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66화 (66/203)

# 66. belongings - 재산, 소유물 (4)

66.

***

10분 전.

와이즈 출판사 마케팅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난처한 얼굴로 전화를 하는 한 직원의 모습이 보인다.

“네, 네. 바로 준비하고 있긴 한데 인쇄소에서 시간이 좀 걸리네요. 네, 죄송합니다.”

전화 통화 중인 마케팅팀 담당 양 대리는 허공에 대고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바로 보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네, 네. 넵! 들어가십시오!”

언뜻 들으면 컴플레인 전화 같은 느낌.

그런데 전화를 끊은 양 대리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밝았다.

칸막이 너머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주상진 편집장이 고개를 든다.

“뭐래?”

“인쇄소 문제라고 하니까 기다려 준답니다.”

“하긴, 안 기다리면 어쩔 거야?”

“맞습니다. 모처럼 매출 쭉쭉 오르는데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양 대리뿐만 아니라 주 편집장의 표정 역시 근래 들어 가장 밝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특별전으로 자리까지 만들어 준답니다. 물량 채울 수 있게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요.”

“정말? 그 콧대 높은 보교문고가?”

주 편집장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다.

“네, 아무래도 보기 드문 국내 작가의 선전이라 그쪽에서도 이슈 몰이를 좀 하려나 봐요. 하긴 그게 그쪽 마케팅에도 좋긴 할 거고요.”

“이야,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신이 난 주 편집장이 볼펜을 까딱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가 슬쩍 양 대리를 보며 묻는다.

“양 대리, 이번이 몇 쇄지?”

“9쇄입니다. 편집장님.”

“벌써?”

주 편집장의 물음에 양 대리가 환하게 웃는다.

“네, 국내 소설 중에 이런 증쇄는 올해 들어 처음 아닌가요?”

미소를 짓던 주 편집장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순문학 쪽에서는 거의 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현업 종사자인 주 편집장의 가슴이 설렌다.

최근 침체되어 있던 순문학 시장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한 작품에 국한된 이야기였지만.

제목 : 덧없는 행운이여

작가 : 권서준

출판사 : 와이즈

볼수록 주 편집장의 입꼬리가 길게 이어진다. 온정 출판사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출판사 문을 닫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었는데, 이직하자마자 이렇게 대어가 제 발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역시, 선배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지.”

주 편집장의 혼잣말에 양 대리가 관심을 기울인다.

“선배요?”

“응. 송영도 작가 알지? 그분이 내 윗다리 선배인데 권 작가가 그 선배 제자거든.”

“아, 어쩐지...”

“작년에 권 작가가 쓴 단편이랑 시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떡잎이 남달랐거든. 뭐 이 정도로 임팩트 있는 작품을 쓸 줄은 몰랐지만.”

주 편집장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 있게 제자의 작품을 내미는 어색한 송 교수의 모습.

그러나 그보다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바로 권서준 작가의 작품이었다.

‘물론 그땐 나이에 비해 잘 쓴다 정도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괴물이 되었을까?’

권서준 작가의 작품 퀄리티는 현업 편집장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였다.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객관적인 평가가 그랬다.

그리고 이번 장편 소설을 통해 확실히 대중의 검증까지 받았다.

9쇄.

좀처럼 증쇄를 하지 않는 순문학 쪽에선 이례적인 행보였다. 게다가 누적 판매 부수는 벌써 11만 권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이야...”

마침 이직 후 터진 호재라 주 편집장의 어깨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대박은 대박이죠. 제 동생도 권 작가 책은 읽었다던데요?”

“자네 동생이면 고등학생 아니야?”

“네, 고등학생이 수능에도 나오지 않는 책을 읽었다니까요?”

게임, 웹툰, 각종 영상 매체에 밀려 책을 잘 읽지 않는 어린 학생들까지 권서준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있었다. 소비 연령대를 분석해보면 10대부터 60대까지 고른 연령대를 보이고 있었고.

