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Good riddance - 속이 시원하다 (2)
5.
***
‘역시, 누나가 내 얘기를 한 거야.’
애초에 누나는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피디에게도 이번 일을 곧이곧대로 다 말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피디가 굳이 나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지.’
그러나 내 입장에선 제 발로 찾아온 기회이기도 했다.
‘단순히 대본 수정에 도움을 줬다고 해서 일면식도 없는 나를 부를 리는 없으니까. 아마 다른 작품을 맡길 실력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겠지.’
누나를 도우면서 어느 정도 각을 본 것도 사실이었고.
내 입장에서도 도움이 될 인맥을 쌓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다.
웹드라마.
과거의 권서준은 도전해 본 적 없는 장르.
그러나 전생을 깨달은 지금의 나는 자신 있었다.
‘누나 덕분에 충분히 데이터도 쌓았고, 해볼 만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피디님이랑 연락해서 날짜 알려줄게.”
누나는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린다.
“근데 엄마, 이 냄새는 뭐야? 또 하수구 넘친 거야?”
“...어.”
“아, 진짜. 주인아줌마는 뭐래?”
“금방 공사해준대. 며칠만 참아 봐.”
“참나, 그 아줌마가 퍽도 그렇게 말했겠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누나의 말투는 단정적이었다.
“좀만 기다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 월셋집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
누나는 미간을 잔뜩 모은 채 거칠게 닭다리를 뜯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들고 있던 가슴살을 내려놓았다.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이사를 가든지, 공사를 하든지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는 너희 앞길이나 생각해.”
“엄마가 어떻게 할 건데? 당장 전셋집만 해도 몇 천은 있어야 할 텐데, 우리 다 대출도 안 되잖아?”
식당 보조인 엄마.
프리랜서 작가인 누나.
게다가 아직 대학생인 나까지.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마땅하진 않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말과 달리 엄마의 표정이 굳는다.
다소 지친 기색이 주름진 눈가에서 느껴진다.
엄마는 한숨 섞인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왜 또 먹다 말고 일어나는데?”
“배불러서 그래. 그리고 일찍 자야 내일 안 피곤하지. 먹고 그냥 둬. 엄마가 일어나서 치울 테니까.”
“아, 진짜. 엄마!”
누나가 불렀지만 엄마는 방문을 닫았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누나도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놨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언제쯤 돈 걱정 안 해보고 살려나.”
몇 입 먹지 않은 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결국 고스란히 남은 치킨 한 마리.
그건 모두 내 차지였다.
개꿀이군.
***
[이번 주 금요일 2시야.]
피디와의 약속은 수업이 없는 날로 최종 결정됐다.
‘좋군.’
엄마와 누나의 다툼은 안타까웠지만, 그건 내가 돈만 벌어오면 해결될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에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건강, 시간, 천재지변처럼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랑은 다르니까.’
반백 년을 살았던 인생 때문일까.
삶을 관조하는 자세도 많이 달라졌다.
나는 여유롭게 봄볕을 즐기며 천천히 캠퍼스를 거닐었다.
계절의 경계를 훌쩍 넘어 성큼 다가온 봄 날씨.
옷차림만큼이나 마음도 가벼웠다.
길옆으로는 여러 학과에서 내 건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문예창작과 송영도 교수]
[한미진 교수님. 디자인 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해산 문학상 최우수상 09 정조현 학우.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하나 걸러 문창과 교수와 선후배들의 수상 소식이 눈에 들어온다.
쭉 둘러보는데 뜻밖의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칫거렸다.
[송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송진호 학우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송진호라...’
청소년 문학상 수상자로 특기 입학한 천재이자, 순수문학의 계보를 이을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는 인재였다.
게다가 집도 부자여서 동기들의 부러움을 독차지 하는 녀석이었다.
나와는 같은 과 동기이며, 동시에 같은 문예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정기 합평 날 아니었나?’
벌써 4주째 진행되지 않은 합평 일정.
나는 생각난 김에 문예집도 볼 겸 D동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좁은 복도를 지나자 낡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문비.
문학과 비평의 준말.
30년 전통을 가진 동아리로 시, 소설, 수필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합평을 진행하는 동아리였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뜻밖에도 안에 사람이 있었다.
“어?”
나를 본 후배와 동기 녀석이 흠칫 놀란 듯 쳐다본다.
한 명이 아니었다.
무려 여섯 명이 테이블을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얘네가 이 시간에 왜 모인 걸까?’
딱 보기엔 합평을 하려고 모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꽤 오래전부터 단톡에 연락이 없었어.’
나도 엄연히 동아리원이었다.
합평이 있다면 당연히 알아야 했다.
순간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따돌린 거군.’
나를 따돌린 이유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노력만 열심히 하는 애.
발표만 하면 벌벌 떠는 애.
합평 때 도움도 안 되는 애.
‘이게 현재 나에 대한 평가였으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 내 성격은 그리 무난한 편이 못 됐다.
“오늘 합평하는 날이었나? 난 연락 받은 게 없었는데.”
몇몇 동기 녀석이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본다.
“...”
순간 동아리방 안에 침묵이 흐르고.
잠시 뒤 몇몇 후배 녀석들의 얼굴에서 어색한 웃음이 떠오른다.
“서준 선배, 휴학하는 거 아니었어요?”
어제, 강의실에서 내 욕을 하던 후배 녀석 중 하나였다.
“맞아요. 우린 선배 휴학한다고 들어서 연락 안 했죠.”
내가?
맹세코 이들에게 내가 먼저 휴학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휴학 안 할 거였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으면 연락했을 텐데.”
지레 넘겨짚어 판단하고는 그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린다.
‘이런 게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인가?’
원래의 나라면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휴학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한다고 미리 말을 해주지?”
“아, 그거야...”
