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fair play - 정정당당한 승부 (1)
14.
***
‘애들이 뭘 잘 못 알고 있는 거겠지.’
처음 공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송진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아이들의 말에 송진호는 마지못해 공지를 확인했다.
<제42회 이옥 백일장 관련 안내 공지>
‣ 부문 : 운문(시, 시조)
‣ 주제 : 길, 노래.
※ 당일 추가 시제 있을 수 있음.
‣ 1등 (1명) : 상금 200만 원과 상장.
‣ 2등 (1명) : 상금 100만 원과 상장.
‣ 3등 (1명) : 상장.
매년 열리는 백일장 중 하나였다.
교내 모든 학생이 참가할 수 있지만 수상자 대부분은 문창과에서 차지하는 학과의 축제 같은 행사였다.
상금도, 규모도 작년과 딱히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여기까진 송진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안심하며 쭉 읽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시선이 멈춘다.
‘응?’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맨 마지막에 추가된 한 줄짜리 공지였다.
[※ 백일장 1등에겐 영국 왕립예술학교 학회 참가 자격이 주어짐]
“...”
송진호는 몇 번이나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나 공지 사항엔 분명히 이전 백일장과 다른 보상이 기재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누구도 자신이 이번 학회에 갈 거라고 확답을 준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격을 갖춘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지난 3년간의 학과 성적을 봐도, 신춘문예 결과를 봐도, 기타 대외적인 성과를 봐도 최고의 결과물을 낸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백일장 결과로 새로 뽑는다고?’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공지를 올린 사람은 송영도 교수였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냉철한 이성주의자.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글의 조사 하나도 의도 없이 쓰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송 교수가 공지 내용을 실수할 리가 없었다.
결국 모든 원인은 하나였다.
‘...다 쟤 때문이야.’
송진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의실 한 가운데 앉아있는 권서준을 향했다.
모든 건 지난번 권서준이 제출한 과제가 발단이었다.
물론 다시 생각해도 그 과제의 퀄리티는 놀라웠다.
비평하는 게 오히려 무지를 드러내는 수준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작품.
마치 거장의 단편을 보는 것처럼 깊이와 예술성을 모두 잡은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결정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 자식은 딱 한 번 잘했을 뿐이라고. 그것도 운 좋게 한 번...’
고작 과제 한 번에 3년간 쌓아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건 말이 안 됐다. 움켜쥔 손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부정한들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과도한 흥분은 언제나 독이 되는 법.
송진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괜찮아. 아직 기회는 있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올 기회가 아직 남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극명하게 권서준과 자신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백일장에서... 거기서 보여주면 돼.’
굳었던 표정이 차분해지고, 움켜쥔 주먹의 힘도 천천히 거뒀다.
그러나 권서준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재미있군.’
나를 바라보는 송진호의 눈빛은 매서웠다. 안으로 애써 갈무리하고 있지만 그 눈빛에 담긴 건 지독한 뱀심이었다.
뱀심.
흔히 잘나가는 작가를 바라보며 생기는 질투와 시기 같은 감정을 의미했다.
‘생각해보니 전생에도 이런 놈이 하나 있었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왜냐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나를 질투한 사람이었으니까.
극작가이자 동료였던 로버트는 1592년에 대놓고 나를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There is an upstart crow,
beautified with our feathers.
우리들의 아름다운 깃털로 치장한 벼락출세한 까마귀!
[까마귀]
그래.
그건 내가 즐겨 들었던 욕이었다.
나의 성공과 명성을 질투한 나머지 튀어나온 로버트의 본심이었다.
물론 나는 로버트의 주장이 틀렸다는 걸 결과로 보여줬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의 작품은 고요했지만, 내 작품은 그 시절 런던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로버트는 방탕한 생활 끝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지.’
언제나 그렇듯 질투에 사로잡힌 자들의 말로는 한결같았다.
질투란 결국 자기 자신마저 태워버리는 지옥 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송진호를 바라봤다.
짐짓 진지한 표정이 그저 귀여웠다.
애처로울 정도로 미약한 앙탈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백일장을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군.’
나는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른 채 천천히 손마디를 꺾었다.
우둑우둑.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일주일 남은 교내 백일장을 위한 준비.
나는 제일 먼저 스터디를 떠올렸다.
시에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더 나은 작품 퀄리티를 위해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할 뿐이었다.
‘단순히 수상하는 걸 넘어 내가 만족할 만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다시 살아가는 이유니까.’
다행히 문창과에선 공모전이나 백일장, 하다못해 과제를 위해서도 스터디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썩 내키는 멤버가 없다는 거야.’
나는 생각에 잠긴 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권서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현웅이었다. 할 말이 있는 듯 밝은 표정으로 성큼 다가온다.
“너 이번 백일장 공지 봤지?”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그 말부터 묻는다.
“어. 봤어.”
“그거 있잖아. 너 괜찮으면 나랑 같이 스터디...”
“어? 서준 선배!”
장현웅이 뭔가 얘기하려고 할 때, 지나가던 후배들이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덕분에 말을 하려던 장현웅이 눈치를 보며 슬쩍 물러난다.
