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89화 (189/250)

189화

앞서 가던 초달삼살이 어느 순간 훅 꺼진 듯 사라졌다.

무한이 그 자리에 가서 보니 아래쪽으로 물길이 흐르는 협곡이다. 절벽 옆으로 외길이 나 있었다.

경계병들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함께 길을 내려가는 초달삼살이 보였다.

“흐아암~.”

경계병들은 무한이 가까이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연신 하품만 하고 있었다.

초달삼살은 힘들게 협곡을 내려갔지만 무한은 그냥 몸을 날렸다.

연처럼 천천히 밤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무한이 협곡을 둘러봤다.

한쪽으로 깊숙한 공동이 뚫려 있고, 그 안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동 입구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오갔다.

교대를 위한 경계병, 협곡에 물을 기르러 가는 자, 고깃덩어리와 술을 들고 마실 자리를 찾는 자 등 다양한 이들이 오갔다.

무한도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두건에 피풍의를 쓴 자가 하나둘이 아니니 곧바로 섞여들었다. 여러 사람이 섞인 곳이라 서로 누가 누구인지 모르니 무한에게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공동은 꽤나 크고 깊었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 한창 갑론을박을 펼치는 중이었다.

공동 벽 쪽에 고벽후가 앉아 있었다.

무한이 보니 패거리는 대략 네다섯 정도 무리지어 있었다.

멸마대와 난주 정파, 난주 정통 흑도, 그리고 마적에서 전향한 흑도들과 기타 무리.

무한은 뒤편에 서서 가만히 오가는 말을 들었다.

난주 정통 흑도들이 돌아가겠다고 하고, 이를 멸마대가 말리는 중이었다. 나머지들도 제각기 생각이 있는지 논의가 이리저리 맥락 없이 흘렀다.

‘고 대형이 그냥 두고 볼 분이 아닌데?’

고벽후는 털가죽 하나를 깔고 앉아서 듣기만 하였다.

반 시진 정도 지난 뒤.

고벽후가 일어나 손뼉을 탁탁 쳤다.

“자, 이제 충분히 얘기를 한 듯하오. 그러니 이제 각자 하고픈 대로 합시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난주 정파의 수장 격인 동사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벽후의 얼굴에 횃불이 비쳐 붉은 빛이 일렁거렸다.

“여기 모인 자들은 다 큰 어른들이오.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소?”

그러면서 난주 정통 흑도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강하보의 교훈을 벌써 잊은 모양이오? 하긴, 문파 하나가 일어섰다 사라지는 게 뭔 대수겠소. 돌아가는 길 조심해서 가시오. 배웅하지는 않겠소.”

이어서 혈랑대 출신의 흑도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충고하는데 너희는 혈랑이 올 때까지 그냥 있는 게 좋아. 혈랑이 와서 너희 마음대로 다시 마적질을 한 걸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마적들도 패거리가 둘이었다.

혈랑대와 혈랑대에 의해 강제로 제압되어 흑도가 된 마적들. 혈랑대는 남고, 강제로 제압되었던 마적들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고벽후가 이처럼 사람을 흩어버리자 동사철이 굳은 얼굴로 따졌다.

“지금 한 손이라도 더 모아야 할 지경인데 어찌하여 이리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게요?”

고벽후가 웃으며 말했다.

“동 국주,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오.”

그러면서 멸마대를 가리켰다.

“멸마대 마흔 명으로 십 년 간 감숙을 지켰소.”

연추산 등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우리에게 맡기시오. 오합지졸은 있어봐야 민폐만 끼칠 게요.”

“이보게, 말이 심하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도 민폐란 말인가?”

동사철 옆에 있던 누군가 고벽후의 독주에 한마디 하였다.

고벽후가 그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풍사검(風射劍)을 누가 민폐라고 생각하겠소! 그러니 이렇게 남아 계시길 청하는 게 아니오?”

무한이 고벽후의 언술에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때, 초달삼살이 공동으로 들어왔다.

혈랑대 무리가 막적이 부상당한 걸 알아채고 우르르 몰려갔다.

“어떻게 된 건가?”

