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upstairs - 위층(5)
114.
***
며칠 뒤.
네버이 본사.
추광현 팀장은 웹툰 정식 연재를 위한 계약을 하기 위해 두 작가를 기다렸다.
‘용두사미 작품은 아니겠지?’
기대가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드는 복잡한 마음.
그러나 이미 주사위를 던져졌고,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커리어가 달려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진다.
그림 : 왓슨.
글 : 셜록.
오랜 친구인 듯 두 사람의 필명은 셜록 홈즈와 왓슨을 연상시켰다.
‘어떤 사람들일까...’
작화면 작화, 스토리면 스토리.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에 추 팀장의 관심은 날로 깊어졌다.
똑똑.
그리고 잠시 뒤,
직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팀장님, 셜록 작가님, 왓슨 작가님 도착하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먼저 들어온 남자.
딱 봐도 20대 후반쯤 됐을까.
넉넉한 몸집을 가진 젊은 남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왓슨 작가입니다.”
살짝 긴장한 표정의 남자는 그림 작가였다.
잠시 뒤,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게다가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이곳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작가는 들뜬 마음을 주체 못 할 때가 많았다. 정식 연재란 게 그만큼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고.
‘그런데, 긴장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군.’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눈빛.
과하지 않은 그 자신감이 은근히 신뢰감을 주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셜록 작가입니다.”
이쪽이 바로 글 작가였다.
‘...근데 왜 낯이 익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었다. 애매한 기시감. 그러나 좀처럼 누구인지 떠오르진 않았다.
글 작가 쪽을 눈여겨보던 추 팀장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저는 네버이 웹툰 사업부 추광현 팀장입니다.”
추 팀장은 능숙하게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었다.
“두 분의 작품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정말 놀랐습니다. 연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정신 연재라는 연락을 받아서 실감이 안 났거든요. 처음엔 스팸 메일인가 하고 의심했다니까요?”
왓슨 작가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한다.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투명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저희 쪽에서도 큰 결단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근데 제 아이에게 추천할 정도의 작품이었기에 주저 없이 추진했습니다. 그만큼 놀라웠고요”
과장하나 없이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하아. 저희의 작품성을 알아봐 주시다니, 감동적이네요. 아무튼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하는 왓슨 작가를 보며 추 팀장은 자연스럽게 궁금했던 한 가지를 꺼낸다.
“그런데 대체 이런 스토리의 영감은 어디서 얻으신 건가요? 평범한 듯하면서도 색다른 게 진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때,
피식 웃던 왓슨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이 친구와 제 이야기거든요.”
“설마, 진짜로 실제 이야기라는 건가요?”
“네.”
이건 좀 의외였다.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 더러 있긴 했지만 이렇게 자기 얘기를 직접 쓰는 작가는 드물었으니까.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직원이 슬쩍 말을 거든다.
“팀장님, 계약서 꺼낼까요?”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추 팀장이 아차 싶은 듯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아, 여기 모든 공백을 채워주시면 됩니다.”
가만히 계약서를 바라보는 셜록 작가.
꼼꼼히 내용을 확인하고는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이내 하나씩 채워나간다.
“여기 있습니다.”
잠시 뒤,
서명까지 마친 계약서를 내민다.
“감사합니다. 잠시 확인 좀 하겠습니다.”
혹시 공백이 있나 싶어 추 팀장이 직접 살핀다.
그런데 그때,
계약서에 적힌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온다.
‘권서준?’
이름까지 어딘가 익숙한 느낌.
‘가만... 권서준?’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동시에 모든 의문이 사라진다.
“서, 설마 「이옥」의 권서준 작가님?”
맞은편에 말없이 앉아있는 남자의 정체.
바로 장안의 화제인 천재 작가 권서준이었다.
***
네버이와의 연재 계약 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사이 나는 손주환에게 수정한 대사를 주고 다시 한번 곡을 확인했다.
그 외의 대부분은 산책과 명상, 그리고 음악을 감상하며 보냈다.
특히 차기작에 대한 집필에 힘을 썼다.
제목 (가제) : 레이디 햄릿.
햄릿의 콘셉트를 가져다 썼지만 단순히 햄릿의 현대적인 재해석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었다.
