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brave new world - 멋진 신세계 (2)
2.
***
전생과의 교감(交感).
400년 전 대문호의 삶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내가 셰익스피어였다니...’
나는 천천히 내 서명을 다시 확인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시 봐도 분명해.’
갑자기 읽을 수 있게 된 필기체.
동시에 미처 발표하지 못했던 수천 편의 작품이 떠오른다.
“서명하셨으면 얼른 주세요.”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상념을 깨운다. 고개를 돌리자 퇴근을 앞둔 교직원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손짓한다.
‘뭘 달라는 거지?’
밀려오는 파도처럼 한발 늦게 현실이 다가온다.
‘아, 맞다. 휴학 신청하러 왔었지.’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가 휴학을 하려 했던 이유로 이어졌다.
이 땅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었다.
눈치 볼 여왕도 없었고, 작가를 사탄의 자식이라 외치는 청교도도 없었다.
‘그래. 완벽히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게다가 이곳은 내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 했던 대학이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더 넓은 문학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이었다.
‘그런데 휴학?’
나는 손에 들고 있는 휴학 신청서를 거둬들였다.
“죄송한데, 마음이 바뀌었네요.”
“네?”
“휴학 신청 안 합니다. 그럼.”
“아니, 저기...”
나는 황당해하는 교직원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후.”
숨을 고른다.
이른 봄의 찬바람이 뺨을 스친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내 팔과 내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캠퍼스 안을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가방이 등을 치고, 숨이 턱에 차고,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힘이 넘쳐나는 나의 육체는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더 뛸 수 있어. 더 빠르게 뛸 수 있다고.’
나는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죽음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아니었다.
숨 한 번 내쉬는 게 힘들어 가슴을 쥐어뜯던 그 늙은이가 아니었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어딘가 조금 이상한 웃음.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젊음이, 이 생기가, 이 시간이 너무나 감동적이군.’
나는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세차게 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짧은 현기증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평범한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비참하고, 힘들고, 거지 같은 하루였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지.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학 신청서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문예창작학과 학생.
건강한 몸과 어린 나이.
게다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환경까지.
‘내가 그토록 바랐던 세상이야.’
샘처럼 솟구치는 희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움츠러들었던 어깨도 어느새 당당히 펴져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400년 전의 대문호는 이 순간 뭐라고 외쳤을까.’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안에서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으니까.
‘언빌리버블(Unbelievable).’
***
나는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아직도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이 뒤섞여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이젠 어느 정도 정리가 됐군.’
마치 책장에 진열된 책처럼 무수한 기억들이 가지런히 정리된다.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이 점차 내 머릿속을 채워간다.
아치에스(ácĭes)
배운 적도 없는 라틴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이게 쉽게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 정도가 될 텐데...’
나는 보다 이 시대에 적합한 단어를 찾았다.
생각이 내면의 깊은 곳에 다다르자 한 단어가 떠오른다. 동시에 내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그래. 인사이트(insight).”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영국식 발음이었다.
인사이트.
일종의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서늘한 공기, 빛의 자취,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작은 소리들까지.
그 전엔 보이지 않던 세상이 오감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 시절의 느낌이군.’
막 런던으로 올라와 글에 매진할 때 느꼈던 감각.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능력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통찰력만큼 유용한 능력도 없으니까.’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덩달아 미처 꺼내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요동친다.
‘빨리 쓰고 싶어.’
글을 향한 뜨거운 열망에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어? 권서준?”
그때, 나를 본 동기 녀석 하나가 헐레벌떡 내게 다가온다.
장현웅.
내 몸의 두 배쯤 되는 체구의 소유자.
타과 전과생으로 복학 후에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왜 여기 있어? 너 휴학 신청한다고 하지 않았어?”
조금 전까진 그랬지.
그러나 그사이 내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휴학할 이유가 사라졌거든.”
달라진 말투 때문일까. 잠시 의아한 듯 쳐다보던 장현웅이 이내 활짝 웃는다.
“아무튼 잘 됐다. 안 그래도 혼자 밥 먹을 생각에 얼마나 슬펐다고.”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까.
장현웅도 그리 넓은 인맥을 가진 친구는 아니었다.
“수업 가는 거야?”
“아니, 산책 중. 넌?”
“나야 근로 때문에 학과 사무실 가지. 근데 너 뭔 일 있었어? 아까부터 말투랑 표정이 왜 그래?”
은연중에 전생의 성격과 말투가 드러나는 듯 했다. 그러나 굳이 감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조금 달라져볼까 해서.”
“설마, 그것도 탈락 후유증이냐?”
그러고 보니 공모전 탈락했었지. 다시 떠올려보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글이었다.
“그나저나 휴학 안 할 거면 송영도 선생님 과제는 낸 거야?”
장현웅의 한 마디에 순간 잊고 있던 문제가 떠올랐다.
“아, 그게 있었군.”
원래는 휴학할 예정이라 신경 쓸 필요 없었던 과제 하나.
[산문 : 봄을 주제로 창작하시오.]
[원고지 : 50매 내외]
단편 소설을 하나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내일 있을 합평을 위해 늦어도 오늘까진 카페에 올려야 했다.
원고지 50매.
A4로 따지면 대략 6장 정도의 분량으로 결코 만만한 과제는 아니었다.
내 반응을 본 장현웅이 눈을 크게 뜬다.
“너 어떡하려고 그래? 선생님 수업은 과제 하나라도 안내면 F잖아?”
