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useful - 쓸모 있는 (4)
57.
***
뜻밖의 수상 소식.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 역시 자연의 법칙 중 하나였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법이니까.’
물론 작년에 뿌린 씨앗이 이렇게 큰 결실이 될 줄은 몰랐지만.
웹드라마 어워즈(Awards).
국제 웹드라마 전문 시상식으로 이번이 6회째 개최되는 꽤 규모가 큰 시상식이었다.
천 명이 넘는 전문 평가위원단과 심사위원들이 작품성, 연기, 화제성 등 총 6개 부문 24개 항목을 세부적으로 매년 평가해 선정하는 시상식.
이번엔 총 20개국, 80개 선정 작품을 발표했고, 최종적으로 온라인으로 시상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80개 작품 중 한국 작품은 단 세 편.
그 중 무려 두 작품이 내 작품이었다.
‣ 여우주연상, 신하율.
작품 : 「군필 여고생이 되었다」
‣ 베스트 각본상, 권서준.
작품 : 「넝쿨째 굴러온 전 남친들」
‣ 베스트 드라마상, 소담 프로덕션.
작품 : 「군필 여고생이 되었다」
대상에 준하는 베스트 드라마상과 각본상에 내 이름이 올랐다.
연기자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인 여우주연상 역시 신하율이 수상했고.
시상식은 다음 달 온라인으로 치러질 예정.
그러나 수상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
늦은 저녁.
상암동 근처 횟집에서 조촐한 축하연이 벌어졌다.
“이런 날 한잔해야지, 언제 한잔합니까?”
내 수상 소식을 들은 본부장의 지시에 미팅하다 말고 사람들이 모였다.
본부장, 정은미 피디, 그리고 진영민 CP까지. 제작팀 실무진이 모인 자리. 술잔을 채운 본부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작가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드라마 시작 전에 이런 좋은 소식도 들리고, 아무래도 우리 작품이 잘 될 거 같은데요?”
본부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축하를 건넨다. 옆에 있던 진영민 CP도 잔을 들며 거든다.
“그러니까요. 각본상에, 작품상이라니 웹드라마에서는 뭐 정점을 찍으셨네요.”
“작가님, 내친김에 이번엔 이쪽에서 정점을 찍으셔야 주셔야 합니다. 믿고 있는 거 아시죠?”
넉살 좋은 본부장의 칭찬.
나 역시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믿어주시는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만, 저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하죠. 웹드라마도 여기 계신 정 피디님이 잘 찍어주셔서 수상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이번 수상의 공로를 정 피디와 함께 나눴다.
“...”
정 피디가 순간 감동한 듯 나를 보다가 이내 코끝을 훔친다. 서서히 환해지는 얼굴, 그래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법이었다.
옹골차게 웃던 정 피디가 이내 잔을 든다.
“작가님, 이번에도 잘 찍어보겠습니다!”
“이야, 우리 정 피디. 기합이 빡 들어갔는데? 우리 다 같이 기합 좀 모아볼까? 야, 야, 영민아, 뭐하냐? 얼른 잔 안 채우고?”
본부장의 재촉에 진영민 CP가 사람들의 잔을 채운다.
“자, 이번 작품의 대박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불살라 파이팅!”
의지가 가득 담긴 본부장의 건배사와 함께 허공에서 잔이 부딪친다.
술이 돌고 자연스럽게 웃음꽃이 핀다.
나는 입안에 남은 술맛을 음미하며 조금 전 본부장의 말을 되뇌었다.
‘드라마의 정점이라...’
너스레 떠는 본부장의 말에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니까.
‘이제 진짜 시작이지.’
술잔이 돌고 자연스럽게 밤이 깊어진다.
드라마에 대한 의욕도 자연스럽게 불타오르고.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뜻밖에도 신하율이었다.
-작가님, 소식 들으셨어요? 저희 작품이 베스트 드라마상을 받았어요!
본인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터라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한껏 올라간 신하율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기분마저 묘하게 끌어올린다.
“하율 씨도 여우주연상 축하드려요. 고생한 결실을 뒤늦게나마 이렇게 거두게 되네요.”
-저야 솔직히 작가님 대본 덕에 받은 거죠. 정말 감사드려요. 아, 지금 지방 촬영 중인데, 서울 올라가면 한번 찾아뵐게요.
“그래요. 그때 한번 봅시다.”
-아무튼 각본상에 대상까지,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작가님!
전화를 끊었지만 감동에 젖은 신하율의 목소리가 여운처럼 귓가에 남는다.
신하율은 자신의 수상 소식보다 작품에 대한 수상 소식을 더욱 기뻐했다.
그래.
연기를 먼저 생각하는 배우.
인기보다는 작품을 중요하게 여기는 배우.
엄청난 인기를 얻었음에도 신하율은 여전히 배우 신하율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가 되는 거고.’
과연 연기에 집중한 신하율이 보여줄 연화의 모습은 어떠할까. 벌써부터 기대감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선 완벽한 대본이 필요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집으로 찾아온 정 피디와 함께 미팅을 했다.
숙취가 남았지만 지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열정에 우리는 회의에 집중했다.
전체 플롯을 확인하며 다시 한번 스토리 라인을 튼튼하게 다졌다.
“후아, 이제 준비는 거의 끝났네요.”
“네, 대본 집필만 남은 거죠.”
“그만큼 앞으로 자료 조사도 많이 필요하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묻는 정 피디의 의도를 알기 때문이었다.
정 피디는 제대로 된 보조 작가를 구해주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이내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작가님, 그... 원하신다는 작가분하고는 얘기가 잘되셨나요?”
정 피디는 아직도 신경 쓰이는지 한없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물론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확인할 차례.
철컥.
때마침 누나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온다.
