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9화 (9/203)

# 9. excitement - 신남, 흥분 (2)

9.

***

시청각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셰익스피어 관련 자료를 살폈다.

대략적인 평판은 이미 알고 있지만, 송영도 교수가 내밀었던 평가들도 내 입장에선 고려해야 할 요소였다.

‘나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를 알아야 전생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이 있잖아.’

물론 내심 호의적인 평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몇 편의 자료를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실존하지 않는 사람이라느니,

고리대금업과 사채를 즐긴 사람이라느니,

하다못해 누군지도 모르는 사진 아래에 버젓이 내 이름이 쓰여 있기도 했다.

‘젠장. 나는 대머리였던 적이 없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오해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 대한 자료가 희귀한 탓이었다.

가장 황당했던 주장은 초등학교만 나온 인물이 그토록 훌륭한 글을 쓸 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건 그 당시 그래머 스쿨의 수준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오해지.’

내가 7살 때부터 다닌 문법학교는 라틴어가 기본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언어로 각국의 고전을 배우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교사들 역시 런던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문학인들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그 시절 연극이란 모든 학생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와 같았지.’

무대에 서고, 극을 쓰고, 그렇게 연기와 글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 모든 수준 높은 교육이 이뤄지던 곳이 바로 문법학교였다.

‘그 이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덕분에 나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세상에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과 수고를 모른 채 함부로 떠드는 작자들의 모습이 아니꼬웠다.

나는 입술을 곱씹으며 다른 자료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음모론보다 내 업적을 찬양하는 글이 훨씬 더 많았다.

당대뿐 아니라 만세(萬世)를 통해 통용되는 작가.

-벤 존슨-

그는 수도관 속을 흐르는 물 같은 존재다. 수도관은 닳아 버릴지 모르지만, 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버킹엄 대학 스탠리 웰스 명예교수-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시인이 아니라 세계의 시인이다.

-월터 새비지 랜도어-

셰익스피어의 언어 시적 질감은 세계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며, 그의 희곡의 구조보다 훨씬 뛰어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셰익스피어, 신의 눈에 가장 가까운 화신.

―로렌스 올리비에-

하느님 이외에는 신이 없으며, 그의 이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 해럴드 블룸-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조금이나마 전생에 대한 울분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허탈함이 엄습했다.

‘근데 죽고 나서 인정받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나는 세상에 길이 이름을 남겼다고 기뻐할 만큼 고상한 성품이 아니었다.

정작 내가 누리지 못한 영광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가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의 영광이 중요했다.

‘이번에는 다르리라.’

전생에 누리지 못한 모든 것을 현생에서 누릴 생각이었다. 돈, 권력, 자유로운 창작활동까지 모두 거머쥐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제일 익숙한 것으로 첫걸음을 떼는 게 좋아.’

내 선택은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대본이었다.

물론 대본만 해도 드라마와 영화, 희극까지 장르가 다양했다. 그중에 내 선택은 웹드라마였다.

‘누나와 연결점도 있고, 처음일수록 확실한 결과물이 중요하니까.’

나도 모르게 사업가 기질이 올라온다. 그 옛날 런던을 주름잡았던 글로브(The Globe) 극장의 소유주로서의 감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군.’

불타는 금요일.

일주일에 하루뿐인 공강.

동시에 누나의 담당 피디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

웹드라마 전문 프로덕션 소담.

제작 담당인 정은미 피디는 이른 아침부터 대표에게 깨지고 말았다.

“아니, 대체 촬영은 언제 들어갈 거냐고? 너 무슨 예술 하냐?”

신명 나게 두들겨 패는 대표의 목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래봤자 서른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이지만.

“죄송합니다. 근데 이번엔 정말 잘 나왔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야, 이거 말고도 다음 주까지 하나 더 들어가야 하는 거 잊었어? 그건 대체 언제 할 건데?”

산 넘어 산이었다.

권지연 작가 작품을 끝내자마자 다음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일이 많다는 건 좋지만, 이건 좀 너무 힘드네.’

주변에 아는 인맥을 총동원했지만 괜찮은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잘 쓰는 사람은 이미 다 드라마 쪽으로 넘어갔으니까.’

하긴, 대본 잘 쓰는 사람이 웹드라마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회당 금액도 비교가 안 되고 성공했을 때의 대우도 비교가 안 되니까.

‘솔직히 나도 기회만 된다면 미니 시리즈 쪽으로 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니를 찍으려면 그에 따른 성과가 있어야 했다. 공중파 피디들이야 입사와 동시에 어느 정도 기회가 보장되지만 정 피디 같은 사파 출신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뭐 죄다 자기 후배, 자기 아는 사람으로 채우기 바쁘니까.’

어쩔 수 없는 현실.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면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웃긴 게 그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경력 있는 신입을 구하는 취업 시장의 아이러니. 이 바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아.”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나마 권 작가가 꼼꼼하긴 한데...’

그러나 문제는 글 쓰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정극도 아니고 웹드라마를 쓰는 데 두 달 이상이 걸린다는 건 크나큰 단점이었다.

‘그래서 동생을 부르긴 했지.’

이전 권 작가의 작품과 달리 살아있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 덕분에 크게 스토리가 바뀌지 않았음에도 전반적으로 전개가 빠른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사건에 대한 임팩트도 강했다.

‘근데, 대본은 전혀 써 본 적 없다고 했는데...’

기대가 되면서도 기대를 할 수 없는 구조. 또다시 아이러니한 상황에 입맛이 씁쓸해진다.

‘이놈의 아이러니는 벗어날 수가 없구나.’

