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4화 (4/203)

# 4. Good riddance - 속이 시원하다 (1)

4.

***

“으악!”

권지연은 이른 아침부터 피디의 연락에 기겁하면서 눈을 떴다.

“미치겠네. 그걸 못 일어나면 어떡하냐...”

머리를 식힐 겸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일어나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술은 괜히 마셔서.’

집필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서 몇 캔 마셨는데 이렇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잘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러나 이미 늦은 상황에서 대안은 없었다.

재촉하는 피디의 연락에 하는 수 없이 미완성 원고를 보냈다.

‘일단 수정한 데까지 보내놓고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자.’

권지연은 머리도 감지 못한 채 곧바로 프로덕션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 계약금 돌려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대본을 넘기기로 약속한 기일이 이미 두 달이 넘었다.

생각보다 더딘 작업 속도에 계약 파기를 요구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아. 별수 있어? 빌고 또 빌어야지.’

권지연은 잔뜩 움츠린 채로 프로덕션 사무실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그녀를 알아본 정은미 피디가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권 작가님!”

평소보다 거의 한 옥타브 이상 올라간 목소리였다.

왜 저렇게 반기는 걸까,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그것 봐요. 우리 권 작가님은 하실 수 있다니까요?”

뭐지, 불안하게 왜 이러는 거지?

“권 작가님, 진짜 천재 아니에요?”

“...네?”

“너무 재미있어요. 언제 이렇게 수정하신 거예요?”

들을수록 이해하기 힘든 피디의 반응이었다.

“저... 혹시 제가 보낸 원고를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그럼요. 이번에 보내주신 건 거의 수정할 것도 없어요. 대표님께선 이대로 바로 촬영 들어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쪽에선 당장 촬영 일정을 잡을 생각...”

“저, 잠시만요. 잠시만요.”

권지연이 마구 질주하는 피디를 다급히 말렸다.

혹시 모르니 반드시 확인이 필요했다.

“제가... 잠시 메일 좀 확인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 내 정신 좀 봐. 전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정 피디가 회의실을 나가자 권지연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오전에 보낸 메일함을 급히 열었다.

제목도, 보낸 이도 분명 자신이었다.

그런데 내용이 전혀 달랐다.

‘뭐야? 이거 내가 수정한 거 맞아?’

이전과 많이 달라진 전개와 에피소드.

특히 입체적인 캐릭터의 행동에 저절로 몰입감이 생겼다.

‘캐릭터가 사니까 앞뒤 연출도 돋보여. 로맨스도 확 살고...’

읽어갈수록 피디의 반응이 이해된다.

‘너무 재밌는데?’

자신이 쓴 원고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설마 술기운에 기면증처럼 일어나서 수정을 했나 싶은데...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기억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정 피디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진짜 제가 쓴 거 맞아요?”

정 피디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누가 썼겠어요.”

“근데 이건... 너무 잘 썼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쪽에선 벌써 촬영 일정 잡을 생각이라고요.”

“혹시 어젯밤 제 머릿속에 셰익스피어가 왔다 간 걸까요?”

“...네?”

정 피디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는다.

말을 내뱉은 권지연 역시 고개를 저었다.

‘하긴, 말이 안 되지. 그럴 리가 없잖아.’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대본에 손을 댄 게 분명했다.

‘분명 집엔 엄마랑 나, 그리고 서준이 밖에 없었는데...’

엄마가 이런 글을 썼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설마... 서준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추론에 권지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피디님. 이거... 제 동생이 수정한 거 같은데요?”

“정말요? 혹시 원래 대본을 쓰셨던 분인가요?”

“아니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데...”

“...네?”

정 피디가 큰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그러나 피디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바로 권지연 자신이었다.

‘얘... 대체 뭐지?’

***

늦은 오후.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여느 때처럼 버스에 몸을 실었다.

4월 첫째 주의 바람은 아직 좀 쌀쌀했지만, 다행히 포근한 햇볕이 살갗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날씨였다.

