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The game is afoot -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1)
58.
***
늦은 밤.
타이거 스튜디오 기획제작 7팀.
하 본부장, 진영민 CP, 정은미 피디는 머리를 맞댄 채 캐스팅 보드를 살피고 있었다.
“흠.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저도 같은 생각이죠.”
진영민 CP가 대답한다.
“넌?”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죠.”
이번엔 정 피디가 동의한다.
실무진의 만장일치.
본부장이 책상을 내려치며 고개를 든다.
“그럼 결정됐네. 이옥은 강원준으로 가보자.”
호쾌한 외침.
그러나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근데, 강원준이 우리랑 할까요? 지금 썬샤인 쪽이랑 얘기가 오가는 거 같던데?”
“인마, 그럼 닭 쫓던 개처럼 그냥 지켜만 볼 거야? 문도 두드려야 열리는 법이라고.”
본부장의 설교 말투에 진영민이 슬쩍 쳐다본다.
“어제 교회 다녀오셨어요?”
“그래, 내가 캐스팅 때문에 3년 만에 마누라 따라서 교회까지 다녀왔다. 그러니까 이 작품 무조건 잘 돼야 한다고. 알았어?”
본부장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누구 하나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연이어 작품 망한 진영민 CP나, 처음으로 장편 연출에 도전하는 정 피디나 간절하긴 마찬가지였다.
“정 피디, 넌 권 작가 만나서 이옥 캐스팅 관련해서 생각 좀 물어봐. 권 작가 생각도 중요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드라마 「이옥」.
사극 드라마의 보증 수표나 다름없는 강원준의 가장 최상의 캐스팅이었다.
그만큼 노리는 제작사가 많은 상황.
시작부터 쉽지 않다는 건 세 명 모두 공감하는 바였다.
***
며칠 뒤.
누나는 정식으로 작가 계약을 마쳤다. 내 전속 작가로 배정됐고, 오수정 대리가 신경 써 준 덕에 급여 자체도 꽤 높게 받을 수 있었다.
“하아, 역시 난 월급쟁이가 체질인가 봐. 매달 내 통장에 월급 찍힐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설레는 거 있지?”
현실적인 부분도 해결되고, 적성과 맞는 업무도 찾자 누나의 얼굴은 그야말로 만개한 꽃처럼 활짝 폈다. 나와 함께 일한다는 생각에 일적인 부담감도 많이 털어낸 상태였다.
“역사가 알면 알수록 재미있네.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해.”
“응. 안 그래도 메일로 원하는 자료 보내 놓은 거 있어. 그것 좀 부탁할게.”
“오케이. 걱정하지 마세요.”
질문을 쭉 훑은 누나가 얼른 고개를 든다.
“이건 언제까지 해주면 돼?”
“내일 오후면 될 거 같아.”
“오케이. 그럼 바로 시작할게.”
자리에 앉은 누나가 컴퓨터를 펼치고는 집중에 들어간다. 못 생겨 보인다고 평소엔 잘 쓰지 않는 안경까지 쓴 걸 보니 일에 진심인 듯싶었다.
‘좋아. 이렇게 자기 능력을 개발하는 거지.’
단지 누나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수많은 작품을 써야 할 내게 누나는 굉장히 중요한 포석 중 하나였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건강을 위해서도 내 의중을 파악하는 편집자는 꼭 필요한 존재니까.’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가려다가 소모되었던 인생. 전생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할 순 없었다.
천천히 성장 시켜 내게 꼭 필요한 인물로 키울 생각이었다.
어느덧 대본을 위한 기본적인 세팅은 끝난 상태. 이젠 본격적인 대본 집필에 들어갈 시점이었다.
***
나는 누나에게 자료조사를 맡긴 뒤, 타이거 스튜디오 본사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날이 아직 춥죠?”
“그러게요. 피디님도 감기 조심하셔야겠어요.”
“이야, 역시 제 걱정해주시는 건 작가님밖에 없네요. 근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또 한 건강하거든요.”
정 피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일 얘기로 넘어간다.
“참, 요즘 회사 쪽 분위기는 어때요?”
나는 자연스럽게 회사 상황을 물었다.
“아주 좋죠. 진영민 CP님이 그렇게 밝은 얼굴로 작업하는 거 이직 이후에 처음 본다니까요? 게다가 본부장님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고 계시고요. 대본만 나오면 바로 캐스팅도 시작할 거 같아요.”
그쪽도 나름대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근데, 캐스팅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저희 내부적으로는 이옥 역할에 강원준 씨를 고민하고 있거든요.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강원준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였다. 선이 굵은 배역을 주로 했는데 주인공인 이옥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강원준 씨라면 잘 어울릴 거 같네요. 근데 캐스팅이 될까요?”
내 질문에 정 피디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후... 솔직히 쉽진 않을 거 같아요. 소문에 의하면 썬샤인 제작사와 차기작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며칠 전부터 돌던 찌라시였다.
검은 달.
조선판 테이큰이라는 콘셉트로 제작 중인 사극 액션물이었다. 제작비만 무려 150억에 달하는 역대급 스케일의 사극으로 강원준이 주연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하필 같은 사극이라 그쪽도 강원준 씨를 강하게 원하는 중이거든요.”
사극 드라마의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강원준은 어느 제작사라 한들 가장 먼저 잡아야 할 대어였다.
“말하다 보니 부정적인 얘기만 했네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죠. 제일 중요한 주연 캐스팅이니까요.”
정 피디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긍정적인 지표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제작비, 출연료, 썬샤인의 물밑 작업까지, 모든 게 우리 쪽에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
이대로 제작사에만 맡기면 강원준 측에선 거절할 게 분명했다.
