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90화 (190/250)

190화

대주와 부대주가 모이자 고벽후가 말했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터놓고 말하겠소. 천하방 연합무력대가 포위되어 있는 걸 아실 게요.”

동사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두면 전멸할 게 분명하오. 구하러 갑시다.”

그러자 고벽후가 의외의 눈으로 동사철을 쳐다봤다.

난주 무림은 그간 천하방과 거리를 두어 왔다. 머나먼 중원의 무파가 마천을 빌미로 난주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그래서 같은 정파임에도 서로 소 닭 보듯이 하였다.

이번 마천의 침공에서 고벽후나 무한의 의견을 들어 천하방과 연합하는 대신 독자노선을 택한 데는 그간 무시당해온 감정도 작용했다.

동사철이 약간 계면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내 목숨은 이제 내 것이 아니오. 검천부주에게 세 차례나 구함을 받았소.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고원의 시신으로 나뒹굴었을 것이오.”

혈랑대 막적 역시 말했다.

“나는 협은 모르지만 의리는 알고 있소. 오늘 저녁 참혼대의 고수에게 죽을 운명이었소. 그러나 이름 모를 고수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이게 내가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면서 무한을 보았다.

막적은 무공은 높지 않지만, 머리가 좋고 인정이 있어 혈랑대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자다. 자신들이 살아난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다.

허공을 격하고 사람의 손목을 자르는 무공을 지닌 자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변방 고원 사람들은 거칠지만 의리가 있고, 잔혹하지만 은원을 분명히 하는 성향이 강했다.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갚아주는 것! 그게 우리 고원의 사내들 아닌가?”

막적이 말하자 고벽후가 크게 웃었다.

“마적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군.”

“흥! 고 대주. 우리를 아직도 마적이라 생각하는 게요!”

이대 부대주 칠랑이 고벽후의 말에 반발하였다.

“좋아, 마적이든 아니든 지금은 고원을 지켜야 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이대로 마천 아니, 이제 천산파라고 했나? 그들에게 고원을 넘기면 평생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고벽후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좋은 의견들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시오.”

궁여직이 한발 나섰다.

“천하방 연합무력대가 갇혀 있는 삼량진은 총 세 갈래로 길이 나 있습니다. 마천의 사대비지 혈지와 만마곡 등이 세 길을 틀어막고 몰이를 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땅바닥에 삼량진 지형을 그렸다.

“우리가 이 길을 뚫고 들어가 그들과 연합하여 다시 혈로를 뚫는 건 희생이 클 겁니다.”

“그러면?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가?”

“연합무력대의 주력이 여기 북쪽 험로로 나오고, 우리가 후방에서 밀고 들어가면 통로를 열 수 있지요.”

“좋은 방법이긴 한데, 안에 있는 연합무력대가 이 길로 온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 가서 전해야지요.”

포위망을 뚫고 밀지를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궁여직이 무한과 고벽후를 보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 두 자루나 있지 않습니까?”

무한과 고벽후의 무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으음, 네 부대주가 우리 둘에게 사지로 가라는구나.”

고벽후가 웃으며 말했다.

“고 대주께서 주의를 끄는 동안 심 대주께서 잠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다만….”

궁여직이 잠시 머뭇거렸다.

“천하방 상황이 너무 어지러워서 검천부주이신 심 대주를 얼마나 신뢰할지, 그건 제가 모르겠군요.”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다니. 궁여직은 확실히 책사로서 뛰어난 면이 있었다.

무한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좋아. 바로 실행하지.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네. 동 대주께서 총괄 인솔을 하여 주시오.”

고벽후와 무한은 바로 출발하였다.

***

“크윽!”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백상인의 옆에 있던 조원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익!”

마천도가 쓰러진 조원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데 백상인이 검을 내밀어 막았다.

백상인이 한눈을 팔자 상대하고 있던 마천도가 고함을 지르며 전력을 다해 도를 쳐왔다. 백상인이 황급히 몸을 비틀었으나 등에 칼이 스쳤다.

“윽!”

백상인은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검을 뒤로 휘둘렀다.

서걱!

용케도 상대의 팔이 검에 걸렸다. 마천도가 검에 베인 팔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

‘손해 볼 수야 없지.’

부상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조원을 살리고, 적까지 무력화시켰다.

난전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확, 하고 얼굴을 덮친 피가 적의 것인지 아군의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백상인이 얼굴에 묻은 핏물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돌아봤다.

벌써 두 시진째 어둠 속에서 파상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야 밀어붙이는 강도가 점차 줄어들 고 있다.

오늘밤은 이렇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만…….

‘내일은 결판을 보자고 할 것 같구나.’

며칠째 밤마다 적이 기습을 감행하였다. 그 때문에 연합무력대는 뜬눈으로 밤을 새야 했고, 체력도 사기도 뚝뚝 떨어져 갔다.

내일이면 아마 총공세로 몰아붙일 것이다.

백상인의 마음은 무거웠다.

이대로 이 좁은 협곡에서 전멸할 수도 있다. 수뇌부가 연일 회합을 가졌지만 의견이 계속 갈리기만 한다.

무력대를 셋으로 나누어 세 길을 택해 각자도생하자는 의견과 한 곳을 집중 공략하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각자도생을 고집하는 이들은 셋으로 나누면 이쪽의 무력이 약해지긴 하지만, 적도 세 곳을 다 막아야 하기에 결국은 매한가지라고 주장했다.

