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65화 (65/203)

# 65. belongings - 재산, 소유물 (3)

65.

***

‘정 회장님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걸까?’

엘리베이터에 탄 박준태 선생은 두꺼운 뿔테를 벗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며칠 동안 밤샌 번역 작업에 눈은 충혈됐고, 턱엔 깎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밀린 번역 일과 함께 평생 숙원인 과제 때문에 서너 시간도 채 못 잘 정도로 강행군이었지만 그 바쁜 상황에서도 정영만 회장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다시 안경을 쓴 박준태가 내린다.

“박준태 선생님 오셨습니다.”

친절한 비서의 안내를 받아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 회장 외에 익숙한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송 교수도 있었군.”

과거 송 교수의 작품을 번역 의뢰받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최종적으로는 해외 에이전시의 선택에 따라 외국계 번역가가 작업하긴 했지만 좋은 인연으로 알게 되어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어서 오게.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상한 거야?”

“일이 좀 많아서 무리를 했나 봅니다.”

“그래? 요즘 번역시장은 분위기가 괜찮은가 보지?”

정 회장의 물음에 박준태가 대답한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작품은 많은 편입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니까요. 다만, 반대인 경우가 별로 없다는 건 안타까울 뿐이네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은 수없이 번역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반면에 국내 작가의 작품이 해외로 팔려나가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군.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야. 모든 게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우리 문학만 반도에 머물고 있다니 말이야.”

정 회장의 말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 문학계의 현주소였으니까.

박준태는 자연스럽게 오늘 만남의 목적을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부르신 거죠?”

“내가 일 하나 부탁하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네.”

“일이라면 번역인가요?”

사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국내 최고의 번역가인 자신을 부른 이유가 고작 차 한잔하자는 건 아닐 테니까.

정 회장이 아이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지금 영국 피어슨 출판사 편집장과 얘기가 오가는 작품이 하나 있거든. 그것 좀 번역해주면 해서 이렇게 연락했네.”

“피어슨이면 영국 3대 출판사 중 하나 아닌가요?”

“그렇지. 이번에 잘만하면 송 교수 이후에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니까?”

들뜬 정 회장의 표정.

순간 박준태의 얼굴에도 피곤이 가신다. 정 회장이 말하는 또 한 번의 기적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커상(Booker Prize).

영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문학상이었다.

특히 외국인이 받을 수 있는 부커 인터내셔널 상의 경우 번역가에게도 상금과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번역가로서 최고의 명예가 되는 상이었다.

게다가 정 회장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괜찮은 작품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못다 이룬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내게도 기회가 오는 건가?’

박준태의 가슴에 묘한 설렘이 일렁인다.

“이 작품일세.”

정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책 한 권을 내민다.

제목을 읽고, 이내 작가 이름을 확인한다.

그런데 작가 이름을 확인하던 박준태 선생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 이건...’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 이름이 맞았다. 수많은 작품을 접했지만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작가는 그 사람이 유일했다.

“왜 그러나?”

박준태의 표정을 읽은 정 회장이 묻는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박준태가 천천히 입을 뗀다.

“혹시, 권서준이라는 작가, 아직 대학생인 친구 맞죠?”

순간 정 회장과 눈을 크게 뜬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았지?”

“역시, 제 생각이 맞았네요.”

피식 웃던 박준태 선생이 다시 책을 내려놓는다.

“그 친구라면 제가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영문을 모르는 정 회장은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박준태는 정 회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니고 있던 원문 희곡 대본 하나를 내밀었다.

제목 : 거장의 숨결.

극본 : 권서준.

“이 작품을 한 번 읽어보시면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송 교수는 이미 알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

한 시간 뒤.

박준태 선생이 나가고 대표실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희곡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정 회장이 그제야 웃음을 터트린다.

“허허.”

어이없이 실소를 터트리던 정 회장이 송 교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걸 번역한 게 권서준 그 친구란 말이지?”

“애초에 초고 자체가 영어였습니다. 그 뒤에 과제 제출을 위해 한국어로 번역한 거고요.”

“하,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영어까지 이렇게 완벽하다고? 이거 너무 사기 치는 거 아냐?”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번역을 맡길 필요가 없을 거라고.”

이제야 이해가 되는지 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서준이 녀석에게 직접 말해보자고. 박준태 선생도 손 털고 일어났는데 본인이 해야지 어쩌겠어.”

“제가 잘 말해 보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게 아니라 이참에 우리 집으로 초대 한 번 하지. 저녁 한번 할 겸 말이야.”

정 회장은 좀처럼 자신의 집에 사람을 불러들이지 않는 거로 유명했다. 기껏해야 최측근들과 송 교수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 집에 또 한 명의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정 회장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사이 나는 배우들과 몇 차례 리딩 미팅을 했다.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중견 배우들의 역할도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해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배우와 작가의 생각이 하나가 되고, 연출자와 작가의 호흡이 맞아떨어지자 대본 집필 속도 역시 빨라졌다.

타닥타닥 타닥 탁.

마지막으로 엔터키를 거칠게 한 번 눌렀다.

‘후우.’

나는 긴 한숨과 함께 모니터를 바라본다.

어느새 대본 파일 24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하아, 정말 고생했다.”

누나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완벽한 끝은 아니었다.

“그래도 긴장을 놓치면 안 돼.”

“왜? 대본 다 나온 거 아냐?”