때늦은 히터 바람에 한창 노곤해질 시간대. 나는 조용히 버스에 탄 사람들을 관찰했다.

팔짱을 낀 채 졸고 있는 저 남자는 간밤에 무슨 일로 밤을 설친 걸까.

거울을 보며 연신 앞머리를 신경 쓰는 여자에겐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걸까.

상상을 이어가자 재미난 일들이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우습고, 때론 슬프고, 그러면서 또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

또다시 손가락이 간질거린다.

‘쓰고 싶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캠퍼스에 벌어지는 풋풋하면서 애절한 첫사랑 이야기.

내 손 아래서 선명하게 바뀌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역시 대본 쓸 때가 제일 편해.’

나는 버스에서 내려 화창한 날씨를 만끽했다.

봄볕이 내리쬐는 도시의 풍경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듯 활기가 돌고 있었다.

봄의 정취를 느끼며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집 앞 골목길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 앞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정면에서 날아온 날 선 목소리가 상쾌했던 봄의 기운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또 무슨 일로 이러는 거예요?”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그게... 저희 하수구 좀 봐주세요. 매번 역류 돼서 냄새가 너무 심해요.”

“저번에도 돈 들여서 고쳤는데 안 고쳐지는 걸 난들 어쩌라는 거예요?”

집주인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계속 역류가 되니까 숨을 쉬기도 힘들어요. 조치를 좀 취해주시면...”

당연한 권리였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주눅 들어있었다.

반면에 팔짱을 끼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투에는 거침이 없었다.

“말했잖아요. 이것저것 다 해도 나아지지 않는 걸 나 보러 어쩌라고요? 그리고, 솔직히 내가 지금 2년째 월세 안 올렸잖아요. 근데 이렇게 불만만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

불시에 치고 들어오는 돈 얘기.

건물주의 한마디에 엄마는 말문이 막힌다.

돈...

없는 자에겐 그만큼 무서운 권력도 없었다.

“일단 기다려 봐요. 나도 좀 알아볼 테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왜 이렇게 유난인지. 그깟 냄새 얼마나 난다고. 참나.”

건물주 아주머니의 일부로 흘린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온다.

그 비수에 맞은 엄마는 패잔병처럼 힘없이 걸어오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든다.

“뭐해, 거기서?”

“그냥.”

“...언제 왔어?”

아들 녀석이 조금 전 대화를 들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엄마는 어디 갔다 와?”

“어? 아, 일 끝나고 오다가... 참, 밥은?”

“아직.”

“들어가자. 김치찌개 해줄게.”

나는 엄마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몇 걸음을 내려가기도 전에 퀴퀴한 냄새가 나를 반긴다.

흔히 말하는 반지하 냄새.

겨울엔 잠잠했던 하수구 냄새가 봄과 함께 찾아왔다.

“하수구가 막혔나 봐. 주인아줌마가 해결해 준다고 했으니까 며칠만 참자.”

엄마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조차 미안해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내 말에 쓰게 웃던 엄마가 집으로 들어간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왔음에도 쉴 틈도 없이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한다.

다시 얻은 삶의 기회.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그 가운데 한 가지 잊고 있던 문제가 떠올랐다.

돈.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결국 재능도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발휘하기 힘드니까.’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안정적인 작업과 삶을 위해서도,

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다행히 이 시대엔 글로 해결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나는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택했다.

바로 대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연락이 올 때쯤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이 울린다.

예상대로 누나였다.

“어, 누나.”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 대본, 니가 수정한 거지?

누나는 당연한 걸 물었다.

그만큼 믿기 힘들다는 방증이겠지.

“괜찮았지?”

대답을 건너뛴 질문이지만 의도를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괜찮고말고. 바로 다음 주에 촬영 들어가자고 난리다.

누나의 목소리는 모처럼 들떠있었다.

덩달아 내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간다.

‘내 예상대로군.’

나의 미래를 위한 징검다리.

