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일만이라니…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야?”
“아닙니다. 일만… 아니, 그 이상일 거라고 했습니다.”
혈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인 일만 명이면 십만 군대와 맞먹는 무력이다. 그야말로 전쟁인 셈이다.
“가보자. 아니면 허튼 보고를 한 놈들은 다 경을 치를 것이다!”
혈랑이 말고삐를 돌려 달려갔다.
무한이 자신을 말을 찾아 오르며 동사철을 보았다.
동사철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우리는 알아서 가겠네. 어서 가보게.”
무한은 말을 달려 혈랑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고원 높이 솟은 봉우리 위에 혈랑과 무한이 섰다.
저 멀리 고원을 까맣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이들이 보였다. 무척이나 빠른 움직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정말 많군. 근데 저거, 그냥 오는 게 아닌데? 쫓고 쫓기고 있어.”
혈랑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한의 시선은 쫓기는 무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질주하고 있는 무리의 선두에 있는 이가 광풍대주 광포였다.
혈랑도 쫓기는 무리가 소마의 무력대라는 걸 알고는 의아해하였다.
“지들끼리 싸움이 붙었나? 왜 저런대?”
“천주와 소마의 암투가 표면화된 것 같소.”
“으음. 그러면 저 병력이 소마를 제거하기 위해 온 거라고?”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천주는… 소마를 제거하는 동시에 중원 무림까지 접수할 생각인 듯하오.”
“흥! 그게 가능한가?”
무한이 밀려오는 마천도들을 보다 물었다.
“십만마도라고 하는데 정말 마천의 무인이 십만 명이나 되오?”
혈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과장이고. 마천의 본산과 영역에 있는 무인들을 모두 소집하면 삼만에서 오만은 될 거야.”
혈랑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진중했다.
“무서운 건 마천의 고수들이야. 놈들은 마공을 익히다 미쳐서 그런지 잔인하기 이를 데 없거든. 중원에서 일류라고 손꼽을 만한 놈들이 마천에 수두룩하다는 게 문제지.”
혈랑이 봉우리 뒤로 가며 말했다.
“일단 도주해야겠다. 너는 어쩔 셈이냐?”
무한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혈랑을 봤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시세를 알아야 준걸이라는 말도 모르는 인간 같아?”
혈랑이 퉁명스레 외치고는 봉우리에서 뛰어내리더니 말에 올랐다.
“이랴!”
혈랑이 말을 달려 사라지자 무한도 봉우리를 내려왔다.
천주가 조정을 무시하지 않는 이상 난주 민간인들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표적은 무림인이고, 그중에서도 천하방 연합 무력대를 가장 먼저 칠 것이다.
무한은 연합 무력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
선두를 달리다 후미로 온 광포가 사추선에게 물었다.
“주군 소식은 아직 없소?”
사추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민한 분이네. 빠져나올 거라 했으니 우리만 잘하면 돼.”
광풍대와 사천대는 일정한 속도로 질주하는 중이다.
천주가 이끌고 온 마천도들은 급히 쫓지 않았다. 마치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을 밀어내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쫓아왔다.
“저들의 의도가 뭐요? 머리 좋은 형님도 모르겠소?”
사추선은 뒤를 압박해오는 마천도들을 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우리를 칼받이로 만들 생각인 모양이네.”
“칼받이?”
“저 앞에 누가 있겠나?”
멀리 난주가 희미한 점으로 보인다.
“천하방과 난주 무림인들이 있겠지. 그들에게는 우리도 적이니… 선발대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옆으로 빠지고 싶어도 좌우를 틀어막고 압박해오니 길 따라 달릴 수밖에 없다.
광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많은 병력을 보고 감히 누가 맞서려 할까?”
뜬금없는 광포의 의문에 사추선은 퍼뜩 스치는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그야말로 엄청난 병력이다.
사추선이 크게 웃었다.
“하하. 광포, 자네의 머리도 쓸 만한 걸?”
“무슨 소리요?”
“아닐세.”
확실한 건 아니니 사추선도 장담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앞에 누가 있던 일단 이 대군은 피하리라 생각했다.
“속도를 늦춘다.”