“오는 도중에 참혼대 두 놈을 만났네.”

막부가 대신 설명했다.

그러자 모두 의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참혼대 고수 두 명이면 초달삼살을 난도질하고도 남는다. 혹시 부상을 입혀 도주시키고 뒤를 쫓아온 게 아닐까?

막부가 손을 저었다.

“추적은 없었네. 오해하지 말게.”

고벽후가 스윽 나섰다.

“사람들… 너무하네! 부상당한 사람을 세워놓고 뭐하는 건가?”

그러고는 자기가 앉았던 털가죽에 막적을 앉히고 물었다.

“그래서 그 참혼대 고수 둘은 어찌하고 왔나? 그냥 죽여버렸나?”

막적이 부끄러운 낯빛을 지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고 대주, 놀리지 마쇼. 우리가 참혼대 고수 하나 감당하기 어렵다는 건 아오. 누군가 구해주었소.”

그러면서 오는 도중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무한도 뒤쪽에서 들었다. 다른 사람 입에서 자기가 한 일을 듣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그렇게 된 거요.”

“그건 자네들을 구한 게 아니라, 마침 참혼대 놈을 마주친 김에 마천의 동향을 파악한 거 같은데?”

누군가 또 초달삼살의 아픈 데를 찔렀다.

다 듣고 난 고벽후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막적 등이 참혼대의 추적은 눈치챌 수 있어도, 그런 고수라면 불가능하지 않겠나.

다만 마천을 적대시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긴 했다. 그래도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건 불안요인이다.

“그자가 십이참에게 들었던 것들을 정확하게 말해주게.”

막부가 십이참이 털어놓은 마천의 정보를 일러주었다.

“뜻하지 않은 수확이로군.”

“그리고 대주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혈랑은 지난번 마천주와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었다. 대막혈사가 데리고 사라진 후 아직 소식이 없었다.

초달삼살이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다닌 건 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위리고성(偉璃古城)에 있다고 합니다.”

위리고성은 대막으로 넘어가는 부근의 산 중턱에 있는 폐성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다.

“그 노인네. 멀리도 갔군. 그렇다면 당분간 혈랑은 오기 어렵겠어.”

고벽후가 혈랑대를 보며 말했다.

“마적질만 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어떻게 하든 상관 않겠다.”

혈랑대가 모여 숙덕거리더니 막부가 와서 말했다.

“대주가 마천주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마천은 우리의 적이요. 함께 하겠소.”

“좋아! 그런 의기면 됐어.”

그렇게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갈렸다.

함께할 자들을 둘러보던 어느 순간 고벽후의 시선이 무한에게 닿았다.

“……!”

고벽후가 크게 놀라며 무한을 주시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무한에게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고수가 아닌 고벽후 정도의 고수가 기운을 읽어낼 수 없다는 건….

‘이놈이?’

고벽후는 새삼 무한의 성취에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했다.

“뭐냐? 뒤에 숨어서 의뭉스럽게 엿듣다니!”

고벽후의 말에 모두가 돌아보자 무한이 앞으로 나섰다.

“고 대형의 지휘에 감탄하던 중입니다.”

“으음. 말솜씨는 여전하군.”

연추산 등도 다가왔다.

“우리도 이제 막 도착했는데… 정말 빨리 왔군.”

원래대로라면 저녁에 들었던 객잔에서 기다리며 표식을 남겨야 접선할 수 있었다. 우연찮게 초달삼살을 만나 바로 올 수 있었으니 시간을 단축한 셈이다.

고벽후가 동사철에게 말했다.

“오합지졸 천 명보다 내 아우 한 사람이 더 든든하지 않습니까?”

동사철은 당연히 무한을 반겼다.

“내가 검천부주에게 구명지은을 얻은 바가 몇 번인데 그걸 모르겠나. 우리 동씨 가문 대대로 그 은혜를 갚을 작정이네.”

고벽후가 손뼉을 짝짝 쳐서 주의를 환기한 후 외쳤다.

“모두 모이라고 하시오! 여기는 이제 버릴 것이니 경비병까지 모두 오라고 하시오.”

