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아마 6년, 아니구나… 벌써 7년이나 되었군. 난주표국을 막 창업했을 때였으니까. 섬서로 가는 표행길을 개척하던 중이었소.”
동사철은 수로를 이용해볼 생각으로 명란하에 배를 띄웠다가 급류와 암초에 부딪혀 배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뭍에 닿았다.
“세상과 단절된 절지(絶地)였소. 길을 찾아 헤매다 작은 마을을 만났소.”
무한은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나 고벽후는 아버지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무한은 자신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마을에서 심 부주와 비슷한 분을 뵈었소.”
동사철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심군하 대협이 섬서로 가다 실종됐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소. 하지만 심 대협을 만난 적이 없어 그분일 것이란 생각은 못했소.”
“만났다면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동사철이 약간 머뭇거리다 말했다.
“실은, 그분이 자신을 유수행(流水行)이라 하더이다. 게다가 그분은 무공을 모르는 민간인이었소.”
“……?”
동사철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으나 입을 닫았다.
무한은 내심 실망했다.
그저 닮은 사람일 수도 있다. 게다가 7년 전이라면 꽤 오래전 기억이다.
동사철이 말머리를 돌려 세우며 말했다.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범상치 않아 주의 깊게 봤던 기억이 있소. 그래서 말씀드리는 게요.”
“말씀, 감사합니다.”
무한이 포권을 하였다.
사실이든 아니든 빨리 가서 확인하고자 했다.
동사철이 말을 달려 표행의 뒤를 쫓아갔다.
무한도 말머리를 돌려 동사철이 가리킨 산으로 향했다.
***
“독왕이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당가주 시해 사건의 경위가 뒤집혔습니다.”
이군사 사필염의 보고에 군사부 수뇌부 회의실에 침묵만 흘렀다.
현고 장로의 고발로 무한을 무림공적으로 공표한 상황이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를 뒤집어야 하니 군사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됐다.
손우자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또다시 일이 어긋났다. 이상하게 무한과 얽힌 일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의 본능이 무한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무언가가 있어.’
자신이 놓친 게 무언지 곰곰 되새겼다.
생각해보면 산도를 비롯한 기인들이 검천부에 머물고 있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다.
게다가 드러난 무한의 무위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심양조의 안배라고 해도 예상 밖이야.’
손우자가 침묵을 지키자 일군사 공손승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가의 고발을 받아 발표한 것이니 굳이 해명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흑천을 방문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심무한을 잡아와 해명을 들어야 합니다.”
삼군사 문요가 맞장구쳤다.
무림공적으로 수배한 것을 유지하자는 뜻이다.
손우자는 군사들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이군사 사필염이 반대했다.
“흑천을 다녀왔다고 전향을 단정할 수는 없지요. 무림공적으로 지명수배 한 것은 해제해야 합니다.”
그 말에도 손우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순리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네. 공적으로 지목한 것은 철회하는 게 좋겠군. 대사를 앞두고 내분이 이는 건 좋지 않네.”
손우자가 결론을 짓자 모두 입을 닫았다.
“무력대 편성은 끝났는가?”
“섬서와 산서의 무력대들은 이미 감숙 경계선에 당도했습니다. 본방의 무력대는 현무대를 포함한 오대(五隊)가 출정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흑천을 상대하기 위해 백호대를 비롯한 오대(五隊) 역시 출발했습니다. 사천지부의 무력대와 도천부 이개 무력대까지 포함하면 팔백 명입니다.”
마천과의 전쟁을 맡은 일군사 공손승과 흑천을 상대하는 삼군사 문요가 각기 보고하였다.
이군사 사필염이 손우자에게 물었다.
“마천의 전력이 훨씬 강한데 흑천보다 인원을 적게 편성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손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천과의 싸움은 천하방만의 일이 아니네. 중원 무림이 모두 나서야 하는 일이지. 대파와 세가에 이미 동원령을 보냈네.”
손우자의 말에 군사들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스쳐갔다.
군사가 빛나는 순간은 전쟁터이다. 자신들의 진가를 발휘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니, 숙연함과 동시에 호기가 솟았다.
“공손승, 자네가 직접 감숙으로 가서 지휘하게. 대파와 세가에서 무력대를 보내면 누군가 통솔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어서 삼군사 문요에게도 직접 무력대를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사필염, 자네가 방에 남아 후방지원을 하게.”
“수석군사께서도 출정하실 생각이십니까?”
“대파와 세가 중에는 출정을 꺼리는 곳도 있을 것이네. 내가 직접 가서 설득을 해야 할 걸세.”
손우자가 말을 마치고 회의를 마쳤다.
군사들이 일어나 나가는데 손우자가 사필염에게 말했다.
“자네 밑에 강소소가 있지?”
“그렇습니다.”
“불러주게.”
사필염이 나가고, 잠시 후 강소소가 들어왔다.
수석군사의 집무실에는 처음 들어온 강소소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손우자가 천기자의 대제자이니 강소소에게는 사백이다.
“천무관 시절 심무한과 가까이 지냈다고 들었다.”
손우자가 운을 떼고 강소소를 살폈다.
