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무한은 피전격의 말을 굳이 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자의 말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흑천의 후계자가 되는 걸 우려하더군요.”
“그렇겠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노조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진소향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쳐갔다.
“네가 천하방이 싫다면… 흑천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무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흑천도 해체해버릴 겁니다.”
“으음. 너는 대체 욕심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아버지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고자 하셨습니다.”
진소향이 흠칫하였다.
“마지막 상행… 상행을 떠나신다고 오셨을 때 제게 그랬지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녀온 뒤에는 내내 함께 할 거라고요.”
“네 아버지는 그게 문제였다. 모든 걸 가지고도 누리려 하지 않았지. 그러다 결국 허무하게…….”
진소향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무한은 진소향이 자신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이지만 흑월주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난폭한 흑도를 다스리던 강단을 새삼 느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해 흑월주의 자리를 내려놓은 걸 말하자 진소향이 밤의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한은 진소향의 백발을 보며 안타까워하였다.
“이제 아버지를 놓아 드릴 때가 됐습니다. 흑천으로 돌아가시지요. 난주는 곧 전쟁터가 될 겁니다.”
무한이 난주에 남아 진소향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흑천으로 돌아가기를 권하기 위함이었다.
“…….”
“피전격은 성정이 불안정하더군요. 그가 폭주하면 중원 무림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흥, 무림일통을 입에 달고 다니는 놈이니 그럴 수도 있지.”
“노조께서 동흥전을 비워둔 이유가 있을 겁니다.”
“…….”
“아버지는 마천과의 전쟁을 종식하고 무림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동분서주하셨지요. 어머니와 제가 그 뜻을 잇는다면 저세상에서라도 기뻐하실 겁니다.”
진소향은 시선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무한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었다.
심군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보낸 팔 년여 세월 동안 미련이 쌓이고 쌓여 집착이 되었다.
‘군하, 이제는 정말 당신을 보내야 할 때인가 보네요.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보내라고 해요.’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저려왔다.
진소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생각해보마.”
그러면서 무한을 보았다.
“네가 이리 크다니…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살아계신 거로 모든 게 다 풀렸습니다. 저만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면 정말 원망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밤의 정원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
험준한 산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나 있다.
감숙에서 섬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 길이 아니면 저 멀리 고원을 돌아가야 한다.
무한은 천천히 말을 몰아 길을 따라갔다.
아버지가 갔던 길이다.
이 길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아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무한은 아버지의 발자국이라도 찾으려는 듯 주위를 훑었다.
그때, 멀리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한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말을 달렸다.
잠시 후, 표행으로 보이는 일행과 마적들이 싸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한이 장내를 훑다가 짐마차에 꽂혀 있는 깃발을 보았다.
‘난주표국?’
그러고 보니 표사들을 지휘하며 마적을 상대하고 있는 이가 낯이 익었다.
‘국주가 직접 표행을 왔나?’
동사철이 직접 나설 만큼 중요한 표행이었던지 표사들 수도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마적 무리는 일백여 명이 넘었다.
표사들은 짐마차를 뒤로 하고 빙 둘러서 방어하고 있었고, 마적들이 주위를 뱅뱅 돌며 호시탐탐 표사들을 노렸다.
뒤쪽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말에 앉은 채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저자가 우두머리인가 보군.’
마적 우두머리의 옆에는 십여 명의 심복이 있었다.
무한이 싸움 현장에 이르자 마적 우두머리가 쳐다봤다.
이 길은 섬서로 가는 빠른 길이나 산세가 험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원을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러니 홀로 길을 가는 무한이 이채로웠던 것. 하지만 이내 관심이 떨어진 듯 옆에 있는 심복에게 말했다.
“저놈도 죽여라.”
옆에 있던 심복이 말고삐를 채어 튀어나왔다.
마적은 기세 좋게 달려오면서 말 잔등에 달아둔 칼집에서 칼을 뽑아 칼춤까지 추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마적이 무한의 목을 치려는 순간.
무한의 손이 허리춤을 스치자 비도가 날았다.
“으헉!”
마적이 갑자기 튀어나온 비도를 쳐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푹!
마적은 목에 칼이 박힌 채 말에서 떨어졌다.
“……!”