“선배, 이번 백일장 나가실 거예요?”
“아마도? 근데, 왜?”
“아, 잘됐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백일장 스터디 저희랑 같이하실래요? 이미 2명 모여서 선배만 오시면 딱이거든요.”
평소엔 인사도 잘 안 하는 것들이 먼저 말을 거는 거 보니 송 교수의 칭찬이 임팩트가 크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또 다른 동기들도 내게 다가온다.
“야, 차라리 우리랑 하자. 후배들보다야 그래도 몇 번 해본 우리랑 하는 게 너한테도 좋잖아?”
동기의 말대로 후배보단 선배가 낫고, 신입보다야 경력직이 좋긴 했다.
그런데 굳이 얘들하고 할 필요는 없었다. 내 입장에선 경력직이고, 신입이고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과 굳이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
“...”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는 듯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몇 번 보다가 다시 말을 꺼낸다.
“스터디, 안 하실 거예요?”
물론 스터디는 해야 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스터디를 넘어서 앞으로 계속 같이 갈 사람과 하는 게 더 좋았다.
‘글을 쓰는 건 단순한 행위지만, 글로 수익을 내는 데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따지고 보면 전생의 삶이 힘들었던 것도 결국 사람 부족 때문이었다.
극장 경영에, 배우 관리, 고위직 관리까지 내가 도맡아서 해결하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거기에 글까지 썼으니 몸이 축나는 건 너무나 당연했지.’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건 그저 목숨만 갉아 먹을 뿐이었다.
결국 내 염원대로 마음껏 글을 쓰기 위해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스터디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나와 함께 할 사람.
다행히 내 옆엔 적격인 놈이 하나 있었다.
“스터디는 할 거야. 근데 이미 멤버가 있어서.”
“아...”
후배들은 마지못해 포기하고는 몸을 돌려 멀어진다.
힐끗거리면서 계속 쑥덕거리는 걸 보니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거나 말거나.
둘러쌌던 애들이 물러나자 멀찌감치 서서 쭈뼛대고 있는 장현웅의 모습이 보인다.
“왜 그러고 서 있어? 할 말 있다며?”
“어? 아, 그게... 사실 나도 스터디 같이하자고 하려고 했는데 멤버가 있는지는 몰랐네. 신경 쓰지 마.”
어색한 웃음과 함께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녀석의 진심이 어떤지는 이미 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진다.
“같이할 멤버는 있고?”
“하아... 나 같은 쩌리 전과생을 누가 끼워주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문창과에서 편입생, 전과생, 글 못 쓰는 복학생은 천민 계급이었다.
당연히 스터디를 만들 때도 제일 나중에 남아 쩌리끼리 모이게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한 번 찾아봐야지. 외딴 섬은 외딴 섬끼리 통하는 게 있으니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녀석의 마음이 전해진다.
‘착해 빠진 놈.’
그동안 이 녀석에게 도움 받은 게 떠오른다.
똑같이 어려운 형편임에도 밥 사고, 술도 자주 사줬다. 글 못 쓰는 복학생임에도 나랑 친구 해준 것도 이 녀석이 유일했다.
‘그래. 내가 또 은원관계는 잘 안 잊는 편이거든.’
생각해 보면 이 녀석, 예대 출신이라 그림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다 써먹을 데가 있었다.
“야.”
“...왜?”
“스터디 룸 예약 좀 잡아 놔.”
“...어?”
“백일장 도전하고 싶다며? 그럼 스터디해야 할 거 아냐?”
“...”
장현웅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설마... 나 끼워주는 거야?”
“끼워주는 게 아니라 그 멤버가 애초에 너야.”
순간 녀석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단순한 성격이라 기분 전환도 빨랐다.
“이 자식, 역시 의리 있다니까!”
“그러니까 스터디 룸 무조건 잡아 놔.”
“오케이.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예약하고 만다!”
의지를 회복한 녀석이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외친다.
나는 양질의 스터디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주문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음 스터디까지 그림 한 장 그려 와. 백일장 시제랑 연관 지어서.”
“...”
순간 장현웅의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그림? 글이 아니고?”
“그래, 그림.”
“...”
단호한 내 말에 녀석이 소처럼 눈을 껌뻑인다.
하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시에서 그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다수의 사람은 모르니까.
그렇다고 길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효율적이지 못했다.
‘때론 긴 설명보다 일단 시키는 게 효과적일 때가 있지.’
바로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일단 써와 봐.”
“음. 오케이.”
장현웅은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일단은 스터디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가만.”
확연하게 밝아진 장현웅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봤다.
“기분도 좋은데 한잔할까? 지난번에 내가 내기 진 것도 있잖아.”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좋아! 오늘은 장 총무가 쏜다!”
신이 난 장현웅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학교 근처 호프집으로 향했다.
“사장님, 여기 먹태랑 생맥주 두 잔이요!”
잠시 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내 앞에 놓인다.
맥주.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술.
황금빛 물결 위로 풍성한 거품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다.
자연스럽게 감수성이 뭉클거린다.
‘아마 버로우(Borough Market) 시장 근처였었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맥주의 맛.
무려 400년 묵은,
아주 오래된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