“천무행을 같은 조에서 했을 뿐입니다.”
강소소가 선을 그었다.
지금 천하방에서 무한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흑천으로 전향했다는 소문과 당가주를 살해했다고 알려지며, 검천부를 방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장로들의 목소리가 높다.
“무한이 흑천을 찾아간 이유를 알고 있나?”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중입니다. 무한은 흑천의 접점이 없거든요. 아마도… 흑천과 당가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무한은 평화주의자거든요.”
“평화주의자라…….”
손우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강소소의 말에 뼈가 들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맹랑한 년이군.’
손우자가 강소소를 쳐다보다 문득 사부 천기자가 떠올랐다.
‘혹시 사부의 안배도 있었을까?’
그가 알기로 강유는 후견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하는 척했을 뿐이다.
강유가 왜 그랬는지는 손우자도 알고 있다.
만일 강유가 제대로 무한의 후견인 노릇을 하려 했다면, 아마도 무한은 지금쯤 세상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손우자만은 강유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강유도 손을 봐야겠구나.’
손우자는 무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악할 참이다.
“네 아버지가 지금 만현서고에 있나?”
“지금 업무시간이니 그러실 겁니다.”
“알았다. 나와 같이 만현서고로 가자.”
“예?”
“큰 전쟁이 코앞이다. 기천부도 준비해야 할 게 아니냐?”
손우자가 앞장서 만현서고로 갔다.
***
동사철의 말대로 명란하는 물살이 거세고 곳곳에 암초가 솟아 배가 다니기에는 위험한 길이었다.
특히 험준한 협곡을 통과하는 길은 곳곳에 소용돌이가 맴돌고 있어 제아무리 뛰어난 사공이라도 배를 몰기 어려웠다.
무한은 절벽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보며 난감해 하였다. 결국 말을 버리고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깎은 듯한 만장절벽은 어지간한 신법의 고수도 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간신히 절벽 위에 올라선 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능선이 이어지기를 기대했건만 칼날 같은 봉우리들만 눈에 들어왔다.
동사철이 세상과 단절된 마을이라고 한 말이 새삼 떠올랐다.
무한이 무명신법을 펼쳐 봉우리를 탔다. 절벽은 새처럼 날아 간신히 넘었다.
그렇게 명란하를 따라 없는 길을 만들어 가다보니 갑자기 절벽이 끊기고 아래로 커다란 분지가 나왔다.
절벽 위에서 보니 멀리 작은 마을이 있다.
무한의 가슴이 뛰었다.
어렵사리 절벽을 내려온 무한이 마을 쪽으로 향했다.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논밭이 나왔다.
야트막한 언덕 기슭을 따라 들어선 집들은 대략 이십여 호 정도 되어 보였다. 한가로운 농촌이었다.
수풀을 헤치며 가다 작은 길을 만났다. 길을 따라 가는데 양쪽 논밭에서 흙을 일구던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무한 쪽을 쳐다봤다.
무한이 그중 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는 무척 긴장한 듯 눈만 끔벅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예를 취하고 물었다.
“혹시 여기에 유수행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사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논에서 쟁기로 흙을 일구다 멈춰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아무리 멀어도 무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바람이 살짝 불자 아버지 심군하의 왼팔이 헐렁하게 흔들리는 게 아닌가. 팔을 잃은 게 분명했다.
무한이 침착하게 심군하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심군하는 가만 서서 자신을 향해 오는 무한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게 느껴진다.
이윽고 무한이 다가가 심군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아버지, 저 무한이 왔습니다.”
땅바닥을 짚은 무한의 두 손이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떨렸다.
심군하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대고 격동에 휩싸여 있는 무한을 잠시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라.”
무한이 일어나 아버지를 마주하였다.
심군하가 무한을 찬찬히 보다 말했다.
“내 아들이 맞는 것 같군. 그러나… 나는 네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
무한이 어리둥절해 하였다.
아들이 맞는데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따라 오거라.”
심군하가 쟁기를 끌던 소에게 다가가 멍에를 내리고, 소의 고삐를 잡아 끌고 마을로 향했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심군하의 모습에 무한이 말없이 따라갔다.
잠시 후, 마을 어귀 한 집에 이른 심군하가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음메에~.
예상보다 일찍 집에 돌아온 게 좋았는지 소가 알아서 외양간으로 갔다.
그러자 안에서 한 아이가 튀어나왔다.
“아빠, 저녁에 온다고…….”
아이는 심군하를 향해 달려오다 옆에 있는 무한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역시 심군하를 많이 닮았다.
무한도 아이와 심군하를 번갈아보았다.
뒤이어 한 여자가 나오다 무한을 보고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무한은 어찌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아버지를 찾다 백발이 된 어머니의 얼굴이 스치고, 천하방 검천부에서 외로이 자란 자신의 나날이 지나가고, 아들을 그리다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한의 표정이 냉랭하게 굳어지자 심군하가 말했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네 얼굴을 보니 나와 아주 닮았기에 아들이라는 걸 알 뿐, 나는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심군하의 말에 무한이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천심공을 쓸 필요도 없었다. 광명정대한 눈빛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졌다 싶었는데 기억을 잃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