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marketable - 잘 팔리는, 시장성이 있는 (3)
13.
***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퇴근한 엄마가 들어온다.
“왜 문을 막고 서 있어? 하수구 냄새나서 그러고 있는 거야?”
“아니야. 이젠 참을 만해.”
내 말에도 엄마는 코를 킁킁거렸다.
“아직도 많이 나는데 뭘... 얼른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원.”
당장 월세도 빠듯한 형편에 엄마의 한숨을 깊기만 했다.
이럴 때 엄마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게 자식 된 도리겠지?
나는 미리 인출해놓은 돈 봉투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 이사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이거로 이번 달 월세부터 내.”
엄마가 눈을 크게 뜬 채 나와 돈 봉투를 번갈아 쳐다본다.
“니가 돈이 어디서 나서?”
“엄마, 얘 웹드라마 계약했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누나가 고맙게도 대신 대답해준다.
덕분에 엄마의 표정에도 순간 안도의 기색이 비친다.
“그래? 잘 됐네. 근데 그걸 왜 엄마 줘? 너 용돈이나 하지.”
아마 얼마 안 되는 돈 마저 월세에 보태려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겠지.
그러자 듣고 있던 누나가 다시 끼어든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받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얘가 벌어봤자 얼마나 번다고.”
“나보다 많이 벌어.”
누나 말에 엄마가 놀라서 되묻는다.
“...뭐?”
“얘가 나보다 돈 많이 번다고. 우리 권서준 작가님, 이번에 1,200만 원짜리 계약을 하셨거든요.”
“...”
엄마는 놀란 듯 눈을 껌뻑인다.
나는 그런 엄마의 손 위에 돈 봉투를 올려줬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돈의 무게.
단순히 숫자로 찍히는 이체와 달리 아날로그적인 매력이 있었다.
“...”
엄마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돈 봉투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효도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그저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에 한 행동.
물론 엄마가 이렇게까지 감동할 줄은 나 역시 예상 못 한 일이었다.
***
다음 날 오전.
아침부터 식탁이 달라졌다.
제육볶음에, 갈비찜, 게다가 갈치구이까지.
생일, 아니 명절에도 쉽게 보지 못할 반찬이 건하게 차려져 있었다.
“뭐야? 왜 죄다 고기야?”
놀란 누나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물었다.
“먹고, 너희 둘 다 힘내라고.”
“이야... 그래. 이제 우리가 미래지! 엄마 우리만 믿으라니까!”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어서 밥이나 먹어.”
엄마는 흰소리하는 누나를 타박하며 자식들 밥을 평소보다 배는 높이 쌓아 담았다.
단순히 밥 한 공기.
그러나 그 안엔 말로 전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평 한번 없이 자란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 한 숟가락.
마음껏 꿈을 펼치도록 지원해주지 못한 미안함 한 숟가락.
그렇게 담고, 담고, 또 담다 보니 대접에도 다 담지 못할 만큼 담고 만 것이겠지.
‘그게 엄마의 마음이니까.’
나는 숟가락을 들어 엄마의 마음을 천천히 음미했다.
간이 잘 배인 제육볶음,
쫄깃쫄깃 부드러운 갈비찜,
고소한 맛에 밥도둑인 갈치구이까지...
이게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를 사는 인간이 금전적인 혜택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말인가?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옛날, 더럽게 맛없는 영국 음식에 비하면 이건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아침이었으니까.
나는 맛을 음미하며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한 그릇 더!”
***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뒤 집을 나섰다.
‘역시 돈이란 행복의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군.’
문득 과거의 기억이 밀려온다.
1600년대 영국.
그 시절에 극작가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극작가라는 말도 없었지. 다들 시인으로 불렸으니까.’
경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런던에만 무려 여덟 개의 극장이 관객을 두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연 배우들은 배역당 약 800행가량을 암송했고, 인기 배우들은 일주일에 4,800행까지 외워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목이 터져나 외치고, 대사를 읊고 노래를 불러도 거지보다 나을 게 없었지’
나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극작가를 겸업했다.
그런데도 내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놀라운 속도로 집필했지만 수입은 많지 않았다. 희곡 한 편당 고작 6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정말 끔찍이도 힘든 시기였었어.’
연기하고, 대사를 외우면서 극을 써야 했고, 하루 10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야만 간신히 먹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경제적 후원을 받지 않으면 극단을 운영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내가 썼던 대부분의 글 앞에 헌사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왕, 귀족, 그리고 재력가까지.
후원해주는 이들의 눈치를 보며 글을 써야 할 때도 많았다.
결국 쓰기 싫은 글을 써야 했던 것도 돈 때문이었다.
‘그래서 죽도록 노력해서 부를 움켜쥐었지.’
런던에서 제일 잘나가는 극장 글로브의 극장주. 인생을 갈아 넣어 얻은 성과였다.
그러나 그토록 노력했건만 내게 남은 건 무너진 가족과 채울 수 없는 허망함뿐이었다.
게다가 늙은 육신은 과로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모든 집필을 멈추고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그 때문이었지.’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씁쓸한 입맛이 돈다.
이번 생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번 생의 가장 큰 목적을 되뇌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단순하면서 명료한 삶의 목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돈은 목적을 위한 조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조건을 위해 다시 한번 내 인생을 갈아 넣는 건 더없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언제나 목적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
마치 주제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작가의 삶과 비슷했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대본을 쓴 작가의 목적은 당연히 대본으로 인한 양질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쓴 대본의 결과물을 떠올렸다.
‘정 피디는 과연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까?’
모처럼 열정을 다한 대본의 결과물.
「군필 고무신이 되었다」 첫 촬영 일까진 정확히 2주 남아 있었다.
***
잉글리쉬 스터디 라운지 앞 카페.
