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이 셰익스피어였다-1화 (1/203)

# 1. brave new world - 멋진 신세계 (1)

1.

***

“미안한데, 이제 안 나와도 된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게, 내일부터 우리 조카가 일하기로 했거든.”

갑자기 잘린 편의점 알바 자리.

누군가에겐 고작 알바자리겠지만 나에겐 삶을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일터였다.

“죄송한데, 제가 그만둘 수가 없는 사정이라서요. 아니면 다른 아르바이트 찾을 때까지 시간을 좀 주실 순 없을까요?”

“너도 알지만 요새 장사가 잘 안 되잖아. 알바생 두 명을 쓸 정도로 매출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고생했는데, 정말 미안하다.”

당장 이번 달 생활비를 걱정하는 처지에 사정을 얘기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냉혹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냉혹함이 누군가에게는 배려가 되고, 또 사랑이 되는 게 현실이었다.

‘내일 어느 조카는 삼촌의 배려에 편안하게 알바 자리를 얻을 테니까...’

나는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허탈한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비참하고 아이러니한 현실이 담긴 짧은 에세이였다.

‘이 상황에도 글 쓸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씁쓸한 입맛을 삼키며 잠시 메모를 적던 손길을 멈춘다.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버스 창밖을 바라본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른다.

‘장래 희망이 뭐니?’

어릴 때부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작가요! 작가가 될래요.’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읽는 것이 좋았다.

경험하지 못한 멋진 세상과의 조우.

가슴 설레는 이야기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설렘의 순간은 자연스럽게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계가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야기.

나만 아는 놀라운 모험의 세계.

‘쓰고 싶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 멋진 이야기들을...’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작가라는 꿈을 가졌다.

덕분에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할 때 나는 주저 없이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했다. 나로선 이보다 자연스러운 전개는 없었다.

‘물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원고는 쌓여갔고 꿈을 키워갈수록 좌절은 더욱 크게 돌아왔다. 숱한 도전에도 지자체에서 여는 공모전에서조차 입상하지 못했다.

‘소설 속 엔딩과 현실의 엔딩은 너무나 달랐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만큼 글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오늘, 나는 또 하나의 공모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당선 관련 사전 메일을 받았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제발, 제발... 이번에도 떨어지면 진짜 끝이라고.’

나는 휴대폰을 쥔 채 간절히 기도했다.

알바도 잘린 마당에 이번이 작가의 꿈을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email protected]

메일 : 0 / 쪽지 : 0

“...”

내 기대와 달리 메일함은 텅 비어있었다.

‘또 떨어졌네...’

어깨가 축 늘어진다.

신춘문예뿐만 아니라 중소 공모전까지 모두 떨어졌다.

대학교 1, 2학년, 군대에서 도전한 것까지 포함하면 4년 사이, 총 21번의 실패였다.

답답한 마음에 버스 창문을 열었다.

밖은 아직 봄이라기엔 추운 날씨였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래.

세상엔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렇게 내 꿈은 이번에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힘없이 강의실에 들어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나를 본 몇몇 후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쑥덕거린다.

“서준 선배, 이번에도 떨어졌나 본데?”

“진짜? 이번이 21번째라고 하지 않았나?”

“대박. 그렇게 도전하는 것도 대단하네.”

“별명이 천재잖아.”

“천재?”

“노력 천재. 노력 하나는 정말 잘한다고.”

“하긴 그것도 재능이긴 하네.”

킥킥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까 영미문학 산책 발표도 저 선배 혼자 한다며?”

“덥수룩한 머리에 저 안경도 그렇고, 어딘가 음침해 보이잖아. 게다가 글도 못 쓰고... 같이 하기 꺼려지는 것도 이해되지.”

이미 이마가 책상에 닿을 정도였지만 내 몸은 끊임없이 작아진다.

날 선 후배들의 수다는 교수가 들어와서야 그쳤다.

무료한 목소리가 이내 강의실을 채운다.

작가라는 꿈을 갖고 입학한 문예창작학과.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것들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듣던 강의 역시 공허하게 들린다.

‘거기 졸업하면 뭐 먹고 사냐?’

문창과라고 하면 으레 받게 되는 질문.

애써 대답을 미뤘던 질문이 결국 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래. 더 늦기 전에 휴학 신청하고, 다음 학기에 전과하자.’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엄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식당 보조로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식뻘 되는 사장한테 반말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버티는 건 오로지 나 때문이었다.

이젠 엄마를 위해서라도 꿈을 접어야 했다.

‘아쉽지만 이게 맞아...’

다행히 아직 추가 휴학 신청 기간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사지원팀으로 향했다.

미련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오셨죠?”

“...휴학 신청하려고 하는데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어깨가 움츠러든다.

“서류는 가져오셨어요?”

“...여기요.”

나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미리 작성해둔 신청서를 내밀었다.

무심한 얼굴로 신청서를 확인하던 교직원이 이내 다시 신청서를 내민다.

“여기, 본인 서명해주세요.”

다시 보니 본인 서명란이 비어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 이 서명만 하면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다가오자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

내가 주저하자 교직원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신경 쓰이는 그녀의 표정 변화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펜을 쥔 손끝에 억지로 힘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련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

갑자기 찾아온 빈혈기에 머리가 핑 돈다.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의자를 짚었다.

‘왜 이러는 거지?’

스트레스 때문일까.

좀처럼 가시지 않는 현기증에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필터를 씌운 듯 세상도 빛을 잃는다.