후배 녀석이 말을 끌며 나머지 녀석과 시선을 교환한다.
그리고 이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향한다.
이 사태의 주동자인 한 인물에게로.
“오해가 있었나 보네.”
한 녀석이 웃으며 일어난다.
가지런한 머리, 고고한 척 고개를 치켜 드는 녀석.
“차라리 잘 됐다. 이왕 온 김에 같이 합평하는 거 어때?”
송진호였다.
녀석이 태양이라면 나는 반딧불 정도나 될까.
우리 둘의 학과에서의 입지는 그만큼 차이가 났다.
“그래. 같이 하자. 그럼 되네.”
송진호의 말에 나머지 녀석들이 마지못해 동참한다.
“야, 권서준.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서 이것도 7부만 복사해줘라.”
싫은 티를 팍팍 내며 건네는 원고들.
합평은 끼워주지 않으면서 일을 시킨다.
청유형이었지만 명령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끼워주지 않겠다는 뜻이지.’
그래서 나는 늘 이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굽실거리며 나를 그 틀 안에 욱여넣었다.
비굴하면서도 익숙한 굴복.
나는 녀석들의 귀여운 갑질을 보며 그대로 따라줬다.
잠시 뒤, 복사를 마치고 다시 동아리방에 돌아오자 녀석들은 나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이미 합평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호야, 이번 과제 작품 죽이더라.”
“그러니까. 등단 작가는 역시 다르다니까.”
합평이라기보다는 아부에 가까운 발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뭐 이들 중엔 송진호보다 잘 쓰는 애들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때, 군림하듯 녀석들의 아부를 듣던 송진호가 나를 바라본다.
“자, 서준이 왔으니까 서준이 작품부터 합평해 볼까?”
“좋아.”
“오랜만이니까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녀석들의 손에 들린 건 무려 한 달 전에 내가 제출했던 ‘시’였다.
나는 이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나 구경할 겸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일단 심상의 전환이 어색해. 통일감이 없어서 전체적으로도 어수선하고. 단어의 세밀한 의미를 모른 채 뭉개듯이 쓴 표현도 너무 많아. 주제 자체도 너무 별로고.”
송진호는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했다.
동기들은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생각해보면 겉멋만 가득해. 너무 과한 수식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그려지지 않아.”
“난 이게 궁금해. 대체 현란한 침묵이 아득하게 맴도는 검은 방? 대체 현란한 침묵이 뜻하는 바가 뭐지? 네 머릿속에 없는 걸 상대방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갖다 붙인다고 다 글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나도 동감. 알맹이가 없어. 그래서 할 말도 딱히 없네.”
매서운 질책이 연이어 쏟아진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들의 지적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나름 일리가 있어. 분석도 날카롭고.’
부정할 수 없었다.
하루 전만 해도 저게 솔직한 내 실력이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이게 합평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한 녀석들이 미간을 찌푸린다.
“권서준, 너 왜 말이 없냐?”
“설마, 이렇게 얘기해줘도 할 말이 없는 거야?”
“매번 그렇게 입꾹닫할 거면 합평은 대체 왜 하는 거냐?”
녀석들은 상처 입은 사슴을 둘러싼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미안해 더 열심히 써볼게’라고 했겠지만 이제는 좀 달라졌다.
“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헐. 그게 끝이야? 이러면 합평의 의미가 없지.”
합평에 진심인 척하는 녀석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왜 웃어?”
나는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준 채 녀석들을 바라봤다.
“니들 말이 다 맞아서. 그래서, 대안은 뭐야?”
내 질문에 순간 녀석들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
“솔직히 이게 잘못됐다, 이게 이상하다... 뭐 까는 거야 쉽잖아. 당선된 글도, 베스트셀러 작품도, 하다못해 셰익스피어의 글도 깔 이유는 많으니까. 그 덕에 그 많은 비평가들이 아직도 잘 먹고 잘사는 거고.”
내 말에 한 녀석이 발끈한다.
“지, 지금 이딴 글을 쓰고, 우리 합평이 문제라는 거야?”
당황한 녀석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동안 이 녀석의 글에서 왜 주제를 찾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보다 양질의 합평을 하자는 거야. ‘너 되게 못 썼어’가 아니라, ‘너 이렇게 해야 잘 쓸 거 같아’가 되어야지. 대안이 없는 건 비평이 아니라 비난일 뿐이니까.”
“...”
“내 말이 틀렸나? 우리가 합평하는 이유는 문제점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 대안까지 찾는 거잖아. 니들이 말한 거 내가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제야 한 녀석이 쭈뼛거리며 입을 연다.
“그거야... 조금 더 은유적인 느낌을 살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과도한 수식으로 추상적인 의미만 가미하는 거 아니야? 네가 했던 말이랑 상충하는데?”
“...”
내 질문에 곧 대화가 끊기고 동아리방 안엔 정적이 흐른다.
찰나의 침묵은 많은 정보들 내포하고 있었다.
‘내 작품에 대한 대안까지는 고민해 본 적이 없단 뜻이지.’
달리 말해 이 녀석들은 내 작품을 깎아내리는 게 목표였다는 뜻이었다.
“야, 네가 못 쓴 걸 가지고 왜 우리한테 시비야?”
그때,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한 녀석이 오히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나는 이미 못 썼다는 걸 인정했다. 오히려 질 높은 합평을 위해 대안을 물었는데 지레 발끈하는 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진 마당에 이 합평을 더 할 이유는 없었다.
“시비라... 합평의 순기능을 말한 게 시비라면 더 할 얘기가 없네. 난 여기서 그만할게. 대안도 없는 합평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대답과 동시에 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았다.
“아, 심부름꾼도 이제 안 함. 그럼 수고.”
툭.
녀석들의 입이 쩍하고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