송영도 교수를 포함한 문예창작학과 교수들이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대학 통폐합, 부실경영, 이사장의 비리 등을 떠들던 교수들의 수다는 자연스럽게 학과 이야기로 이어졌다.
“참, 송 교수. 다음 달에 영국 간다며?”
“영국? 아, 학회 가시는 거예요?”
동료 교수들의 질문에 송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부생 한 명 데려가야 하잖아. 누구 데려갈 거야?”
“글쎄. 아직 안정했어.”
“음. 그래도 경험상 좀 도움이 될 법한 애들을 데려가야 하지 않아? 영어도 좀 잘해야 할 테고.”
“그러고 보니 애들은 요즘 좀 어때?”
영미문학산책을 담당하는 박성규 교수가 물었다.
“그냥 그렇죠, 뭐.”
“눈에 띄는 애는 없구나?”
송 교수는 대답 대신 커피를 마셨다.
이번엔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나 교수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송진호가 제일 괜찮지 않나요?”
“맞아. 이번에 신춘문예도 당선됐다면서?”
그나마 교수들의 눈에 드는 학생은 송진호였다.
“뭐, 나쁘진 않아. 작가주의가 지나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깊이가 있으니까. 편협한 성격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외골수처럼 파고드는 기풍(氣風)이 느껴진 다랄까.”
이번에 낸 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연 신춘문예 등단한 작가다웠지.’
다만 지나치게 어렵게 꼬았고, 뻔하게 감추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연출은 좋았지만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더 큰 허탈감으로 돌아오는 법.
‘아직 갈 길이 멀었어.’
섣부른 자만심과 조급함이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성향이었다.
“그나저나 조창진 작가 신작 봤어?”
“맞다. 그거 첫 주 신작인데 천부도 안 팔렸다면서요?”
“내 말이. 이렇게 가다가 순문학 쪽은 완전 망하는 거 아니야?”
“마케팅 비용도 엄청나게 들었다던데...”
“어휴, 말해 뭐해. 인터뷰에, SNS 광고까지 엄청 쏟아부었지.”
“그런 것 치고는 심하네요. 이거 타격이 크겠는데요?”
“제일 문제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는 거야. 요즘 순문학 읽는 애들이 어디 있어? 내 딸부터 이쪽 책이라면 질색을 한다니까.”
박 교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잇는다.
“이럴 때 몇만 부 뚝딱 팔아치우는 천재 작가라도 나타나면 좋으련만...”
“말이 쉽지 그게 되겠어요?”
“왜?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이야?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만들어내는 게 우리 민족이잖아. 생각해 봐. 예전에 그랬잖아. 유럽 어디선가 열심히 준비하는 천재 축구 선수가 나왔으면 했는데, 그 순간 기가 막히게 우리 쏘니가 나왔잖아.”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토트넘 경기 있죠?”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박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어. 벌써 3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라고. 이번 주엔 시원하게 해트트릭 한번 해주려나?”
“마침 와이프도 친정 가는데 치킨이랑 맥주 좀 시켜야겠네요.”
“캬아. 그게 유부남의 행복이지. 부럽네. 우리 와이프는 보내준다고 해도 귀찮다고 안 간다니까.”
두 남자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축구 쪽으로 넘어갔다.
하긴, 답이 없는 문학계 얘기를 해봤자 하는 사람만 지칠 테니까.
그러나 축구 얘기에 관심이 없는 송 교수는 여전히 문학계를 떠올렸다.
‘지금 이 시대는 천재가 필요해. 단순히 몇만 권 팔아 치우는 셀러 말고,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짜 천재말이야.’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말수도 적은 남학생.
권서준이었다.
‘왜 갑자기 그 녀석이 떠오르는 걸까...’
답은 송 교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권서준의 과제에서 느낀 기이한 느낌 때문이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 봤던 느낌이었어.’
시대를 관통하는 대문호와 문창과 망생이.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두 존재의 격차.
그런데도 자꾸만 이상하게 둘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한 번 더 확인하면 알겠지. 그만한 자질을 갖춘 친구인지.’
송영도 교수는 동료 교수를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 무대가 필요했다.
***
나는 나른한 봄볕을 느끼며 교정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서준 선배.”
지난번 송영도 교수의 평가 때문인지 인사하는 후배가 부쩍 늘었다.
‘역시,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족속이군.’
눈을 마주쳐도 인사 한번 안 하던 것들이 새삼 아는 체를 하자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돋아난다.
나는 반갑지 않은 시선들을 사뿐히 즈려밟으며 강의실로 향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송영도 교수가 올린 학과 공지였다.
<제42회 이옥 백일장 관련 안내 공지>
‣ 부문 : 운문(시, 시조)
‣ 주제 : 길, 노래.
※ 당일 추가 시제 있을 수 있음.
조선 시대 천재 문인 이옥(李鈺)을 기리기 위한 시 부문 백일장이었다.
이미 한 달 전에 올라왔던 공지인 데다가 내용도 작년과 딱히 특별한 게 없고, 상금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기에 나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강의실 안은 백일장 공모전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게 무슨 일이라도 난 듯싶었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떠드는 탓에 무슨 일인지 아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박, 이번에 그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송영도 교수님 영국학회 가시는 거 있잖아. 학부생 한 명 가기로 한 거 말이야.”
“어. 그거 진호가 가기로 한 거 아니야?”
“아니야. 지금 수정 공지 올라왔는데 백일장 결과로 뽑으신다는 말이 있어.”
“헐. 갑자기 왜 바뀐 거야?”
“아마 지난번에 권서준 선배 작품 때문 아닐까?”
대화와 동시에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부러움과 질투로 얼룩진 시선들.
예전에도 익숙하게 받았던 시선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이건, 혹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주인공이 보인다.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는 한 남자.
내 예상대로 송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