‘이런 작품은 결코 흔하지 않아.’

때때로 마케팅의 힘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작품들이 간혹 있었다. 아니, 최근 경향을 보면 마케팅 지원 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건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올라가도 금방 떨어진다는 거지.’

특히 순문학 작품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런데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달랐다.

특별한 연령대나 타겟층을 노리고 홍보한 적도 없는데 일궈낸 성과였다.

마케팅팀 내에서도 오랜 소비자 패턴 분석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작품 자체의 매력입니다.]

마케팅의 힘이라기보다는 작품 자체가 갖는 매력이 바로 판매 증가의 원인이었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

권서준 작가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어쩌면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던 그 천재가 이제야 나타난 건 아닐까?”

주 편집장의 말에 양 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출판사 현업 관계자들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품성과 상업성.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었으니까.

한창 기분 좋게 대화를 주고받던 주 편집장이 순간 잊고 있던 걸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내 정신 좀 봐. 작가님한테 가장 먼저 연락드려야 하는데...”

주 편집장은 헐레벌떡 휴대폰을 찾았다.

당황한 와중에도 입은 웃고 있었다.

***

-작가님, 이번 작품 정말 대박입니다. 이러다가 20쇄도 가겠어요. 하하하하.

시원한 웃음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다.

-인세도 조만간 입금될 거예요. 아마 아주 만족하실 겁니다.

거의 2주마다 한 번씩 오는 주 편집장의 전화. 이번엔 9번째 증쇄에 들어간다는 연락이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아이고, 고생이라뇨? 요즘 신바람에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니까요. 이렇게 결과까지 따라주니 너무 행복하네요.

주 편집장의 목소리는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자신의 손이 닿은 작품의 성공, 그만큼 편집장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제가 요즘 작가님 작품을 다시 읽고 있는데 와... 역시 작가님 작품엔 뭔가 다른 게 있더라고요. 이전엔 깨닫지 못했던 이미지들이 막 떠오르는데 크으, 짜릿하더군요.

주 편집장은 편집자 이전에 독자로서 내 작품을 즐기고 있었다. 작가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칭찬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만 주세요.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듣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벤치에 앉았다.

연이어 들려오는 증쇄 소식.

다만 내가 직접 검색하거나 하지 않으니까 실감은 나지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게 어느 정도 수치인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았고.

그런데,

마침 맞은편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뒤늦게 온 학생이 기다리고 있던 학생 손에 들린 책을 보며 묻는다.

“어? 너 설마 책 읽냐?”

“당연하지. 너 혹시 이 책 몰라?”

“뭔데? 재밌어?”

“그럼 엄청 재미있지. 내가 올해 유일하게 완독한 책인데.”

“이야, 니가 읽었을 정도면 재미있긴 한가 보네. 혹시 야한 거 나오냐?”

“미친놈. 개소리 말고 한 번 읽어봐. 읽자마자 아주 혼이 쏙 빠질 테니까.”

친구가 의아한 듯 묻는다.

“이 책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말이 필요 없다니까.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대체 어떤 책인데?”

“인생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보게 만드는 책.”

잠시 말을 멈춘 학생이 마치 독백을 하듯 대답을 이어간다.

“처음엔 재미있어서 보다가... 중간엔 안타깝고...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고, 다시 책 덮어놓고 멍하니 생각하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데... 하아, 이거 말로는 설명이 안 되네. 암튼 그런 소설이야.”

친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허공을 보며 말했다. 지켜보던 학생이 다시 책 표지를 보고 묻는다.

“권서준? 이름 보니까 우리나라 작가네?”

“어. 난 이런 작가가 아직 우리나라에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니까.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이 작가 우리 또래야.”

“뭐어?”

“우리 학교 문창과 학생이거든.”

“헐. 대박, 돈 엄청나게 벌었겠네?”

“말해 뭐해. 품절 나서 나도 열흘이나 기다렸다니까.”