선악의 단순한 구조를 뛰어넘어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는 주제.
인간의 양극성으로 인한 불안과 비극적 상황 앞에서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를 한 여자의 고뇌와 갈등을 통해 질문해 보고자 의도한 작품이었다.
‘나 자신도 완벽히 정의하지 못한,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의 이야기지.’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다시 풀어낸 이야기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수십 년 동안 고민한 내용이라 영감은 술술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완벽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다듬고 다듬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나의 뮤즈, 신하율이었다.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쓰자 작품은 그야말로 실타래를 풀 듯 술술 뿜어져 나온다.
순탄한 차기작 집필.
동시에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있었다.
‘오늘이라고 했지. 정식 연재 시작이.’
기다리던 결실.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날이었다.
나는 한창 작업 중이던 장현웅에게 다가갔다.
“바빠?”
그림을 그리던 장현웅이 나를 바라본다.
“아니, 괜찮아. 왜?”
“반응은 어떤가 궁금해서.”
순간 녀석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게, 아직 안 들어가 봤어...”
안 들어가 본 게 아니라 못 들어가 본 얼굴이었다. 바짝 긴장한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왜? 악플 잔뜩 달려 있을까 봐?”
“...”
“평점 막 1점대 이럴까 봐?”
고민하던 장현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정식 연재는 보수적이잖아. 댓글도, 평점도 박한 편이고. 하아, 벌써부터 심장이 아프다.”
극도의 긴장 상태.
나는 그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럴 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번 확인해 봐. 너 자꾸 잊는 거 같은데 이 작품 스토리는 내가 썼다고.”
“하긴, 그건 맞지.”
장현웅이 애써 웃는다.
잠시 뒤, 몇 번이나 입술을 곱씹던 장현웅이 이내 결심한 듯 마우스에 손을 올린다.
“그래, 최선을 다했으니까.”
녀석은 마지못해 사이트에 접속한다.
그리고 눈을 가늘 게 뜬 채 천천히 마우스 스크롤을 내린다.
“어? 왜 없지?”
장현웅이 놀라 묻는다.
추 팀장은 분명 오늘 오후 2시부터 연재라고 했다.
그런데 맨 아래에 우리 작품은 없었다.
“뭐가 잘 못 된 건가?”
당황하는 장현웅 몇 번이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줘 봐.”
나는 당황한 녀석을 대신해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휠을 올렸다.
30위권을 지나 20위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간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던 장현웅의 눈이 커진다.
“말도 안 돼... 왜 내 작품이 여기 있지?”
화면엔 믿기 힘든 결과가 떠 있었다.
***
네버이 웹툰 사업부 1팀.
“후우.”
담당 작품의 해외 유통을 위해 줄다리기 미팅을 마친 1팀장이 사무실로 돌아온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도 대단하셨습니다.”
부하 직원의 아부.
그러나 듣기 싫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 어느 팀장보다 능력 있는 모습.
그게 1팀장이 원하는 모습이었고, 자신의 가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눈엣가시처럼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추광현 팀장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앞서나갔으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붙잡을 수 없던 선배의 모습.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오늘이지? 연재 시작이.”
주어가 없지만 부하 직원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네, 아마 저희가 회의 진행할 때 올라갔을 겁니다.”
“그래?”
1팀장은 큰 걱정 없이 화면을 바라본다.
금요일은 그야말로 인기작품들의 각축장으로 유명한 요일이었다.
콘크리트처럼 굳건한 독자들의 파워로 벌써 1년째 순위 변동이 없는 요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위에 처음 변화가 있었다.
“...응?”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달라진 순위가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서, 설마...’
서둘러 마우스 스크롤을 올리자 5위까지 올라온 낯선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을 건너」
바로 추광현 팀장이 말한 그 작품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익숙하던 금요 웹툰 순위체계에 색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웹툰 「새벽을 건너」 반응은 뜨거웠다.
고착화되어있던 웹툰 순위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 1화 만에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건 모두 커뮤니티의 힘이었다.
-이거 챌린지리그에서부터 봤는데 작화 진심 미쳤음.
˪작가가 영혼을 갈아 그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 퀄리티.
˪근데 스토리도 쩜. 오랜만에 힐링 되는 기분.
