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25화 (25/203)

# 25. amazement - 놀라움 (1)

25.

***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의 공개 이후 내 인생은 많이 바뀌었다. 가장 고무적인 건 바로 대우였다.

지난번엔 퀵으로 대충 계약했다면 이번엔 직접 날짜를 잡고 사무실에서 정식 미팅을 하기로 했다.

“아이고, 권 작가님 오셨습니까?”

소담 프로덕션 1층에 도착하자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직접 누르고 회의실까지의 안내도 대표가 직접 했다.

“오셨어요, 작가님.”

미리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은미 피디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대표와 정 피디가 모인 자리.

나는 자연스럽게 지난번 선물에 대한 인사를 꺼냈다.

“참, 지난번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네? 선물, 이요?”

당황한 대표가 슬쩍 정 피디를 쳐다본다.

“지난번 대표님이 보내주신 소고기요.”

“아, 아... 그거요. 다행이네요. 하하하.”

“어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나는 일부러 선물을 언급했다.

이게 다 정 피디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걸 아는 정 피디가 슬쩍 고맙다는 눈짓을 보낸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계약서를 두고 둘러앉았다.

“이번 원고료는 섭섭하시지 않게 준비했습니다.”

말투 하나하나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할까 조심스럽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적당한 거리감이 기분 좋았다.

“정 피디, 뭐해? 보여드리지 않고.”

대표의 말에 기다리고 있던 정 피디가 계약서를 내민다.

“여기 있습니다.”

계약서를 보여주는 손길에 자신감이 넘친다. 얼마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꽤나 힘을 쓴 게 분명했다.

나는 한 손에 만년필을 든 채 계약서를 확인했다.

<웹드라마 대본 계약서>

갑 : 권서준

을 : 소담 프로덕션

제작 형식 : 웹드라마 6회 예정.

제작 길이 및 편수 : 회당 10분물 6회

<지급 시기별 원고료>

계약금 : 500만 원.

1차 중도금 : 1,500만 원.

2차 중도금 : 1,500만 원.

합계 :3,000만 원.

회당 원고료가 무려 500만 원이었다.

지난번보다 무려 3배 가까이 오른 금액이었다.

“좋은 조건이네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야 이 금액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정 피디의 체면이 살 테니까.

“후, 다행이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업계 최고 대우입니다. 웬만한 신인 작가의 미니 시리즈 회당 원고료랑 맞먹으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 이상의 결과물로 보답해드릴 테니까요.”

“하, 역시. 권 작가님의 그 자신감이 저희를 안심시켜주네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대표와 악수를 했다.

물론 정 피디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약서를 작성한 뒤, 나는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로 향했다.

***

교수 연구동.

“요즘 그쪽 분위기는 어때?”

송영도 교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와 티타임을 즐겼다.

“말도 마세요. 아주 죽겠어요.”

온정 출판사의 주상진 편집장은 아이스커피를 마치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창진 작가 작품이 한 달 동안 4천 부도 안 팔렸다니까요. 정말 큰일 났어요.”

조창진 작가라면 30대 작가 중 주목 받는 신진 작가였다. 그런데 판매 부수가 4천도 안 됐다는 건 그만큼 시장이 얼어붙어 있다는 뜻이었다.

“네임밸류 있는 작가를 데려다 써도 이러니 진짜 죽겠어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아예 책을 안 읽는 건 아니에요. 에세이, 장르 소설, 상업 출판 쪽은 또 그렇게 호황일 수가 없거든요.”

주 편집장의 말대로 최근 출판계는 양분된 상태. 작품성과 사색보다는 가볍고 편한 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순수 문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상업 소설과 달리 순수 문학만이 전해줄 수 있는 깊이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깊이는 고작 ‘척’하는 용도로 소비될 뿐이었다.

소위 문학 엘리트들이라는 자들이 문학답지 못한 것들을 명품처럼 포장해 내다 파느라 생긴 문제들이었다.

‘한두 번은 속지만, 대중은 결코 바보가 아니라고.’

알맹이 없는 작품을 읽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무것도 남지 않는 책은 결국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순수문학만 고집해서는 버티기 힘들어요. 비창 출판사는 이번에 장르 소설 쪽으로 합병도 생각한다던데요?”

살아남기 위한 출판업계의 발악이었다.

“우리 대표도 심각하게 고민 중이에요. 안 되면 뭐 웹소설 사이트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냐 이런 말까지 나오고 있고요.”

주 편집장은 담배 생각이 간절한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현재 대한민국 문학계의 현실이었다.

그때, 지켜보던 송 교수가 단편소설을 내밀었다.

“이거 어떤지 한 번 봐봐.”

“뭔데요?”

“일단 읽어 봐.”

주 편집장이 평생 알아 온 송 교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선배가 저렇게 말하는 거지?’

주 편집장은 좌우로 고개를 스트레칭하고는 이내 원고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잠시 뒤, 읽어가던 주 편집장의 눈이 빠르게 깜빡인다.

“어? 이거, 뭐에요?”

“어때?”

“완전 괜찮은데요? 선배님이 쓰신 거예요?”

“아니, 우리 학생이.”

“네, 네?”

믿기지 않는 말에 주 편집장이 기침을 토해낸다.

“정말이야. 그래서 나도 놀라고 있고.”

“...”

송 교수는 결코 농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 편집장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원고로 시선을 옮겼다.

[봄과 삶]

작품 속에서 봄은 역동성을 의미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

그리고 변화는 곧 움직임을 뜻했다.

움직임은 생명을 의미하고, 생명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세상은 그렇게 순환하고, 자연도, 인간도 그렇게 큰 틀 안에서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지.’

언제나 그렇듯 자연은 가장 감각적인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다.

