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manager - 관리자, 매니저 (2)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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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 극단에서요?”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여러 극단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극단으로 인정받는 곳.
그곳의 초대라...
그것도 영국이라니 마음이 좀 더 끌린다.
“네, 총괄 디렉터 아서가 직접 저희에게 요청했어요. 작품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스케줄은 어떠신가요?”
마침 드라마 「이옥」의 추가 대본을 넘겼고, 당장 압박이 되는 작업도 없었다.
슬슬 와이즈 출판사와 계약한 차기작을 쓸 생각이었지만 아직 영감이 부족한 상태라 당장 쓸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집필을 위해서라도 영국을 다시 가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고.’
안 그래도 내 고향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던 차였다.
아들과 가족들의 묘지.
그리고 나의 마지막 모습까지 담겨있는 내 고향.
후회와 아쉬움으로 점철된 내 인생이 펼쳐졌던 그곳.
그 땅을 다시 한번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오래된 영감이 새것으로 옷을 갈아입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영감이 차오른다.
자연스럽게 내 생각은 하나로 귀결된다.
“졸업식이 있는데, 그것만 끝나고 가면 좋을 거 같아요.”
“아, 맞네요. 작가님이 아직 학생이라는 걸 매번 까먹는다니까요? 아, 물론 외모가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오 대리가 귀엽게 웃으며 농담을 하더니 이내 다시 일 얘기에 집중한다.
“그럼 일단 말씀드린 대로 판권 계약만 진행하겠습니다.”
오 대리 말대로 이대로 진행하면 문제없었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를 더 노리고 싶었다.
“저, 오 대리님.”
“네?”
“그 계약, 몇 주만 늦출 수 있을까요?”
“왜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오 대리가 의아한 듯 묻는다.
“곧 있으면 국내 연극이 마무리되거든요. 될 수 있으면 그 이후에 하고 싶어서요.”
내 말의 의미를 오 대리는 빨리 캐치한다.
“아, 판권을 확실히 가져오신 후에 진행하고 싶으신 거군요?”
역시나 똑똑한 여자였다.
오 대리의 말대로 난 판권을 가져온 뒤에 포스 극단과의 계약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오늘 극단 김재용 대표가 더 이상 내 작품으로 이득 보게 둘 생각은 없으니까.
“네, 국내에선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거든요. 이미 오늘 극단과도 얘기가 된 상태고요.”
“뭐 저희야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애초에 오퍼도 저쪽에서 온 거고, 계약 내용을 조금 천천히 주고받으면 몇 주 정도야 미룰 수 있을 거 같아요.”
언제나 그렇듯 오 대리의 일 처리는 깔끔했다. 중언부언 없이 1시간도 되지 않아 작품「거장의 숨결」과 관련된 미팅이 완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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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포스 극단의 초대.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공식적으로 두 번째 영국 방문.
작년엔 송 교수한테 얹혀 갔다면 이번엔 당당히 초대를 밟고 가게 된 상황이었다.
새삼 그동안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 꽤 성공했구나.’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다음 날 오후.
인터넷엔 윤석훈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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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N 정통 사극으로 첫 방송된 후 트터위 등 소셜미디어에서 시청자의 호평이 이어지며 순식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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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시청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보지 못한 사극이다”라는 점이다. 그동안 TV 드라마에서 왕이나 위인이 아닌 일개 선비의 삶을 다루는 일은 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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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옥의 경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다룬 드라마답게 고증에 있어서도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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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명대사 제조기로 유명한 김연숙 작가와의 맞대결로 시선을 끈 권서준 작가는 명대사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좋은 대사란 인상적인 대사가 아닙니다. 배우가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대사, 더 좋은 연출이 나올 수 있게 이미지를 연상시켜주는 대사, 그게 좋은 대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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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연예 윤석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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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에 대한 설명.
작품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
그리고 내가 말하고자 한 바를 정확히 포착하는 능력까지.
지난번 촬영장에서도 느꼈지만 보통 능력을 갖춘 기자가 아니었다.