“저기...”

가눌 수 없이 몸이 휘청거린다.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눈앞이 흐려진다.

동시에 내 의식도 끝 모를 바닥으로 서서히 침전하기 시작했다.

***

쏴아아.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고,

아주 오래된 저택의 모습이 보인다.

벽난로, 작은 가구 하나까지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죽음을 앞둔 어느 병든 노인의 몸에 깃들어있었다.

“이것도, 이것도 죄다 쓰레기일 뿐이야. 이러니 극장이 망할 수밖에.”

노인은 제 손에 들린 원고를 툭 내려놓았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친구 왓슨의 표정이 굳어진다.

“나름 런던에선 잘 나간다는 작가들인데, 그리도 부족한가?”

“부족하다마다. 극장 하나가 유지되기 위해선 하루에 천 명 이상의 유료 관객을 끌어들여야 해.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근데 이건 하나같이 허황된 내용만 가득하네. 고결한 척 꾸며낸 말로 여기저기 덧칠해 놓은 게 역겨워서 읽어줄 수가 없군. 이딴 건 일기에나 쓸 법한 글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노인은 결국 마른기침을 토해낸다.

옆에서 졸고 있던 어린 심부름꾼이 얼른 일어나 천을 가져다준다.

천에는 어느새 피가 흥건해졌다.

“에드워드, 저 쓰레기들을 빨리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라.”

노인은 말에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원고를 집어 재빨리 난롯불에 넣어버렸다.

화아악.

바싹 마른 종이는 이내 제 몸을 불살라 작은 빛을 만들어내며 사라졌다.

그제야 진정이 되는 듯 노인의 숨소리도 점차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왓슨이 안쓰러운 듯 입을 연다.

“윌리엄. 그렇게 답답하면 자네가 직접 쓰면 되지 않나? 아직도 자네의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지 않은가?”

노인은 장작처럼 말라버린 손을 움직여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나 역시 쓰고 있네. 다만 보여줄 수 없을 뿐이지.”

글을 쓰고 있다는 노인의 말에 왓슨의 눈빛에 호기심이 인다.

“왜 보여줄 수 없다는 거지?”

“아마 내 글을 보자마자 퓨리탄(Puritan, 청교도) 놈들이 들고일어날 걸세. 사탄의 자식이 낳은 작품이라고. 어쩌면 이 나이에 화형을 당할지도 모르고.”

조소 섞인 노인의 말은 그 뒤로도 이어진다.

“물론 죽음이 겁나는 건 아니야.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늘도 죽어가는 중이니까. 다만 이해도 못 할 돼지들에게 내 진주 목걸이를 내어주고 싶지 않을 뿐이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 못 하는 세상에 좌절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가 벌써 10년.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작가였다.

“그렇게 독특한 이야기인가?”

“독특하다? 아니, 내가 들여다본 세상을 자네가 보게 되면 숨을 쉬는 것도 어려울 거야. 아마 앞으로 수백 년 안에는 이해 못 할 걸세.”

“대체 무엇을 썼기에 그러나?”

“상상도 못 할 멋지고, 비참하고, 또 환상적인 것들이지.”

그의 시선은 허공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도서관 속 책처럼 쌓여있는 수많은 이미지와 글들.

하나같이 세상에 발표된 적 없는 미발표 작품들이었다.

‘이런 게 예술이지.’

스러져가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환희와 열망으로 가득했다.

아니, 그것은 열망을 넘은 광기 그 자체였다.

그러나 왓슨의 표정은 굳어만 간다.

“자넨 끝까지 그 글을 내게 보여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

노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여줄 생각도 없지만 보여줄 수도 없었다.

‘아직 세상에 나와 본 적 없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왓슨의 표정엔 실망의 기색이 비친다.

“하긴, 자네 뜻은 여왕 폐하도 돌리지 못했지.”

이유는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기에 노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결국 설득을 포기한 왓슨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어느새 막 먹구름이 걷히고 햇볕이 드리운다.

마을 들판엔 노란색 유채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군.”

“그래. 봄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지.”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잦아든다.

생기로 가득 찬 세상과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몸뚱이.

격렬히 대비되는 두 존재의 괴리감에서 오는 아쉬움 때문이리라.

봄에 태어나서,

봄을 사랑했고,

봄에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

노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딘지 모를 높을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게 다시 한 번 봄이 온다면, 당신도 이 멋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쯧쯧.’

오히려 안타까운 듯 혀를 차는 노인. 그건 신을 향한 노인의 오만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찬란한 봄을 바라던 노인의 눈꺼풀이 이내 힘을 잃고 흘러내린다.

***

쏴아악.

마치 빠르게 감기는 필름처럼 정신이 돌아온다.

회한과 아쉬움으로 점철된 노년의 기억.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한 천재의 삶이 내게 와닿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깨운다.

“학생, 여기 서명해줘야 하는데요?”

재촉하는 교직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다.

“아, 죄송합니다.”

대체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걸까.

나는 건네받은 펜으로 서둘러 서명을 했다.

사각사각사각.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무언가를 적어낸다.

그런데,

살짝 기울어진 글씨는 평생 써본 적도 없는 영문 필기체였다.

더 놀라운 건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글귀는 정확히 이랬다.

William Shakespeare.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400년 전 전생이 차오른다.

냉철하면서, 호기심 많고, 순수하면서, 한없이 오만한 한 인간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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