[소설 창작의 이론과 실제]
매서운 평가와 짠 학점으로 유명한 수업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그 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쓰면 되지.”
담담한 내 대답과 달리 장현웅의 미간 주름이 심각해진다.
“뭐? 지금? 고작 두 시간 남았는데? 차라리 교수님께 찾아가서 사정을 말씀드리는 게 어때?”
“사정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뭐?”
나를 바라보는 장현웅의 고개가 45도로 기운다. 놀라거나 말거나 나는 내 대답을 이어간다.
“시간 내에 카페에 업로드 하면 되는 거지?”
“그건 맞지만... 야, 차라리 그냥 시원하게 포기해. 그걸 이제 와서 어떻게 한다고.”
내가 정말로 못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쓰면, 어떻게 할래?”
가만히 바라보던 장현웅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럼 내기할까? 못 쓰면 니가 술 사고, 쓰면 내가 사고. 먹태까지 추가해서? 어때? 콜?”
먹태까지 추가라.
내 쪽에서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후회하지나 마라.”
“너나. 암튼 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현웅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며 멀어진다.
홀로 남은 나는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낡은 노트북을 꺼냈다.
F학점을 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시간 안에 소설을 제출해야만 했다.
두 시간.
단편 소설을 쓰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미친 듯이 쓰고 싶었으니까.’
나는 비죽거리는 입술을 애써 다문 채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봄이라...’
숨이 깊어지고, 어깨가 내려온다. 뒤이어 봄이라는 추상적 개념 안으로 내 오감이 손을 뻗는다.
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었다.
동시에 얼어붙었던 세상이 가장 격렬하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내가 처음으로 봄을 좋아한 순간이 언제였더라...’
아마 8살 때쯤이었나?
온몸으로 느꼈던 봄의 기억을 떠올린다.
집 앞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노란색 유채꽃 행렬.
냇가를 따라 이어진 흙길을 따라 걸으며 그 향기에 취하던 시절.
따스하고, 분주하고, 꽃내음으로 가득한 계절의 모습들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종종 걸음으로 흙길을 걸었다.
자박자박자박.
꽃내음에 취한 걸음은 동요의 리듬처럼 경쾌했다.
타닥타닥타닥.
아이의 걸음에 맞춰 손가락이 화음을 넣는다.
타닥타닥 타닥 타닥.
아이의 걸음이 빨라지면, 덩달아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도 빨라졌다.
아쉽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쏟아내기에 손이 느렸다.
‘답답하군.’
그러나 펜으로 쓰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타닥타닥 타다다다.
건반을 치듯 리드미컬한 타격음이 들린다.
정체된 이야기를 놓치지 않게 빠르게 손가락이 움직인다.
문득 미켈란젤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조각 작품은 내가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대리석 안에 만들어져 있다. 나는 다만 그 주변을 돌을 제거할 뿐이다.’
(The sculpture is already complete within the marble block, before I start my work. It is already there, I just have to chisel away the superfluous material.)
그래.
마치 대리석 안에 담긴 조각을 꺼낸다고 했던 미켈란젤로처럼, 나 역시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 이미 존재했던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어느 새 봄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흰 여백을 채워나간다.
‘제목은 봄, 그리고 삶.’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창조의 과정.
그 순간, 봄의 기운도 숨을 죽인 채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장현웅은 과제 제출용으로 만들어진 카페를 연신 들락날락거렸다.
마감 시간이 다 됐음에도 아직까지 권서준의 과제는 올라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서준이, 이 자식 어떻게 된 거야? 결국 다 못한 건가?”
옆에서 함께 근로를 하던 동기가 고개를 들었다.
“야, 당연히 못하지. 무슨 수로 두 시간 안에 그걸 쓰냐? 시 한편도 아니고 소설 한편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잘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짜깁기를 하거나 대충 쓸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송영도 선생님한테 아주 박살이 날 테니까.’
맨부커 상을 수상한 송영도 교수의 강의는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한 학기에 A플러스를 받는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로 평가도 박했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친 거지?”
평소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찌그러진 캔처럼 다니던 애가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표정도, 말투에도 이전에 느끼지 못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짜 이상하네. 정말 공모전 탈락 때문에 정신이 나간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동기가 슬쩍 끼어든다.
“뭘 그렇게 신경 써. 너야 그냥 술 얻어먹고 좋은 거지.”
“그거야 그렇지만...”
장현웅은 씁쓸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이젠 과제 마감이 거의 끝난 시간이었다.
‘한번만 더 확인해 볼까.’
딸깍.
마지막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러자 막 올린 과제 하나가 보였다.
-봄과 삶-
제출자는 뜻밖에도 권서준이었다.
“어? 올라왔는데? 정말로 두 시간 만에 소설을 쓴 건가?”
“에이, 설마... 대충 썼겠지.”
“한 번 볼까?”
장현웅은 재빨리 권서준의 과제를 다운 받아 살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기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원고 앞으로 기울어진다.
“어라?”
그런데 소설을 읽어 내려갈수록 두 사람의 숨소리가 작아진다. 건조하지도 않는데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이내 감탄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말도 안 돼...”
“이걸 두 시간 안에 썼다고? 미리 써둔 거 아니야?”
“아니야. 분명 아까 시작하는 걸 내가 봤다고.”
“그럼...”
“....”
“...”
두 사람은 믿기지 않는 듯 말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본다.
두 시간 만에 쓴 글이라고 믿기 힘든 퀄리티.
놀란 장현웅은 한참동안이나 권서준의 과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