“그건 맞는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게 드라마잖아.”

배우가 갑자기 하차할 수도 있었고, 피치 못할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다. 장소 문제로 인해 갑자기 시간대나 장소가 바뀌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지는 게 이 바닥이니까.’

제작진이 입봉 작가를 기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변수에 맞춰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입봉 작가에게는 어려우니까.

지켜보던 누나가 혀를 내두른다.

“넌 처음으로 장편 써보는 애가 왜 이렇게 능숙하냐? 누가 보면 드라마 작가만 한 십 년 한 줄 알겠다.”

그건 누나가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십 년뿐이겠어?

한평생 작가로 산 사람한테?

능숙함의 근거는 모두 전생의 경험 덕분이었다. 물론 현생의 깨달음과 노력도 한몫하고 있었고.

대본을 향한 집념 덕에 전생의 경험을 더욱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날이 선 상태였다.

대본뿐만 아니라 촬영도 순탄하게 진행 중이었다.

반 사전 제작이라 현재 5화 분량의 작품이 촬영된 상태. 바쁜 촬영 스케줄로 정 피디의 얼굴은 간간히 볼 순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씩 통화를 나누며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

다행히 정 피디와 나는 합이 잘 맞았다.

내 대본과 나에 대한 전적인 신뢰 덕분이었다.

‘만일 꼰대 피디를 만났다면 이렇게 되기 힘들었겠지.’

그림과 연출을 우선시 생각하는 피디들은 작품의 섬세한 감정선을 놓칠 때가 많았다.

내가 미리 던져놓은 포석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기다리면 되는군.’

한 달만 지나면 첫 방영이 예정된 상황. 나는 자연스럽게 작품 「이옥」에 대한 기사를 확인했다.

-님들 그거 앎? 이거 입봉 작가 작품임.

└그게 중요한가?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임.

└권서준 작가가 사극은 처음이지만 이미 웹드라마에선 인정받은 작가인데 아는 척 노노.

└무슨 작품?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와, 이거 씹레전드였는데. 그 작가였었네. 어쩐지 강원준에 신하율이 나온 이유가 있었어.

-반면에 검은 달은 김연숙 작가.

˪둘 다 재미있겠다.

-이야, 하반기엔 볼 거 많네.

반응이 좋았다.

물론 검은 달에 대한 기대도 만만찮았다.

‘역시 조한웅 배우와 김연숙 작가의 조합은 무시 못 하니까.’

명품 배우와 명대사 제조기인 작가의 조합은 합연산이 아닌 곱연산이었다. 자연스럽게 대중들에게 기대감도 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

물론 나는 자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마지막 수업을 위해 찾은 학교.

어느새 완연한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이번 학기는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는군.’

가뜩이나 수업이 별로 없는 마지막 학기라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간 것만 같았다.

집필과 함께 학과 수업에도 게을리 하지 않은 탓에 성적은 과톱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졸업은 충분하네.’

이제 몇몇 마무리 과제 빼고는 방학만 남은 상태였다.

방학이 끝나면 졸업을 하게 되고 학생으로서의 시간도 끝이 난다.

감회가 새롭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천천히 캠퍼스를 걷는데 어디선가 때 이른 매미 소리가 울린다.

맴, 맴, 매앰.

여름이면 찾아드는 익숙한 울음소리.

나는 문득 이옥이 떠오른다.

‘문무자(文無子) 이옥의 또 다른 호가 바로 매암(梅庵)이었지.’

우리가 아는 매미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지은 의성어. 이옥은 직접 본인의 호를 매암으로 지었다.

이 호를 짓게 된 유래가 참 가슴 아팠다.

이옥이 서른두 살 되던 해.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하지만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정조의 지엄한 어명에 막혀 청운의 꿈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한 계절 내내 목청껏 울었건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삶. 이옥은 여름 내내 울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매미의 신세와 자신을 처지를 빗대었다.

그리고 한편의 글로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세상에 그대가 없다고 하여 손실될 바가 없고, 그대에게 세상이 없어서 또한 욕될 바가 없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뜻을 행하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따를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꿈.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뜻을 굽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듯 자신의 실패를 긍정하고는 관직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는 도성을 떠나 유랑을 시작한다.

2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그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남는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뜻을 행하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따를 것이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깨달음도 이와 같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자유니까.’

내가 이옥의 삶을 기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가만히 캠퍼스를 바라본다.

수천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꿈을 위해 자신만의 탑을 쌓아가는 지식의 공간이자 나의 4년을 쏟아부은 열정의 용광로.

이제는 조금 더 넓고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고 따르기 위하여.’

많은 것을 얻었지만 아직도 배가 고팠다.

자연스럽게 다음을 목표를 떠올린다.

‘어떤 게 좋을까...’

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내 영감을 자극한다. 마치 사탕 여러 개를 손에 쥔 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잘 지내셨죠?

묵직하면서 깐깐한 목소리.

와이즈 출판사의 주상진 편집장이었다.

“네, 편집장님. 안녕하세요. 저야 잘 지냈죠. 편집장님도 잘 지내셨죠?”

-저야 작가님 덕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화 드린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높은 톤에 격앙된 목소리.

편집장이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은 하나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어서 대답이 들려온다.

-작가님, 증쇄 요청이 또 들어왔습니다!

평소보다 호쾌한 목소리.

주 편집장의 기분을 대변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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