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published - 출판된 (3)
46.
***
제목 : 미정
평생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한 노회한 정치인 오태구 의원은 유일한 라이벌마저 당내 경선에서 이기고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복종과 지지는 정치인에게 있어 결국 같은 거야. 이제 멀지 않았어. 대한민국을 내 발아래 둘 날이...’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선 그 순간, 알츠하이머가 찾아온다.
청천벽력 같은 불행.
높이 올랐기 때문일까.
그의 추락은 더욱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 뒤로 많은 것들이 달라진 그의 삶을 통해 욕망과 삶, 존재에 대한 담론을 담았다.
이번 작품의 핵심 소재는 죽음과 상실.
외할머니와의 가슴 아픈 추억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했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을 잃어가는 모습 속에서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은 던지고 싶었다.
아쉬움과 미련.
되돌릴 수 없는 후회와 원망.
작품 속엔 회한으로 가득 찼던 내 삶이 켜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두 달에 걸친 집필 끝에 드디어 마지막 장이었다.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족들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공들여 쌓은 만큼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여기가 제일 중요해.’
길게 달려온 경주의 결승점.
모든 감정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죽음을 맞이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병약한 몸뚱이를 바라보던 심정이 떠오른다.
손녀가 내 손가락을 쥐어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기억.
손가락 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니, 인간이 이렇게도 나약한 존재였단 말인가?
내 온몸을 감싼 무력감은 공포이자 고통 그 자체였다.
힘을 주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손.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두 가지였다.
덧없는 욕망에 대한 후회.
그리고 당연하게 누렸던 생명의 소중함.
서서히 몸 밖으로 생기가 빠져나간다.
아득해지는 의식과 달리 온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
많은 것들이 혼재된 혼란 속에서 이내 무엇인지도 모를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서 정든 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윌리엄... 윌리엄?’
내 고향 친구, 왓슨이었다.
점잖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나 돌덩이 안에 갇힌 듯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윌리엄, 런던에서 자네 친구들이 왔다네.’
‘날세. 자네,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나도 왔네. 자네가 이리 누워있다니 내 마음이 무겁군.’
‘왕의 극단’에서 평생 고락을 함께한 존 헤밍즈(John Heminge)와 헨리 콘델(Henry Condell)이었다.
‘들린다네. 내 귀에 똑똑히 들린다네.’
기쁜 마음에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자네가 이렇게 누워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그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씩 죽음이 다가온다.
인간이라면 모두 겪게 되는 명백하고 공정하며 평등한 사건.
그러나 존재의 사멸은 결코 평등하지 않은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분하고,
서글프며,
애처롭기까지 한 자기 연민.
죽음 직전에 느낀 감정들이 뜨거운 불길처럼 명치부터 치밀어 오른다.
그래.
작품 속에서 숱한 죽음과 비극을 다뤘지만 내 죽음만큼 나를 애통하게 만드는 건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관통하는 대사가 있었다.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불빛이여!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한이 서린 맥베스의 외침이 내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래, 이거야...’
솟구치는 영감에 빳빳하게 굳어있던 손끝이 꿈틀거린다.
오랜만에 푹 젖어 드는 작품세계.
이건 그동안 내가 썼던 비극의 결정체였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힌다.
주인공의 굴곡진 삶이 고운 채에 걸러져 끝내 단 두 개만 남는다.
덧없음.
그리고 행운.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영감을 통해 드디어 내 첫 소설의 제목이 탄생한다.
제목 : 덧없는 행운이여.
그리고 잠시 뒤,
타닥타닥 타닥타닥 타다다닥.
키보드 위에 놓인 두 손이 마치 경주를 시작한 말처럼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한 달 뒤.
송영도 교수는 본관 건물 2층으로 향했다.
오늘 오전에 있을 문창과 교수회의 때문이었다.
내년을 대비하기 위해 각종 사안을 의논하는 자리였지만 송 교수의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늦지 않게 제출했겠지?’
권서준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강의 때 표정을 보니 이미 낸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정영만 회장이 이번 공모전의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했지만 애써 사양한 상태.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으니까.’
철저하게 권서준이 가진 문학적 가치를 평가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와이즈 출판사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곳이고.’
이제는 여느 망생이처럼 권서준의 당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초조했다. 마치 자신이 처음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그때처럼 심장이 떨려온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대한민국 문학계를 이끌어나갈 인재의 첫걸음이었다.
그전에 웹드라마와 희곡으로 이룬 성과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통 계보는 아니었다.
‘어떻게 될까, 아니 또 어떤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걷다 보니 어느새 회의실에 도착했다.
“어? 송 교수!”
한참 떠들고 있던 교수들이 송 교수를 보고 반긴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고 있나 했더니 최근 엄청난 대외 활동을 보이는 권서준에 대한 얘기였다.
“아주 난리에요. 학과 애 중에 서준이 웹드라마 안 본 애들이 없다니까요?”
“저도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음, 그런가? 난 아직 안 봐서...”
유독 박성규 학과장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쉬워한다는 게 정확하겠지만.
“아, 학과장님은 아직 안 보셨구나. 근데 솔직히 웹드라마보다는 연극이 더 대박을 터트렸잖아요. 벌써 4만 명이...”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 교수가 오지랖 넓은 나 교수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굳어지는 박 교수의 표정을 읽은 것.
순간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그러자 옆구리를 찌른 동료 교수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한다.
“참, 송 교수님. 그러고 보니까 서준이가 다음엔 무슨 작품 한답니까? 웹드라마예요? 아니면 희곡이에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죠.”