그러고는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은 사람들은 멸마대와 난주 정파 그리고 혈랑대인가?”

“우리도 있소!”

난주 흑도 중에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이들과 마적들 중 남은 자도 있었다. 어디에도 소속하지 않은 낭인들도 몇 명 보였다. 그야말로 떨거지들이다.

그러나 고벽후는 크게 감탄하고 반겼다.

“진정한 의혈남아들이로군. 이제 우리는 한 형제요. 어서 이리 오시오.”

잠시 후, 공동에 모인 인원은 대략 삼백 명 가량 되었다.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간 걸 보고 사람들이 침울해하는데 고벽후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러고는 난주 정파를 일대, 혈랑대를 이대, 남은 세력을 삼대로 묶었다.

“각 대는 대주와 부대주를 정하여 보내주고, 대원들의 무위를 파악해주시오. 아, 일류급 고수 명단도 부탁하오.”

잠시 후.

난주 정파에서는 동사철과 풍사검이 왔고, 혈랑대에서는 막적과 칠랑이라는 자가 왔다.

여러 사람이 모인 삼대는 여전히 갑론을박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고벽후가 말했다.

“거기! 삼대는 대주가 정해졌으니까 부대주만 보내시오.”

그러자 삼대 사람들이 의아해하였다.

“삼대는 당분간 여기 검천부주가 맡을 것이오.”

무한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벽후를 돌아보았다.

고벽후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말했다.

- 급하다. 천하방 연합무력대가 전멸 위기다! 나중에 설명하마.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고벽후가 왜 이리 서두르는지 알았다.

고벽후의 말에 삼대 사람들 중에 환호하는 자도 있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도 있었다.

무한이 앞으로 나가 말했다.

“당분간입니다. 마천이 언제까지 난주를 점령하게 둘 수 없지요. 그들을 몰아내면 자연 해체될 것이니, 나이 어리다고 마다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아니라…….”

누군가 말했다.

“대주와 차이가 너무 나서 따라갈 수가 없으니 그게 걱정이지요.”

삼대 사람들도 무한이 누군지 안다. 무려 마천주와 겨룬 인물이다. 그러니 부담스러운 것이다.

무한이 웃으며 한 사람을 지목했다.

“저분이 부대주를 하면 좋겠군요.”

무한에게 지목당한 이가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뛰어난 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무한이 부르니 앞으로 나서야 했다.

무한은 눈빛이 영악해 보이는 자에게 인원과 무공 수준을 파악하라 이르고 자신이 선정한 자를 데리고 움직였다.

고벽후에게 가기 전 무한이 사내에게 물었다.

“존함이 어찌 되시지요?”

무한이 사내를 선정한 것은 천심공을 일으켜 본 결과였다. 사내는 침착하고 심기가 깊어 보였으며, 무엇보다 마천과 싸울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궁여직이라고 합니다. 변방의 낭인에 불과하여 별호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천에 항거하시는군요.”

“예전에 강하보에 잠시 있을 때 보주에게 은혜 입은 바가 많습니다. 사정상 강하보를 떠났지만 사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무한은 비슷한 소리를 악가박에게도 들었다.

‘강하보주가 인덕은 있었나보구나.’

지금 악가박은 강문평과 함께 서현에 있다. 강문평은 하기주로부터 정식으로 무학을 전수받고 열심히 수련중이라고 했다.

“악 총관을 아시겠군요.”

궁여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만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스로를 하수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저기 삼대에는 저보다 뛰어난 고수가 최소한 셋 정도 있습니다.”

무한이 보기에 궁여직의 무공은 평범한 수준을 조금 넘은 정도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삼대에는 일류라고 할 만한 자가 셋 정도 되었다.

무한은 궁여직이 대원들의 무공 수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걸 알자 자신이 제대로 사람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저는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찾은 게 아닙니다.”

“예?”

“전략을 세우고, 의지를 다해 적과 맞서 싸울 자를 고른 겁니다.”

궁여직이 아, 하더니 포권을 하였다.

“떠돌이 낭인을 그리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궁여직이 감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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