˪와, 댓글 보고 슬쩍 봤는데 퀄리티 엄청나네. 이게 일주일 연재로 가능한 건가?
˪더 놀라운 건 어시도 없다는 거.
˪스토리 작가는 있음.
-근데 이 정도면 기성 아님?
˪작가의 말로 밝힌 적 있는데 웹툰 작가 지망생이래.
˪대박...
커뮤니티의 반응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장현웅과 나 모두 필명을 사용하고 있어서 아직 내 이야기라는 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밝히는 게 더 임팩트 있으니까.’
문창과 시절을 넘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들어서는 회차에서 밝히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벌써 신인 작가의 성공을 질투하는 댓글도 더러 보이긴 했다.
-솔직히 노잼이던데?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내용이 먹힐까?
˪네. 이미 먹히고 있고요. 벌써 금요 웹툰 5위 찍었고요.
˪너 작가 지망생이냐? 왜 부들댐?
˪관심 주지 말자. 이 자식 아이디 보니까 이 작품, 저 작품 다 까고 다니네. 열등감 쩌는 인간인 듯.
커뮤니티의 순기능인 자정작용.
그야말로 순탄한 시작이었다.
***
“그래, 이거지!”
늦은 밤.
새로 런칭한 작품 「새벽을 건너」의 커뮤니티 댓글을 보던 추광현 팀장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모든 지표가 완벽했다.
정식 연재 중인 중위권 작품을 압도하는 지표에 순위는 벌써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더 무서운 건 이 이야기의 스토리 작가가 바로 권서준 작가라는 거지.’
추 팀장 역시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다. 정식 연재를 위해서 계약하다가 알게 된 사실.
그때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역시 내 눈은 정확해.’
눈에 띄는 작화.
그러나 그 안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정확한 의도가 있는 플롯과 스토리였으니까.
‘이대로라면 금요 웹툰 1등도 꿈은 아니야.’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작품에 대한 관심.
한 번 올라간 추 팀장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몰랐다.
‘게다가 아직 권서준 작가의 이야기라는 걸 밝히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야.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려지면 그땐 정말...’
요즘 가장 핫한 천재 작가의 우정과 숨겨진 뒷이야기를 알 수 있는 작품. 그 반응은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이제부터 시작인 거지.’
자금도 쭉쭉 올라가는 지표.
벌써부터 추 팀장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
“야, 우리 3위야. 벌써 3위라고!”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장현웅이 호들갑을 떤다.
캡처해서 보여준 사진엔 금요 웹툰 3위까지 오른 우리의 작품이 보였다.
1년 동안 변함없던 금요 웹툰계에 다크호스가 등장한 격. 많은 작가들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될 뿐이었다.
다음 날.
웹툰은 기어코 2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하하, 이건 정말 예상보다 너무 빠른데요? 두 분 덕에 정말 제가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네요.”
직접 작업실까지 찾아온 추 팀장은 커피를 마시며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추 팀장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어서 그의 마음이 이해된다.
‘좌천된 곳에서 동아줄을 발견했으니 기쁠 만도 하지.’
그러나 그 동아줄을 찾고, 붙잡고, 버틴 건 추 팀장의 역량과 안목이었다.
‘결국 행운이란 준비된 자들만이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인 거야.’
손주환 작곡가도, 정은미 피디도, 서미연 대표도, 하다못해 신하율도 그랬다.
모두 저마다의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며 꿈을 잃지 않은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작은 발판이 되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판이 곧 나의 발판이 되는 법이고.’
말 그대로 선순환.
나는 그렇게 마련된 발판을 이용해 한 단계 더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이잉.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곡, 캐스팅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가 준비한 또다른 발판.
서미연 대표의 자신 있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뮤지컬 연습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세팅을 끝냈다.
벌써부터 내 머릿속엔 화려하게 비상하는 내 작품의 미래가 보였다.
어디선가 신명 나는 태평소 소리와 함께 우렁찬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명금일하대취타!’
왕의 행차 때 울려 퍼진 대취타의 가락.
뮤지컬계에 쏘아 올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오늘 극단? 김재용 대표?
너희 딱 기다려라. 진짜 왕이 나타났으니까.
일주일 뒤,
대망의 첫 연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