사추선의 명에 광포가 의아해 했지만 일단 따랐다.
광풍대와 사천대가 속도를 늦추자 쫓는 마천도들과의 간격이 백 장 정도로 좁혀졌다.
두두두두.
마천의 병력이 거대한 먼지구름을 피우며 난주로 향했다.
***
진영에 도착한 무한은 곧바로 군장 막사를 찾았다.
막사는 어수선하였다. 무력대주들이 막 흩어지려던 참이다.
“출전하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네.”
전경목이 다가와 무한에게 말했다.
“잠시만!”
무한이 외쳤다.
족제비 군사와 뭔가를 상의하던 문우승이 무한의 목소리에 돌아봤다.
“무슨 일이오?”
족제비 군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일만 마천도가 오고 있소. 일단 후퇴해야 하오.”
“뭐라고?”
막사 안에 침묵이 흘렀다.
일만이라는 수가 주는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게 사실이오? 척후들의 보고에 그런 내용은 없었소만.”
족제비 군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연합 무력대는 난주 북쪽에 주둔하는 마천 선발대와 대치중이다.
무한이 족제비 군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문우승을 향해 말했다.
“지금 서쪽에서 본대가 오고 있습니다. 적어도 일만 명은 넘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럴 리가? 그렇게 많은 병력이 움직였는데 여태껏 아무런 첩보도 없었다고?”
족제비 군사가 망연자실해 했다.
문우승이 무한에게 물었다.
“서쪽에서 오고 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무한이 탁자 위의 지도로 가서 마천의 진군로를 그렸다.
“으음…….”
문우승이 침음성을 흘렸다.
첫 출전인데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을 해야 할 상황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지금은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확실하오?”
“혈랑도 난주 무림인을 규합하여 난주성을 빠져나올 겁니다.”
“으음.”
문우승이 무력대주들을 돌아봤다.
무력대주들 역시 출전을 앞두고 들려온 적의 대군 소식에 어두운 표정이었다.
문우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후퇴해야겠소. 적의 규모가 군사부에서 파악한 것과 너무 차이가 크오.”
무력대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삼천 명이라면 어찌 해보겠는데 일만 명이라는 숫자는 감당할 수가 없다.
“바로 퇴각을 준비해주시오.”
그때,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우승과 무력대주들이 황급히 군장 막사를 나섰다.
진영의 남쪽.
일백여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 명의 마천도들이 따르고 있었다.
“뭐야? 적이 오는데 왜 아무런 보고도 없었지?”
문우승이 족제비 군사를 돌아봤다.
그런데, 자리에 없었다.
“군사! 군사는 어디 갔나?”
당황하여 외치는 문우승을 무한이 막았다.
“놈은 곧 잡혀 올 겁니다.”
무한은 족제비 군사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남궁우에게 잡아 놓으라 전음을 보내두었다.
“대체 무슨…….”
“우선 동쪽으로 빠져야 합니다.”
문우승이 정신을 차렸다.
적이 남쪽에서 왔다는 건… 연합 무력대가 출전했다면 북쪽과 남쪽, 양쪽에서 협공을 당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군사가…… 배반했단 말이오?”
문우승은 기가 막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무한이 전경목에게 외쳤다.
“승룡대가 먼저 길을 열어주시지요.”
천무행 작전에 참가해 그나마 고원 지리에 익숙한 승룡대를 선두로 내보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알겠소.”
전경목이 황급히 달려갔다.
문우승도 정신을 차리고 무력대주들에게 일렀다.
“산서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오. 승룡대 뒤를 산서 용호대가 따르며 길을 잡아주시오.”
그러면서 현무대 부대주에게 일렀다.
“우리가 후미에서 적을 막는다.”
그러자 무한이 나섰다.
“적은 제가 막을 테니 일단 가시죠.”
“……?”
문우승이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무한을 보았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무력대에 둘러싸이면 죽을 수 있다. 고수를 잡기 위해 만든 게 무력대이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적 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퇴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무한이 정색하고 문우승을 보았다. 형형한 정광이 번뜩이며 천심공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문우승은 왠지 모르게 무한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이윽고 진영의 동문이 열리고.
두두두두.