“어? 정 피디님 오셨네요?”
몇 번의 왕래로 안면을 튼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다.
“이제 일어난 거야?”
“응, 어제 밤새웠거든. 이것저것 찾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누나는 하품과 함께 밤새 준비한 자료를 내밀었다.
“네가 부탁한 건 여기. 그리고 추가로 알아두면 좋을 자료들은 여기다 첨부했어.”
테이블 위에 출력물들이 놓인다.
가만히 지켜보던 정 피디의 눈이 커진다.
“어? 이건...”
포스트잇을 사용해서 깔끔하게 정리한 자료들. 보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며 작성한 덕에 시간 낭비를 상당수 줄일 수 있었다.
“설마, 어제 말씀하신 분이 권지연 작가님이었어요?”
내 표정을 읽은 정 피디가 눈을 크게 뜬 채 혀를 내두른다.
“와, 이거... 진짜 정리가 엄청난데요?”
듣고 있던 누나가 민망한 듯 손사래를 친다.
“에이, 정 피디님. 괜히 비행기 띄워주지 마세요.”
“아니에요. 진짭니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다른 작가들도 탐내겠는데요?”
과장이 아닌 진심이었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잘 정리된 자료였다.
연이은 칭찬에 누나도 기분이 좋은지 어느새 미소가 떠오른다.
“재미있더라고요. 자료 조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하암.”
밤을 새운 탓에 자동으로 하품이 나온다. 그래도 기분만큼은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상쾌해 보였다.
“역시, 자기가 잘하는 일 하니까 표정이 다르네.”
“어? 내가 잘하는 일?”
내 말에 누나가 되묻는다.
“그래, 누나 원래 자료 조사하고, 편집하고 이런 거 잘했잖아. 학교 다닐 때 내 과제도 많이 도와줬고.”
옛날얘기라 생각하는지 누나는 피식 웃는다.
“그거야 남들 다 하는 정도지 뭐.”
“아니거든? 누난 아직도 누나 재능을 모르는구나?”
무슨 소린가 싶어 누나가 눈을 깜빡인다.
“누나가 직접 봐봐. 누나가 정리한 이 자료들을 어느 작가가 보고 감탄하지 않겠어?”
“맞아요. 이 정도로 잘 된 자료 조사는 본 적이 없다니까요? 작가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정 피디도 합세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
누나는 멍하니 자신이 밤새 만들어낸 자료집을 바라봤다. 본인이 봐도 뿌듯한 결과물에 순간 생각에 잠긴다.
그래.
지금이 내 생각을 전달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슬쩍 몸을 기울인 채 무심한 척 한마디를 툭 건넨다.
“누나,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일해 볼래?”
***
“...어?”
권지연은 순간 머릿속이 멍했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제안 때문이었다.
“이번 사극에 서브 작가가 필요한데, 이왕이면 믿을 만한 사람하고 같이 하면 좋잖아.”
대본과 관련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찾아온 예상 못 한 제안이었다.
그것도 웹드라마를 섭렵하고, 연극 무대마저 휩쓸고 있고, 이제는 24부작 사극까지 도전하는 천재 작가인 동생의 제안이었다.
‘함께 일하자고?’
권지연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서브 작가이긴 하지만 동생과 함께 그토록 꿈꾸던 공중파 방송 대본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만큼 부담감도 크게 다가온다.
“이 작품... 너한테 되게 중요한 거 아니야?”
“중요하지. 이거 망하면 다음부터 이 바닥엔 얼씬도 못 할 걸?”
“근데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솔직히 글을 잘 못 쓴단 말이야. 웹드라마 쪽대본도 못 써서 이러고 있는데...”
권지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권서준은 그것마저 예상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못 쓰는 게 아니라 잘 쓰는 분야가 다를 뿐이야. 내가 요리사라면 누나는 신선한 재료를 준비해주는데 특화된 사람이니까.”
“...재료?”
“그래. 이거처럼.”
권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자료집을 흔든다.
그 모습에 권지연은 순간 생각에 잠겼다. 바로 어젯밤의 기억이었다.
동생을 위해 이옥 선생에 대한 자료 조사하던 시간들.
“솔직히 재밌지 않았어?”
“...”
동생의 말에 권지연은 부인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까지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맛깔나게 재료를 준비하는 건 너무나 재미있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렇게 신이 났던 적이 없었지...’
막막함에 글을 포기하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드디어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찾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게 진짜 나의 길일 수도 있잖아...’
두려움 반, 호기심 반.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래요, 이참에 우리 같이 일 한번 치자고요. 언더 독의 반란!”
옆에 있던 정 피디도 거든다.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둘이라면 해볼 만했다.
“어때, 나랑 같이할래?”
다시 한번 권서준이 손을 내민다.
“...”
조금 전과 동일한 질문.
그러나 권지연의 대답은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토머스 울프.
미국 문학을 상징하는 개성 넘치는 세 명의 천재 작가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한 명의 편집자를 만났다는 거야.’
전설의 천재 편집자.
그의 이름은 바로 맥스 퍼킨스(Max Perkins)였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천재 작가들 옆에는 천재 편집자가 있었다.
큰 틀에서 작품을 볼 줄 알고, 대중의 니즈를 세심하게 파악하며, 동시에 작가가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모든 제반 사항을 준비해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누나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만 그건 차차 해결될 일이었다. 게다가 누나의 합류로 당분간 자료조사에 대해선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물론 누나에 대한 내 계획은 단순히 서브 작가가 아니었다.
‘내가 기획한 책을 온전히 출판할 수 있는 출판사의 대표. 그게 누나를 향한 나의 계획이니까.’
물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누나는 더 성장해야 했고, 자금도 지금 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다만, 언젠가는 거머쥘 미래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고?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제 남은 건 대본 집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