‘캐스팅을 위해 묵직한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군.’
작품에 대한 배우의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 내 머릿속엔 그 해결책이 있었다.
바로 대본이었다.
가장 깔끔하고 분명한 해결책.
‘톱스타도 매달리게 만드는 게 바로 대본의 힘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계획보다 대본 집필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제작진의 주연 캐스팅을 위해 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니까.
결국 드라마는 혼자 만들 수 없었다.
하나의 연극이 무대 위에 올라가기까지 숱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듯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최적화되어야 해.’
나는 그걸 조금 도와줄 뿐이었다.
그들을 위해서?
아니, 나와 내 작품을 위해서였다.
물론 보다 완벽한 대본을 위해선 반드시 다녀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댁으로 가시나요?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아닙니다. 갈 데가 있어서요.”
“네? 어디를요?”
“북한산이요.”
“...”
전혀 예상 못 한 행선지에 정 피디는 한동안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
햇살이 좋은 오후 나는 북한산을 올랐다.
며칠 전 영상으로 올라온 3월의 날씨.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발아래 밟히며 묘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자연스럽게 등줄기에 흐르는 땀.
북한산 대남문 문루에 서자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 사이로 북한산 절경이 눈앞에 퍼진다.
‘아름답군.’
자연이 그리는 그림은 언제나 작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헉, 헉... 작가님. 천천히... 좀만 쉬었다 가죠.”
뒤따라오던 정 피디가 격하게 숨을 내쉰다.
“후아, 근데 갑자기 웬 등산이세요? 궁금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등산을 간다는 말에 얼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히 아무 이유 없이 온 건 아니었다.
아니, 반드시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그 옛날 이옥이 지인들과 함께 나들이를 왔던 곳이거든요.”
“네? 이곳이요?”
땅만 보고 걸음을 옮기던 정 피디가 얼른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 고된 산행으로 놓치고 있던 경치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저번에 보내드린 중흥유기(重興遊記) 기억하시죠? 거기 나온 장소가 바로 이곳이에요. 절을 중심으로 산성을 돌며 북한산 경관을 살핀 거죠.”
“아... 듣고 보니 괜히 뭔가 다르게 느껴지긴 하네요. 조금 전까진 그냥 평범한 북한산이었는데...”
설명을 듣던 정 피디의 눈빛이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작품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 잠시 주변 좀 돌아봐도 될까요? 스케치 좀 하게요.”
“그러세요. 저도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요.”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금 전과 달리 정 피디의 눈빛이 살아난다. 휴대폰으로 이곳저곳을 찍으며 작품 속 배경을 떠올리는 듯했다.
‘역시 센스가 있어.’
굳이 내가 정 피디의 동행을 말리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메인 연출이 이옥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곳을 걸었는지 직접 보면 영감을 얻는데 더 좋을 테니까.
혼자 남은 나는 성벽에 기댄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계축년(1793년, 정조 17년) 어느 가을밤.
이옥은 지인 김려와 민사응, 그리고 김선과 함께 이곳에 올라 달빛 아래에서 모임을 가졌다.
간단한 짐을 챙겨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을 오른 이옥은 산중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자유롭게 산의 정취를 만끽했다.
‘후...’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북한산의 산세를 가만히 눈에 담는다.
계절은 달랐지만 그들이 바라보던 가을 산의 정취가 눈앞에 떠오른다.
[저녁 산은 마치 아양을 떠는 것 같아 고운 단풍잎이 일제히 취(醉)한 모양이요, 아침 산은 마치 조는 것 같아 아련히 푸르름이 젖어드는 모양이다. 저녁의 물은 매우 빠르게 흘러 모래와 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며, 아침의 물은 기(氣)가 있어 바위와 구렁이 비에 적셔진 것과 같다.]
자연을 벗 삼아 비탄스러운 삶을 위로하던 선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저 멀리 어디선가 그들의 읊는 노랫가락이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산을 거닐었을까...’
나는 눈을 감은 채 자연스럽게 이옥이 되어본다.
문체반정의 희생양으로 더 이상 관직에 머물지 못하게 된 선비의 마음이 내게 전해진다.
과거조차 보지 못했고, 왕의 명령으로 군대에 편입까지 된 절박한 삶...
비통하고 원망할 법하지만 북한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문인다웠다.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淡淡)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번다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 이처럼 많을 수 있단 말인가?]
온통 아름다울 가(佳)로 가득 찬 이옥의 시.
그는 그렇게 인생의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바라볼 줄 아는 선비였다.
이옥은 끝내 북한산 유람을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佳故來(가고래)
無是佳 無是來(무시가 무시래)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 담고자 한평생 붓을 잡은 진정한 문인이었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이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 나에게로 다가온다.
왕에 의해 막힌 선비의 꿈.
그러나 이옥은 북한산 자락에 올라 왕에게 거부당한 소품체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이 얼마나 선비다운 기개를 보여주는 고상한 반역이란 말인가.
나는 그의 기개를 기리며 나직이 외친다.
佳故來(가고래)
無是佳 無是來(무시가 무시래)
‘나 역시 그대의 삶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삶이 천천히 내게 녹아든다.
억압의 시대.
세상의 모든 것은 그에게 글감이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다시 나에게 젖어 들어 또 다른 이야기의 글감이 되었다.
‘이 영감을 빨리 담아야 해...’
나는 대남문 성벽에 걸터앉아 서둘러 노트와 만년필을 꺼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손에 쥔 만년필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장대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한 선비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정신에 대한 이야기.
동시에 강원준에게 보낼 메시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