주로 무력이 우위에 있는 본방 무력대들이 각자도생을 고집했다.

군장 문우승은 두 곳에 허장성세를 구축하여 적의 눈을 속이고, 전력을 한 곳에 퍼부어 신속하게 길을 뚫자고 주장했다. 각자도생 파는 그러다 앞뒤로 협공을 받으면 몰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양쪽 다 장단점이 있기에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천하방이 갈라져 정천맹이 생긴 후 현무대주이자 연합무력대 군장인 문우승의 지휘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만일 삼량진 협곡에 갇히지 않았다면 벌써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그 누구도 스러져가는 천하방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채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뜸해지며 싸움이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적진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비명과 아우성 소리가 요란했다.

콰앙!

고수가 터뜨리는 기파가 연달아 터지고, 병장기가 부러져 날아가는 게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백상인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깨달았다.

‘어마어마한 고수가 오는구나.’

천하방 무력대원들조차 긴장하였다. 개중에는 혹시 지원군이 온 게 아닐까 하여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잠시 후.

한 사람이 허공을 날아와 천하방 진영에 뚝, 떨어졌다.

‘무한?’

백상인이 바로 무한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 무한이라면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천무행에서 보여준 무한의 활약, 게다가 그 이후 기이할 정도로 성취가 빠른 무위…….

백상인이 무한을 향해 달려갔다.

쿠웅!

무한은 일부러 진각을 밟아 기파를 터뜨려 뒤쫓아 오는 마천도들을 막았다.

달려오던 마천도들이 멈칫하더니 정황을 살피고 서서히 물러났다.

마천 본진 쪽에서 여전히 기파가 터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고벽후가 본진을 유린하고 있을 것이다.

다급한 호각소리가 들리고 천하방을 기습한 적들이 빠르게 퇴각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여기 지휘부가 어딨습니까?”

무한이 옆에 선 무사에게 묻는데 백상인이 달려오며 무한을 불렀다.

“무한!”

“백상인, 무사했구나.”

“하아… 그래. 그런데 이 지옥에는 웬일이야?”

“네가 지옥에서 헤맨다고 해서 길을 일러주러 왔지.”

무한이 평소답지 않게 농을 섞어 대답하며 전장을 살폈다.

밤에 기습하는 건 공격하는 쪽이 훨씬 불리하다. 그럼에도 마천도들이 기습을 하는 건 이쪽의 체력을 갉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 전술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는지 대부분 극도의 불안과 피로에 절어 있었다.

백상인이 아직도 기파가 터지는 적진을 보며 물었다.

“지원군이 온 거야? 저 사람은 대체 누구야”

“고 대주야. 그리고 새벽이면 난주 무인들이 도착할 거야. 그전에 문 군장을 만나야겠어.”

백상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문우승을 군장이라 할 수 있을지 그 자신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다른 대주들은 오히려 승룡대 전경목 대주를 따르는 것 같았다.

무한은 백상인을 따라 문우승에게 갔다. 가면서 진영을 살폈는데 처참한 패잔병의 모습이 따로 없다.

나무를 대충 엮어 만든 방책 뒤에 힘없이 주저앉아 잠을 청하는 모습은 일전에 진영을 찾았을 때와 사뭇 달랐다.

그때는 전의에 불타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한 번 더 공격을 받으면 그대로 절망에 빠져 포기할 것만 같았다.

‘손우자, 이걸 노린 것인가?’

천하방과 정천맹이 쪼개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의외였다. 손우자는 일을 진행할 때 항상 대안을 만들어 놓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떠나온 뒤 천하방 정세가 급변한 듯했다. 도왕이 가면을 벗고, 감찰부에서 견제를 하니 적어도 한동안은 위축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손우자는 곧바로 방을 쪼개 버렸다.

연합무력대는 갑작스런 사태에 흔들리는 중이다. 무력대원 상당수의 출신 문파가 정천맹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손우자는 애초부터 연합무력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무한이 개입하는 바람에 연합무력대가 퇴각하여 전력을 보존하자 보란 듯이 버려버렸다.

‘방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총군사로 남아 있는 이유가 뭐지?’

무한은 손우자가 천하방 총군사로 남아 있는 상황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지만, 감숙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먼저 왔다.

지금은 이곳 일에 집중할 때였다. 다행히 연합무력대는 적잖은 피해를 보기는 했으나 전멸 수준이 아니었다.

“피해가 얼마나 돼?”

“사상자가 이백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아.”

대답하는 백상인이 표정이 어두웠다. 그가 맡은 조에서도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명은 중상이다.

“마천도들이 사대비지 혈지와 만마곡의 고수라는데 용케 잘 버텼어.”

“저들도 서로 알력이 심한 모양이더라고. 절대 함께 행동하지 않아. 그게 우리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무한은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난주에서 마천주와 겨룰 때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 것이다. 십이가주들은 마천주의 행보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오랜 세월 마천이라는 이름으로 지내오다 한순간 천산파라는 무파로 변신하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마천에도 약점은 있어…… 서로 단합이 되지 않는 것!’

천하방과 흑천, 그리고 마천까지.

지금 천하가 어지러운 건 내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뇌부들이 벌인 싸움 때문이다.

‘이 싸움은 수뇌부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아.’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 수뇌부만 몰락하면 다른 쪽에서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으으윽!”

그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팔이 잘린 무사가 나무에 기대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를 본 무한이 싸늘한 분노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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