작품과 작품성에 대한 시선 역시 날카로웠다.
‘앞으로 중요한 인터뷰는 윤 기자님이랑 하는 게 좋겠어.’
흔히 기레기라 불리는 기자들과는 궤가 다른 진짜 기자였다.
“우와, 우리 작가님 이제 인터뷰 기사도 올라오네요?”
누군가 싶어 뒤돌아보니 신하율이었다.
“그거 봐요.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죠? 이젠 작가님도 사인 익숙해지셔야 한다고.”
신하율이 웃으며 말한다.
언제 봐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였다.
“네가 웬일이야? 지금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물론이죠. 제 촬영분량은 다 끝났고, 다음 주까지 촬영 없습니다. 그리고 잊으신 거예요?”
“뭘?”
“오늘 축하 파티 있는 날이잖아요.”
신하율 덕분에 잠시 잊고 있던 스케줄이 떠오른다.
‘맞다, 타이거 스튜디오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지.’
자체 시청률 경신을 축하하자는 의미에서 모이기로 한 자리. 더 정확한 이유는 시청률 상승으로 신이 난 본부장이 소집한 회식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 매니저 한 명이 필요하긴 하겠네.
***
「검은 달」, 그리고 「이옥」.
두 작품의 시청률은 극명하게 달라졌다.
10화까지는 두 배 정도의 차이를 보이더니 12화를 기점으로는 무려 9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12화의 시청률은,
「검은 달」 : 2%
「이옥」 : 18%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벌어진 상황.
“으하하. 오늘은 마음껏 마시라고. 자, 다 같이 잔 들어!”
올라간 시청률의 숫자만큼이나 본부장의 목소리 톤도 올라가 있었다.
본부장의 외침에 따라 모두가 술을 채우고 잔을 든다.
반 사전 제작이라 촬영은 거의 끝난 상황.
덕분에 스태프도, 배우도, 제작진 모두 들뜨고, 신이 난 모습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오고 있으니까.
그것만큼 성취감을 느끼면서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모두 고생했다. 자, 우리 감독님 한 말씀 하시죠?”
“제가요?”
“그래요, 너요. 입봉 피디 주제에 시청률 두 자리를 찍고 지금 난리 났잖아요.”
본부장의 말에 정은미 피디가 뒷머리를 긁으며 쭈뼛쭈뼛 일어난다.
“저야 뭐 권 작가님이 주신 대본대로 열심히 찍었죠. 부족한 감독 믿고 따라와 준 제작진들에게 감사드리고, 힘 실어주신 본부장님, 진 CP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의 박수로 화답한다.
본부장은 자연스럽게 강원준을 바라본다.
“우리 배우님도 한 말씀 하셔야죠?”
톱스타답게 강원준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직 5부 능선이지만, 전 확신합니다. 우리가 1등이라는 걸. 그리고 시청률 20%도 찍을 거라는 걸.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와아아! 20% 가즈아!”
자신감 넘치는 강원준의 말에 환호성을 내지른다.
“특히, 제게 연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신 권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분위기를 읽은 본부장이 능숙하게 나에게 질문은 건넨다.
“이쯤 되니 우리 작품의 최대 공헌자, 권서준 작가님의 소감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소감이라...
조금 멋쩍었지만 뺄 수는 없는 분위기.
그래, 소감이랄 게 뭐 있어?
그저 소탈하게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하면 되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시청률을 찍을 수 있는 작가는 없습니다. 이 단순한 숫자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죠. 이 모든 영광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신 스태프와 배우분들에게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내 소감을 들은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본다.
“아니, 무슨 소감 말해달라고 하니까 명대사를 쓰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 순간 눈물 찔끔 났잖아.”
“그으짓말!”
“그러게요.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본부장님!”
“흠, 흠. 티 났냐?”
“하하하!”
넉살 좋은 정 피디와 본부장의 너스레에 식당 안에서 웃음꽃이 핀다.
모두가 행복한 시간.