두 친구의 열띤 대화.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천천히 일어나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한민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건 꽤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뿌듯함이 밀려온다.

어린 친구들까지 내 책을 읽는 모습은 작가로서 보람도 느껴지고.

‘과연 몇 쇄까지 증쇄가 될까?’

답은 내게 없었다.

그저 지켜보면 될 뿐이었다.

***

며칠 뒤, 늦은 오후.

나는 정 회장의 집을 찾았다.

증쇄 요청 소식을 들은 정 회장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는 송 교수의 연락 때문이었다.

소설 「덧없는 행운이여」의 성공은 나에게도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무엇보다 내 의도가 선명히 담긴 작품이라 이 성과가 더 뜻깊게 다가왔다.

한글의 우수성을 고이 담은 표현.

한국인의 정서가 곳곳에 녹아있는 서사와 캐릭터까지.

온전히 한국 사람을 위한 작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아직 차기작을 이을만한 영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영감이 나올 듯 말듯 괴롭히는 재채기처럼 내 주위를 얼쩡거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급할 건 없었다.

그저 매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것이 바로 영감이라는 녀석이었으니까.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여기가 정 회장님 댁이구나.’

성북동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느낌의 한옥.

평소 개량 한복과 털털한 옷차림을 입는 정영만 회장의 모습답게 전통 방식을 고수한 한옥은 한국만의 특유한 정서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나는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뜰로 들어갔다. 밀짚모자를 쓴 채 정원을 손질하던 정 회장이 고개를 든다.

“아이고, 어서 오게.”

햇볕에 흐른 땀을 소매로 쓱 닦아내는 모습이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로의 느낌을 풍겼다.

“내가 정원을 가꾸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씻고 올 테니까 좀만 기다려주겠나?”

“네, 물론입니다. 정원 산책 좀 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내아이가 다가와 정 회장에게 안긴다.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강아지 왔어?”

열 살쯤 됐을까.

정 회장의 손자인 듯싶었다.

“자, 손님한테도 인사해야지?”

“어? 안녕하세요.”

똘망한 눈을 가진 남자아이가 배꼽 인사를 한다.

“이름이 뭐니?”

내가 물었다.

“정재민이요.”

“재민이구나. 반가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민아, 오늘은 손님이 오셨으니까 안에서 놀고 있어. 이따 할아버지가 놀러 갈게.”

“네, 이따 꼭 와야 해요?”

아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멀어진다.

“귀엽네요. 손자분인가요?”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뿐인 손자 녀석이지. 올해 벌써 10살이야.”

흐뭇하게 웃던 정 회장의 눈빛이 사뭇 애잔해진다.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느낌이었다.

“근데... 저 아이만 생각하면 내가 잠을 못 이룬다네.”

말투에서 깊은 근심과 애잔함이 느껴진다.

잠시 뒤 한숨을 내쉰 정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연다.

“교통사고로 아들 내외가 죽고, 저 핏덩이 하나만 살아남았거든. 아무리 잘 해줘도 부모 손길만큼은 아니니,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는구먼.”

좀처럼 듣기 힘든 정 회장의 개인사였다.

그러나 이내 애잔한 눈빛을 거둔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군. 나이가 들면 이렇다니까.”

정 회장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다.

“송 교수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잠시 구경 좀 하고 있어. 금방 준비하고 올 테니까.”

“네, 다녀오십시오.”

정 회장이 안채로 가고 나는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

그러나 내 머릿속은 여전히 정 회장의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눈빛.

나는 조금 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을 내려다본다. 가는 머리카락이 내 손아래에서 이리저리 헝클어지는 느낌이 익숙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옛 기억.

‘그때, 내 눈빛도 저랬을까...’

문득 떠오른 가슴 아픈 전생의 기억.

기억 한 조각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햄넷...’

가슴 깊이 묻어놓은 이름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냈던 기억.

숨이 쉬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격한 감정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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