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6화 (26/203)

# 26. amazement - 놀라움 (2)

26.

***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어언 11시간.

송영도 교수는 학교에서 제공해준 비즈니스석을 이용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잠시 떨어져야만 했다.

‘이게 훨씬 편하군.’

대부분의 사람이 잠든 시간이었지만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책을 펼쳐 들었다. 당연히 과제 때문이었다.

4박 5일간의 영국 학회 참가 일정.

그러나 문창과 학부생에게 과제를 피해갈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현대 시 읽기와 창작 조미령 교수.

시나리오 기법 나혜순 교수.

디지털 스토리텔링 한재원 교수.

소설창작의 이론과 실제 송영도 교수까지.

당장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만 다섯 개가 넘었다.

시, 소설, 대본까지.

그야말로 과제 종합잔치.

새삼 장현웅의 목소리가 오버랩 된다.

‘이건 문창과가 아니라 과제창작학과라고!’

그러나 내 입장에선 하나같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과제를 할수록 창작 욕구가 솟구친다.

‘더 쓰고 싶어.’

대부분의 과제를 마무리했지만 나는 아직도 배가 고팠다.

이제 남은 건 영미문학산책 박성규 교수의 과제뿐.

[희곡을 창작하시오.]

[주제 : 자유 주제]

희곡.

무대 상연을 전제로 쓰인 글.

문창과에선 연례행사처럼 주어지는 과제였다.

‘모든 대본의 근본은 희곡이야. 그 희곡을 써봐야만 대본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진다고. 특히 막과 장의 구분을 통해 나누는 구성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보다 대본의 퀄리티가 깊어지지. 문창과 학생이라면 그걸 꼭 한 번 경험해봐야 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고지식한 박 교수의 발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학생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희곡은 나의 주 장르였고, 한평생 쓴 희곡만 수 백 편이 넘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내 머릿속 도서관만 뒤져도 수많은 희곡이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제일 마지막에 하냐고?

그거야 가장 맛있는 부위는 제일 마지막에 먹는 법이니까.

‘아끼고 아껴둔 거지.’

나는 보다 새로운 감각을 입히고 싶었다.

과거의 것이 아닌, 달라진 내가, 달라진 영국에서 느끼게 될 날 것 같은 감상을 덧입히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더 근사한 걸 만들어 낼까.’

언제나 그렇듯 창작자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었다.

잠시 뒤,

비행기 안엔 곧 착륙한다는 기장의 안내가 울려 퍼졌다.

***

다음 날.

나는 밤새 학회의 성격과 참석자 명단, 그리고 최근 학회 분위기 등을 파악했다.

특히 ‘미술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는 나 역시 관심이 가는 분야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학회에 도착해서 부딪쳐봐야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약속한 시각에 만나 간단하게 호텔 조식을 즐긴 후 학회 시간에 맞춰 영국왕립예술대학에 도착했다.

하나같이 예술계에 족적을 남긴 유명 인사들이 참여한 학회.

얼마나 신선한 생각들을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안녕하세요. 저는 콜롬비아에서 온 페르난도입니다.”

“아, 혹시 왜곡된 비너스를 그리신 분? 이거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나같이 각국의 유명 작가와 예술인들. 서로의 대화 속에서 깊이 있는 대화가 오고 간다.

자유로운 학회의 분위기 덕에 어린 동양인 청년에게도 대화의 장은 활짝 열려있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특히 유명한 미술 작품들을 토대로 나누는 내용은 그 시절의 수많은 예술가와의 토론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나는 여러 사람들을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 시간.

유명 작가들과의 대화를 마친 송 교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서준아, 시간 될 때 이거 한번 읽어볼래?”

송 교수는 특별히 오늘 자신이 발표할 발표문을 미리 보여줬다.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미리 봐두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이따 보자고.”

영어로 쓰인 발표문.

제자를 위한 송 교수의 배려였다.

‘역시, 수준이 높아.’

송 교수의 발표문에는 문학적 용어와 어려운 표현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내 입장에서 크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법률가이면서 철학자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말로는 그의 저서에서 학문의 분류를 가장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학문이 인간의 어떤 이성적 능력과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학문에 적합한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새로운 미술과 문학의 분류를 통해 시대에 맞는 문학의 방법론을 제시해야 합니다.]

학회 주제에 적합한 내용.

꼼꼼한 그의 성격답게 명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어휘로 발표문의 품격을 높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내용이 거슬린다.

‘근데, 크리스토퍼 말로는 이런 책을 쓴 적이 없는데...’

당대 나의 라이벌이자 천재 작가였던 크리스토퍼 말로.

누구보다 나와 토론을 많이 했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기에 그의 저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오히려 송 교수가 말하는 내용은 크리스토퍼가 아닌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이었다.

‘그래, [대개혁] 1부였었지.’

아마 동시대를 산 두 명의 천재 작가를 순간 착각한 듯싶었다. 송 교수답지 않은 실수.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타라는 것도 마찬가지야. 너무 많이 보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이유야 어쨌든 이대로 발표를 했다가는 민망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었다.