한번 핀 웃음꽃은 좀처럼 질 줄을 몰랐다.
***
늦은 밤.
나는 취기를 좀 가라앉힐 겸 식당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저 맞은편에 서 있는 진영민 CP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른 채 진영민 CP는 이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쥔다.
“드디어 해냈어...”
뭐하나 했더니 승리의 기쁨은 만끽하는 중이었다.
“여기 계셨어요?”
내가 부르자 그제야 진영민 CP가 인기척을 느낀다.
“어? 작가님 왜 나오셨어요?”
“술기운이 좀 올라와서요. 이런 날 일찍 뻗으면 너무 아쉽잖아요.”
피식 웃던 진영민 CP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이런 날은 밤이 새도록 즐겨야죠.”
진영민 CP의 눈엔 아직도 승리에 대한 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속이 좀 편하신가요?”
내 질문에 진영민 CP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주 좋네요. 근데, 이겨서 기쁘다기보다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여요.”
진영민 CP의 사연을 아는 터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고생한 덕에 작가님도 만나고, 우리 정 피디도 만났잖아요.”
편안한 미소.
잠시 숨을 고른 진영민 CP가 천천히 입을 연다.
“솔직히 처음엔 정 피디가 왜 그렇게 작가님을 의지하나 했어요. 피디가 자존심도 없나, 너무 작가한테 휘둘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근데... 같이 일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정 피디가 왜 그렇게 작가님을 의지하는지.”
잠시 하늘을 보던 진영민 CP가 다시 말을 잇는다.
“작가님은 언제나 작품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더라고요. 쓸데없는 기 싸움도 하지 않고, 그저 가장 효율적인 연기와 작품을 위해서 작가의 역할에 집중하시더라고요. 오늘 인터뷰 기사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에요.”
그걸 읽었다니, 진영민 CP 이 사람 생각보다 나에 대해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입봉 작가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고요. 여러모로 귀한 경험이었네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한 번 더라...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당분간은 힘들겠네요.”
“왜요? 벌써 제안 들어온 곳이 있나요?”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그건 아니고요. 그 전에 소설 한 편 쓰고 싶어서요.”
“아...”
길게 이어지는 목소리에서 진영민 CP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아마 필요한 이야기겠죠?”
“네?”
내가 되묻자 진영민 CP가 말을 잇는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대화를 했잖아요. 왜 그 많고 많은 위인 중에 이옥이어야만 했느냐...”
기억이 난다.
“그때 작가님 대답이 아직도 기억나요. 모두가 놓쳐버린 한 문인의 처절한 삶을 보여주려고 하신 거잖아요. 문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우리 역사에 그런 위인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요. 아마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닐까요? 그래서 벌써 기대가 되네요.”
진영민 CP, 보기보다 섬세한 사람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과의 교통정리도 잡음 없이 처리하는 거겠지만.
“아무튼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네요. 일 얘기는 그만하죠.”
“그래요.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야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진영민 CP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떠오른다.
‘오늘 밤은 오랜만에 푹 주무시겠군.’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영국 시티 오브 런던의 서쪽.
일명 웨스트엔드라 불리는 지역.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포스 극단 사무실에선 심각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한국에선 뭐래?”
총괄 디렉터 아서가 다급히 직원에게 묻는다.
“권서준 작가님께 일정이 있어서 2주 안에 연락을 주겠답니다.”
“흠. 그렇군.”
톡톡톡.
아서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아서의 버릇이었다.
“좋아. 일단 연락 기다려 보자고. 아,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은 뭐든지 맞춰줘. 이번 작품 무조건 계약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근데, 만일 계약을 한다면 혹시 주연 배우는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 캐스팅 라인을 정리해두면 좋을 거 같아서요.”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긴 아서의 눈빛이 순간 반짝인다.
“적합한 사람이 하나 있지.”
셰익스피어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그의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는 톱스타.
게다가 고전 연기를 전공했고, 부모가 모두 배우 출신이며 할리우드와 영국의 연극계를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