뭐, 결국 만나보면 알게 될 일.

‘그나저나... 오늘도 칼퇴는 글렀네.’

핏줄 터진 정 피디의 눈이 모니터를 힘겹게 훑어 내린다.

***

정 피디와의 약속 전날 밤.

나는 웹드라마의 장르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작품 목록을 확인했다.

일단은 유브튜를 통해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을 순서대로 봤다.

- 캠퍼스 여우의 특징.

- 전 남친이 생각날 때.

- 엔플릭스 보고 갈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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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콘셉트를 쉽게 연상할 수 있게 짓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일반 드라마와 달리 호흡이 무척 빨랐다.

‘상황설명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네.’

인물 및 배경에 대한 설명도 필요 없었다.

배우들의 짧은 대사들로 대략적인 상황을 던진 후 바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은 빠르게 스킵하는거군.’

깊이는 얕을 수 있지만 덕분에 빠르게 스토리로 안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가벼우면서도, 치열한 캐릭터들의 관계성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상을 봤다.

덕분에 웹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결국 웹드라마의 매력은 공감대 형성이야.’

인기 작품들 위주로 시장조사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핵심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대본과 달리 호흡이 아주 빠른 편이야. 타겟층도 10대, 20대로 굉장히 타이트한 편이고.’

당연히 그 연령층에 어필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게 유리했다.

‘특히 학교를 배경으로, 연애 얘기를 넣으면 어느 정도는 먹고 들어가는 편이군.’

하나, 둘, 셋...

웹드라마에 대한 소스들이 차곡차곡 정리된다. 하나같이 최적화된 정보들이었다.

“대충 감이 오네.”

정리를 마친 나는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사전 조사를 마쳤다.

생소한 요소들이 있긴 했지만 특별히 어려운 건 없었다.

‘누나 원고를 전체적으로 수정해 본 덕에 전체 템포도 훤히 그려지고.’

10부작 내의 구성이라면 지금이라도 수십 개의 맞춤 플롯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내 머릿속엔 아직도 다 풀어내지 못한 숱한 작품과 플롯으로 가득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점심 무렵 누나와 함께 제작사로 향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방 쪽을 슬쩍 살핀다.

“엄마는?”

“나가셨지. 시간이 몇 시인데.”

“흠.”

누나는 엄마와의 일이 신경 쓰이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겉으로는 센 척해도 한없이 여린 게 누나였다.

“나 금방 씻고 나올게.”

앞머리만 대충 감고 나온 누나가 화장을 하는 사이 나는 외투를 걸쳐 밖으로 나왔다.

“오늘 시간 괜찮은 거 맞지?”

“그렇다니까. 황금 같은 공강이라고 말했잖아.”

그래.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공강이었다. 그런 귀한 날 그저 누나 일을 도와주기 위해 따라나설 생각은 없었다.

‘모든 건 더 큰 걸 얻기 위한 빌드업이지.’

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누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안녕하세요. 권서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은미 피디예요.”

우리는 간단히 통성명하고 곧바로 작품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캐릭터가 사니까 속도가 확 붙는 느낌이에요. 이야기도 시원시원하고요.”

“사실 제가 놓치고 있던 부분인데, 동생이 정확히 짚어줬더라고요.”

누나의 말에 정 피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전체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였어요. 평면적인 캐릭터가 즐비하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도 임팩트가 없었던 거고요.”

“맞아. 사실 그런 소리 많이 들었거든. 캐릭터가 죽어있다는 소리...”

누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지금 구성은 나쁘지 않습니다. 설정 자체가 독특해서 관심 끌기도 좋을 거 같고요.”

내 말에 누나가 순간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평소 말도 거의 없던 애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끄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이제부턴 참을 생각도, 숨길 생각도 없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개척해 나가야 하니까.’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본에 대한 피드백에 들어갔다.

***

두 시간 뒤.

누나의 작품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 피디가 환하게 웃는다.

“대박이네요. 덕분에 이후 전개도 머릿속에 그려지고요.”

누나 역시 표정이 밝아졌다.

“맞아요. 이대로라면 막힘없이 쓸 수 있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안 그래도 위에서 재촉하는 중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남은 원고는 이번 주 내로 보내드릴게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감사하죠.”

두 사람 모두 회의 전과 후의 표정 변화가 극명하게 갈렸다. 그만큼 회의에 대한 결과가 좋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서로의 용건이 끝난 상황.

그런데도 정 피디가 자꾸만 나를 힐끗거린다.

‘아마 할 말이 남은 거겠지.’

나는 일부러 정 피디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기, 잠깐만요.”

정 피디가 나를 붙잡는다.

“혹시, 동생분... 써두신 작품이 있나요?”

역시나 내가 던져놓은 밑밥을 정 피디가 딱 문다.

“물론 있죠. 그런데 왜 그러시죠?”

정 피디의 눈이 순간 반짝인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 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정 피디가 뒷얘기를 알아서 설명한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가 이번 달까지 끝내야 할 작품이 하나 더 필요하거든요. 동생분의 대본이 저희랑 잘 맞으면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은데, 어떠세요?”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마치 미리 짜놓은 시놉시스대로 대본이 나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오늘 밤까지 보내드리죠.”

“하, 역시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 피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리는 두 사람의 손.

그러나 표정과 달리 정 피디의 손에는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았다.

‘내 대본에 대한 기대감이 딱 이 정도인 거겠지.’

그저 혹시나 하는 미약한 기대감.

그러나 그 ‘혹시나’를 ‘역시나’로 바꿔야 하는 게 바로 내 역할이었다.

물론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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