승룡대 기마대가 먼저 빠져나갔다.
이를 보고 남쪽에서 오던 마천 기마대가 방향을 틀어 동문 쪽으로 달려왔다.
장창을 든 그들은 전문적으로 기마대를 잡기 위해 훈련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때, 목책을 넘어 한 인영이 날아오더니 마천 기마대의 진군로 앞에 섰다.
“……?”
“저건 뭐냐?”
홀로 검을 들고 선 무한을 보고 마천 기마대가 비웃었다.
“그냥 짓밟아 버려!”
두두두두.
마천 기마대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질주해 왔다.
어중간한 무인이라면 질주하는 말에 부딪히는 순간 충격에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이다.
마천 기마대는 무한을 무시한 채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무력대만 주시하며 달렸다.
무한이 경천신검을 들어 올렸다.
검에서 거대한 강기가 형성되었다.
“헉!”
선두에서 질주하던 마천 기마대 몇몇이 심상치 않은 기운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이미 말은 전력질주 중이고, 뒤에서 밀듯이 달려가는 중이다.
무한이 그대로 허공으로 솟으며 검을 휘둘렀다.
순간, 수많은 무형의 검이 촤르륵 펼쳐지더니 검벽이 형성되었다. 무한의 검벽은 소마의 마왕검벽 못지않았다.
선두에 선 네 명의 기마대원들은 창을 쳐들며 검벽을 향해 뛰어들었다.
퍽!
창대가 부러지고.
서거거걱!
뼈와 살이 갈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읍!”
“히히힝!”
기마대원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검벽 무수한 검날에 갈려 나갔다.
“갈라져!”
본대를 지휘하며 달려오던 우두머리가 황급히 깃발을 흔들었다.
기마대가 좌우로 갈라져 무한을 우회하려 하였다.
순간 무한은 검을 거꾸로 세워 그대로 땅에 꽂았다.
콰지직!
거대한 경기가 검을 타고 땅을 헤집었다.
땅바닥이 갈라지며 솟아오르자 말들이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과 말이 뒤섞여 구르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와!”
목책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무력대원들 사이에서 함성이 솟았다.
“검신이 왕림하셨다!”
누군가 외쳤다.
무한이 땅바닥에 검을 꽂은 건, 지천격의 일초를 역으로 펼친 수였다.
오래전 심양조가 한 번 펼쳐 마천의 기마대를 잡은 뒤 전설로 회자되어 왔는데, 용케도 누군가 이를 알아본 모양이다.
남궁우는 그저 입만 쩍 벌릴 뿐이었다.
그동안 무한을 따라다니며 무공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곤 했는데, 오늘 보니 아예 자신의 상상을 벗어난 경지에 이른 게 분명했다.
‘이런 걸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강행군이라도 따라 다닐 수밖에 없지.’
누가 있어 검신의 무공을 지척에서 엿볼 수 있으랴.
남궁우가 뿌듯해 하는데 소소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여기서 뭐해욧! 빨리 가야 해요.”
“아아,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부주가 명령한 거 못 들었어요? 한 사람이라도 잃으면 책임을 묻겠다고 했잖아요.”
“그러게, 그런 황당한 명령이 어디 있어. 이 사람들이 어린애야? 천하방 무력대라고. 싸우다 죽기를 바라는 무인들을 애 취급하다니…….”
남궁우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소소의 뒤를 따라갔다.
촌각을 다투긴 했다. 무한의 말대로 일만 대군이 진영을 펼쳐 포진하면, 이중 절반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땅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마천 기마대도 멈췄다. 우두머리가 음침한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죽고 싶은 게로군.”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계란 게 있다. 이 정도 힘을 발휘하려면 진경의 고수도 특수한 공법을 통해 잠력을 모두 폭발시켜야 가능한 일이다.
우두머리는 적진에서 한 사람의 고수를 희생시켜 무리를 구하는 작전을 펼친 것이라 여겼다.
다만, 그 고수가 너무 어리다는 게 의외였다.
“어린놈이 가상하군.”
무한이 땅바닥에 꽂은 검을 빼어 치켜들며 말했다.
“천주에게 가서 전해라. 천하방 검천부 심무한이 기다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