‘발표 전에 알려줘야 할 텐데...’

다만 자존심 강한 송 교수를 민망하지 않게 하면서 도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 그 방법이 좋겠어.’

다행히 어렵지 않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학회 발표를 기다리던 송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괜찮겠지?’

경험 삼아 자신의 발표문을 줬지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이해하기 쉬운 주제는 아니니까.’

영국인도 잘 사용하지 않는 문학적 용어가 많이 사용된 발표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가운데 뭐라도 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건넨 것이었다.

‘발표 전까지만 이해해도 다행이지.’

어느 정도 영어를 한다고 해도 결코 쉬운 발표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채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권서준이 원고를 가져온다.

설마 벌써 다 읽었다고?

놀란 송 교수가 쳐다보자 권서준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한다.

“이번 학회 주제와 부합되는 내용이 정말 좋았습니다.”

순간 송 교수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떠오른다.

발표문만 무려 피피티 20장이 넘는 분량.

30분이면 한 번에 쭉 읽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좋았다는 평가까지 하다니.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지?”

송 교수가 팔짱을 낀 채 권서준을 바라봤다. 그러자 녀석은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이 바로 입을 뗀다.

“일단 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과연 예술과 기술의 본질이 무엇일까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특히 문학과 미술처럼 각기 다른 예술 분야가 만나 새로운 창작행위로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인상 깊었고요.”

순간 송 교수의 눈썹이 한번 들썩인다.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번 학회의 주제와 관련한 자신의 주장이기도 했다.

일단 주제는 합격.

그러나 어디까지나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조금 더 확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 생각엔 말씀하신 대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예술의 장르 또한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찬 목소리에 송 교수의 관심이 동한다.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

“문학은 어느 순간부터 글로 포섭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성격을 잃고 작은 틀에 갇혀 장르화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미술의 경우 시각적인 모든 자극을 품으며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권 서준은 시대에 따른 문학과 미술의 변천사를 토대로 둘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텍스트가 갖는 문학성, 미술이 갖는 시각성. 이 둘의 실험적 창작 행위를 통해 보다 다양한 예술적 행위가 이뤄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송 교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권서준은 정확히 자신의 발표문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독해한 수준이 아니야. 발표문 전체를 완벽히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발언이라고.’

체계적인 정리는 깊이가 있었다.

어느새 송 교수의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역시, 데리고 오길 잘했어.’

모처럼 보람을 느끼는 선택이었다.

“생각보다 영어를 잘하는구나?”

“감사합니다.”

차분하게 인사를 하는데 문득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뭐지?”

“아,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입니다. 교수님 주제문에 인용되어 있기에 관심이 생겨서요.”

“그래, 그 책은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지.”

지신이 발표문에도 인용한 책이었다.

스스로 연구하는 모습까지 뿌듯했다.

‘아마 초반부였지.’

송 교수는 기분 좋게 자신의 발표문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읽어가던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린다.

‘크리스토퍼 말로?’

프랜시스 베이컨을 그만 잘못 표기하고 말았다.

수십 번을 넘게 검수했지만 찾지 못한 실수였다.

“...”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이대로 발표를 했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송 교수의 관심을 끄는 건 조금 전 권서준의 행동이었다.

발표문에서도 틀린 저자명.

그런데도 녀석은 정확하게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을 가져왔다.

‘설마, 이 녀석... 내가 인용한 부분이 틀렸다는 것까지 안 건가?’

어려운 문학 용어.

전문가 뺨치는 표현들이 즐비한 발표문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 안에 잘못된 내용까지 정확하게 찾아냈다.

‘학부생은 잘 모르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서까지 이미 알고 있다니...’

순간 녀석의 문학적 소양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을 수도...’

게다가 담당 교수의 실수를 무안하지 않게 알려주는 센스도 장난 아니었다.

지켜볼수록 놀라게 하는 녀석.

송 교수의 입에선 그저 감탄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삼십 분 뒤.

내로라하는 유명인들의 참석과 함께 학회 첫날 공식행사가 시작됐다.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왕립예술학회와 왕립예술대학이 공동 주최하는 제4차 현대예술 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기조연설과 함께 미술 분야, 문학 분야, 그리고 각국의 예술 동향과 발전 방향성에 대해 발표를 이어간다.

그리고 드디어 송 교수의 발표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발표를 맡게 된 송영도입니다.”

미국식 영어 발음이 장내에 울려 퍼진다. 맨부커 수상자이자 해외에서도 유명한 작가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미술과 문학 분야가 기술적인 성장을 토대로 서로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문제의 부분이었다.

“법률가이면서 철학자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의 저서 [대개혁] 1부에서 학문의 분류를 가장 먼저 시작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송 교수는 실수한 부분을 정확하게 수정했다.

굳이 번거롭게 우회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송 교수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

‘동시에 내 수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고.’

잠시 뒤,

송 교수가 발표를 마치자 장내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퍼진다.

흡족한 결과.

이내 발표를 마친 송 교수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송 교수의 미소.

그 속에 담긴 건 제자의 재능을 발견한 스승의 기대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