그 첫 번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잘됐네. 그럼 내 용돈도 좀 올라가는 건가?”

-그걸 말이라고. 아무튼 나머지는 이따 집에 가서 얘기하자.

전화를 끊으려는데 누나가 다급히 나를 부른다.

-야, 야, 야, 권서준.

“왜?”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딱히 없는데.”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신중히 생각해.

음. 정 그렇다면 생각나는 메뉴가 하나 있긴 했다.

***

“야, 권서준! 치킨 먹자.”

밤늦게 돌아온 누나가 문밖에서 소리쳤다.

거실로 나가자마자 누나가 손짓으로 재촉한다.

“빨리 앉아. 오늘은 특별히 두 마리 사 왔으니까.”

양념 한 마리, 후라이드 한 마리.

세 식구가 먹기엔 많았지만 그게 오늘 누나의 넉넉한 마음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따로 대본 공부한 적 있어?”

“교양 수업으로 들은 적은 있지만, 따로 쓴 적은 없어.”

“정말? 그게 다라고? 습작해 본 적도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믿기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가 가슴살을 집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일은 잘 해결됐어? 아침에는 죽상을 하더니.”

“엄마, 글쎄 이 자식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줬다니까? 이 자식이 쓸모가 있더라고.”

“뭐? 서준이가 네 일을 도와줬다고?”

“그렇다니까.”

누나는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아니, 연애도 한 번밖에 안 해 본 놈이 어떻게 그런 대사를 썼지?”

“경험해야만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따지면 SF는 어떻게 쓰겠어.”

“하긴, 그것도 말 되네. 근데, 너 뭐야? 요즘 어디서 화술 학원 다녀? 말발이 왜 이렇게 늘었어?”

이건 뭐 대답할 필요 없고.

그 시간에 치킨 다리 하나가 더 만족스러웠다.

그때,

누나가 닭다리를 내려놓았다.

“근데, 서준아. 이 작품은 니가 쓰는 게 맞는 거 같다.”

잘 먹다가 뭔 소린가 싶어서 쳐다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니가 수정한 거잖아. 내 작품이라고 하기는 그렇지.”

창작자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가책이었다. 물론 필요 이상의 가책이었다.

“그냥 아이디어였어. 크게 바꾼 것도 없고.”

“아니야. 다시 봐도 난 절대 이렇게 쓰지 못했을 거야.”

누나는 솔직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누나는 대본 쓰면 바로 제작사에서 촬영 들어가?”

“미쳤냐? 수십 번 까이고 수정해도 간신히 촬영 들어갈까 말까인데. 가끔은 피디가 직접 대사까지 바꾼다니까?”

“그것 봐. 대본은 누나 혼자 쓰는 게 아니잖아.”

“...어?”

누나가 닭다리를 든 채 나를 바라본다.

“누나 원고를 가지고 피디와 고민하면서 같이 쓰잖아. 나 역시 그랬을 뿐이야. 모든 스토리는 누나가 만든 거고, 누나가 쌓은 이야기잖아. 게다가 앞으로 4편이나 더 써야 하는데, 당연히 누나 대본이 맞지.”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열심히 쓸 생각만 해.”

누나는 감동한 듯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덕분에 제대로 감 잡았으니까 나도 열심히 써볼게.”

눈빛을 보니 확실히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첫 단추가 잘 끼어진 이상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내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군.’

글로 돈을 벌 기회.

이왕이면 대본이면 조금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누나의 휴대폰이 울린다.

“네, 피디님. 잘 들어왔죠. 네. 안 그래도 파티하고 있어요.”

평소와 달리 평화로운 느낌의 통화가 이어진다.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네, 네. 네에?”

누나의 마지막 억양이 급격히 올라간다.

이내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네, 아니요. 한 번 물어볼게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누나가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너 이번 주에 시간 어때?”

“왜?”

“우리 피디가 같이 좀 보자는데?”

미래를 위한 징검다리.

그 첫 번째 돌이 제 발로 굴러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