“아이, 왜 그러세요. 서준이가 송 교수님이랑 제일 가까운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세요.”
옆에 있던 다른 교수들도 덩달아 관심을 보인다. 그들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희곡이냐, 대본이냐, 아니면 시냐, 에세이냐에 따라 자신들과의 접점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송 교수의 대답을 기다리는 교수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송 교수가 나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소설을 쓴답니다.”
“소, 소설이요?”
놀란 교수들이 시선을 교환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맛을 다신다.
익숙한 일이었다.
진리를 탐구해야 할 상아탑이 추악한 탐욕에 얼룩진 건 오늘 내일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송 교수는 더 간절히 원했다.
이 썩어빠진 바닥을 단숨에 뒤엎을 엄청난 작품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송 교수 머릿속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11월 말.
와이즈 출판사 회의실.
이번 공모전 심사를 맡은 위원 8명이 최종 심사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모두 어깨를 으슬으슬 떨며 안으로 들어온다.
“어우, 날이 꽤 쌀쌀해졌네요?”
“가을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겨울이네요.”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마치 출판 시장 같네요.”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심사위원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듯 쓴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이번엔 좀 어때요?”
“글쎄요. 제가 본 작품 중엔 영...”
한 심사위원의 말에 사람들이 혀를 찬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날이 퇴보하는 작품의 수준.
비단 오늘내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심사위원을 맡아도 기대감 없이 심사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종 심사에 오른 건 총 열 작품.
그중 가장 뛰어난 세 작품을 고르는 자리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정영만 회장이 안으로 들어온다.
“자, 다들 모였나?”
“네. 잘 지내셨습니까. 어르신.”
문학계 대선배이기에 후배들이 깍듯이 인사를 한다.
정 회장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시작된 최종 심사.
철저하게 익명으로 제공된 원고 뭉치.
심사위원들이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들을 읽어 내려간다.
그런데...
한 작품을 읽던 정 회장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이건...’
충격을 받은 정 회장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낸다.
육십 평생을 권력욕에 사로잡혀 산 인간이 뒤늦게 앓게 된 알츠하이머로 인해 변화되는 삶을 그린 소설이었다.
그동안 치매를 다룬 문학 작품은 많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작품의 깊이 때문이었다.
‘이런 섬세한 묘사와 표현은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독선적인 주인공이 서서히 무너지는 묘사가 기가 막혔다.
‘알츠하이머를 앓아가면서 겪는 변화가 이렇게 생생하다니... 마치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것처럼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제와 시의성 면에서도 탁월했다.
기억과 상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기억을 잃는다면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한 대사가 떠오른다.
[to be or not to be]
존재론에 대한 지독한 고찰에선 햄릿의 고뇌가 엿보인다.
점점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아내에 대한 의심은 사랑으로 변모되고,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에서 잊고 있던 아내와의 추억이 선명해진다.
‘이건 오셀로를 응용한 모습이고...’
무력해지는 몸뚱이를 들고, 다급히 남은 자식들에 자신의 남은 생을 의탁하려는 모습에선 어눌하고 늙은 리어왕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끝내 권력에 취해 벌인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죄책감에 빠지는 모습은 흡사 맥베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일명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그 거대한 이야기가 고작 소설 한 권에 담겨있었다.
‘이게... 가능한 거였나?’
그것도 단 한 글자의 낭비도 없이 완벽하고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펼쳤다.
“하아...”
같은 작가이기에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우리가 한 수 배워야겠는데?”
정 회장의 말에 심사위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을 넘어서 이 작품이 갖는 가치에 대해선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슴 절절한 여운이 좀처럼 식지 않는다.
숱한 기대주들을 많이 봤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런 필력을 가진 작가는 본 적 없었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자신과 송 교수가 기대를 걸고 있는 한 청년.
‘아무리 그 친구라고 해도... 설마, 이 정도라고?’
의심과 기대가 공존한다.
이쯤 되니 심사는 하나마나였다.
심사위원들의 의견도 하나로 통일된다.
대상이 이미 결정 난 상황.
정 회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채 실무진을 향해 물었다.
“이 작가, 이름이 뭔가?”
정 회장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잠시 뒤,
실무진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 석 자가 흘러나왔다.
“권서준입니다.”
“...”
순간 정 회장의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자기 생각이 맞았음에도 충격은 감해지지 않는다.
현시대를 통찰하는 안목.
게다가 고전이나 다름없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해가 완벽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인물이야. 그래서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살아있는 듯 생생한 거고...’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가 떠오른다. 그래서 아류라고 느껴지냐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의 시각을 입혀 훨씬 더 새롭고 놀라운 서사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권서준이 쓴 첫 번째 비극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비극도 나올 수 있었다.
‘마치 400년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처럼 말이지...’
심장이 떨린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감동이 밀려온다.
‘...셰익스피어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작품이 주는 울림은 깊고 거대했다.
순간 정 회장의 머릿속에 햄릿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늦은 밤.
경계 교대를 하러 온 보초병 바나도의 대사였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명대사에 비하면 지극히 짧고, 평범한 대사.
그러나 배경을 알면 알수록 뇌리에 남을 수밖에 없는 대사였다.
‘원래는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프란시스코가 물어야 할 말을, 교대하러 올라오던 바나도가 묻는 장면이었지...’
바나도는 한없이 조심스럽고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Who's there?’
‘누구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정 회장 역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제 갓 소설을 쓰기 시작한 후배를 향해...
‘대체, 자네는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