발표는 7월이지만 4월 초면 대부분의 후보 명단이 완성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3개월 사이에 엄청난 작품성을 보이는 작품성이 나타나기는 어려우니까.’

다른 심사위원들의 동의까지 받은 상태.

예년 같으면 문제없이 바로 진행될 사안이었다.

그러나 메일을 확인한 지 1시간이 지나도록 로건 위원장은 답신이 없었다.

‘아마 그 작가 때문이겠지...’

발음도 어려운 한국 작가.

로건 위원장은 갑자기 한국 작가에게 관심을 보였다.

‘솔직히 위원장님의 생각을 존중하지만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어. 아직 출판도 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위원장님이 직접 가시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백번 양보해도 과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건 위원장이 마음을 굳힌 이상 더 말릴 수는 없었다.

“후우...”

밤의 깊이만큼 한숨만 깊어질 뿐이었다.

똑똑똑.

그런데 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응? 이 시간에 누구지?’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잭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잭! 역시 여기 있었군.”

그의 절친이자 런던 문화원 소속인 마크였다.

“계속 전화했는데도 받지 않아서 여기 있을 것 같았지.”

“나야, 일이 남아서 퇴근이 늦었네. 근데 자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아, 내가 급한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네.”

“아니,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자네가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건가?”

“그게 말이지...”

말끝을 흐리던 마크는 이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혹시 내일 런던 도서전 인터뷰 좀 부탁해도 되겠나?”

“인터뷰?”

“그래. 오늘의 작가 인터뷰를 담당하기로 한 직원에게 사고가 생겨서 인터뷰 진행이 어렵게 됐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만 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오늘의 작가’라는 말에 잭의 미간이 모인다.

“설마, 권서준 작가 인터뷰 말인가?”

“오, 자네도 이미 알고 있군.”

마크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지만 잭의 표정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네. 게다가 난 아직 그 작가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그럴 줄 알고 내가 가져왔지.”

마크는 재빨리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낸다.

“자네도 알겠지만 아직 출판 전이라 절대 유출돼서는 안 되네.”

마크는 신신당부를 하며 책을 건넨다.

“...”

잭이 얼결에 책을 받자 마크는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얼굴이 환해진다.

“정말 고맙네. 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마크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하고는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친 기분.

잭은 말없이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봤다.

“...”

물론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보자마자 솟구친 호기심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 깐깐한 올리버 편집장이 고집을 피운 걸까.’

잭은 기대감 하나 없이 책을 펼쳤다.

제목 :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엄지 두 개 정도 되는 두툼한 두께.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대강대강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같은 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책장을 넘긴다.

“...”

그리고 잠시 뒤.

어느새 기울어진 고개는 제자리를 찾고, 잭 주변엔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린다.

잭은 그렇게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책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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