감각이 영감을 이끌고, 영감은 다시 실체를 가진 이미지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심상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기성 작가에게서도 보기 힘든 필력.

게다가 장편도 아닌 고작 A4 6장짜리 단편 소설로 그만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이거, 정말 학부생이 썼다면... 엄청난데요?”

송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한 작품으로 판단하긴 일러.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지.”

송 교수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다소 상기 된 상태였다.

왜냐고?

눈여겨볼 대상이 있다는 건 아직 희망이 있다는 소리니까.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참, 이번에 영국 가신다는 거, 이 학생과 같이 가시는 건가요?”

송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보고 싶군.’

송 교수는 벌써부터 권서준의 다음 작품을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급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이번 주 주말이 학회를 위해 영국으로 떠나는 날이었으니까.

***

웹드라마의 성공 이후 달라진 건 제작사의 대우뿐만이 아니었다. 내 학교생활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선배, 선배. 제 글 좀 한 번 봐주실 수 있어요?”

“서준아, 이번에 조별 과제 우리랑 하는 거 어때?”

“저희 하반기 문비 공모전 준비하는데 같이 하시죠?”

강의를 듣기 위해 앉아 있는데 자꾸만 귀찮게 말을 붙인다.

“미안, 관심 없어서.”

나는 더 이상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전에는 비싸서 살 생각도 못 했던 애플사의 에어팟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자 주변이 고요해진다.

‘역시 돈의 가치는 무시할 수 없어.’

물론 모든 사람이 나의 웹드라마 성공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학회 자료를 받기 위해 찾아간 연구실.

송영도 교수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웹드라마를 썼다고?”

내 소식이 송영도 교수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네.”

“그렇군.”

분명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대중적인 장르에 묻혀 있다 보면 감각조차 무뎌지는 경향이 있어. 조심하는 게 좋아.”

말속에 담긴 뼈가 느껴진다.

송 교수의 의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대중적인 장르보단 순수문학 쪽으로 가길 원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 흔들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쓸데없이 담당 교수와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영국은 가본 적 있어?”

“처음입니다.”

“그렇군. 이거 한 번 보고 가면 좋을 거야.”

송 교수가 내민 건 이번 학회 관련 자료였다.

이번 학회의 장소는 런던에 위치한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이었다.

주제는 문학과 미술의 만남.

텍스트 예술과 시각 예술의 콜라보를 통해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자는 게 핵심 주제였다.

기간은 총 4박 5일.

다양한 니즈가 존재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예술가, 학자들의 교류 현장이었다.

‘전시와 함께 연설, 시 낭송 등이 있군.’

마치 그 옛날 유럽의 화가들이 함께 모여 미술을 논했던 것처럼 분야를 넘어 다양한 예술가와 학자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논해보자는 게 바로 이번 학회의 취지였다.

문득 런던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미 뉴스와 언론을 통해 대강의 영국의 이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남은 영국은 조금 다른 이미지였다.

자연스럽게 그 시절 런던 다리가 떠오른다.

그 당시 런던의 중심지였던 곳.

런던 다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의 형태를 띠었다. 200여 채가 넘는 집과 가게들이 즐비했고, 그사이 좁은 길을 마차와 가축들이 지나다녔다.

시끄럽고 악취가 풍기는 곳.

그러나 그곳엔 음악이 있었고, 어디서나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들이 있었다.

음악과 춤.

시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

광대와 가면을 쓴 배우, 곡예사들이 관객의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나의 고향, 스트랫퍼드 어펀 에이번의 모습도.

***

4일 뒤.

나는 무려 6편의 웹드라마를 집필했다.

‘한번 써봐서인지 확실히 속도가 붙었어.’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른 건 일절 하지 않은 채 작품에 집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때때로 내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바로 하수구 악취였다.

나는 새벽 무렵 완성된 원고를 보냈다.

그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 정 피디에서 바로 답장이 온다.

[고생하셨어요. 바로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침 무렵.

정 피디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달리 매우 들뜬 목소리였다.

-하아. 작가님, 최곱니다. 이대로 가시죠. 수정할 것도 없네요.

정 피디는 연이어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 정도면 차기작으로 충분한가요?

-충분하다뇨? 아주 넘치죠. 벌써부터 이걸 어떻게 찍어야 할까 머릿속에서 어질어질하네요. 아, 물론 좋은 쪽으로요.

두 번이라 그런지 대본이 훨씬 더 깔끔하게 나온 상태였다.

-참, 입금은 이번 주 내로 처리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네, 혹시 캐스팅이나 기타 의논할 내용 있으면 또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끊고 거실로 나왔다.

이제 슬슬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준비는 다 한 거야? 빼 먹은 건 없고?”

엄마가 묻는다.

엄마는 이른 새벽부터 아침을 준비했다.

김치찌개를 중심으로 한식이 거하게 차려졌다. 먼 타국을 다녀올 자식을 위한 엄마의 배려였다.

“엄마, 혹시 우리 보증금이 얼마야?”

“보증금? 2천, 근데 그건 왜?”

“하수구 냄새가 더 심해진 거 같아서.”

“...”

내 물음에 엄마가 난처해한다.

“...엄마가 주인아줌마랑 다시 얘기해볼게. 너 오기 전엔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지 말고 이사 가는 건 어때?”

“이사?”

“어. 좀 좁아도 한 5천 정도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돈이 어디 나서?”

“이번 주에 원고료 들어오거든. 보증금이랑 합치면 가능할 거 같아서.”

“서, 서준아...”

놀란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랑 누나가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봐. 대신, 이번엔 꼭 지상으로.”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우리 가족이 조금 더 밝은 곳에서 사는 것.

지금은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뒤.

나는 OZ512편 런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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