마적 우두머리가 놀라 옆에 있는 심복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네 명이 동시에 달려 왔다.
그러나 무한은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랴!”
말이 튀어나갔다.
무한은 네 명의 마적에게 둘러 싸여 고전하는 동사철을 향해 달려갔다.
동사철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달려오는 무한을 보았다. 그러나 좌우에서 도가 날아들어 반가워할 새도 없었다.
채챙!
도를 쳐내며 간신히 몸을 빼냈다.
마적들은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였기에 고수라는 동사철도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쌔애액!
무한이 말을 달리며 허리춤에 꽂은 비도를 던졌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비도가 동사철의 뒤를 노리는 마적의 뒷목에 꽂혔다.
“크윽!”
쉭, 쉭!
연달아 비도가 날고, 비도 하나에 마적 하나가 넘어갔다.
날아오는 화살도 피하는 마적들이 무한의 비도를 막지 못했다.
갑작스레 마적들이 우수수 쓰러지니 자연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무한을 뒤쫓아 온 마적들이 십 장 거리에서 말을 멈췄다.
무한은 표사 일행과 마적단 사이에 끼어든 형국이 됐다.
마적 우두머리가 말을 달려와 마적들 앞에 섰다.
“네놈은 누구길래 감히 혈풍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혈풍단?”
무한이 마적단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자 동사철이 끼어들었다.
“혈랑대와 더불어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마적단이오.”
그러면서 외쳤다.
“통행세를 내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표행을 통째로 노리면 관군이 나설 것이다.”
“흥! 관군 따위가 두렵다면 어찌 마적이라 할 수 있겠나?”
마적 우두머리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면서도 무한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강하보를 멸문시킨 마천 지옥곡의 고수들이 한 자루의 비도에 당해 죽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중이다.
“네가 생사비도라는 놈이냐?”
“생사비도?”
무한은 처음 듣는 자신의 별호다.
마적 우두머리의 외침에 동사철도 놀라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허리춤에서 비도를 빼어 들었다.
이제 비도는 세 자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 세 자루를 다 쓰면 너는 죽을 것이다!”
마적 우두머리가 옆에 있는 심복을 향해 눈짓을 하였다.
그 심복이 마적 셋을 지명하였다.
명령을 받은 마적들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말을 몰고 달려왔다. 거역하면 죽음이니 어떻게든 무한을 잡아야 한다.
쉭, 쉭, 쉭!
비도가 날아가고 어김없이 세 명의 마적이 목에 비도를 박은 채 황천길로 떠났다.
그러자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저 한 자루의 비도일 뿐인데 왜 피하거나 막지 못하는지, 보는 이들은 의아할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비도가 날면 죽는다!
칼을 맞대고 싸우는 것과는 또 다른 공포였다.
“으하하. 이제 네가 죽을 차례다! 너는 내가 직접 목을 따주마!”
마적 우두머리가 말채찍을 휘둘러 앞장서면서도 혹시나 하였는지 수하들에게 외쳤다.
“돌진하라. 다 짓밟아라.”
마적 우두머리가 칼춤을 추며 무한을 향해 달려왔다.
무한이 말에서 내려 천천히 쓰러진 마적에게 다가갔다.
달려오는 마적 우두머리의 시선이 쓰러진 마적의 목에 꽂힌 비도로 향했다.
이미 최대 속도로 말을 달리는 중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무한의 손에 비도가 들어가기 전에 칼을 박는 수밖에 없었다.
“이랴!”
마적 우두머리는 말 엉덩이를 마구 때리며 달려왔다.
무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 장여 거리에 쓰러져 있는 마적의 목에 꽂힌 비도를 잡았을 때, 마적 우두머리는 일 장 거리까지 다가왔다.
무한이 비도를 뽑자마자 바로 던졌다.
아무런 힘이 실리지 않은 동작이었고, 비도는 가볍게 날아올라 마적 우두머리에게 향했다.
“흥!”
마적 우두머리는 무한이 급한 나머지 비도에 힘을 싣지 못했다고 생각하고는 칼을 휘둘러 쳐내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비도가 폭사되어 왔다.
쌔애액!
무한의 반탄강기에 튕긴 비도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마적 우두머리의 목에 꽂혔다.
“컥!”
마적 우두머리의 눈에 불신과 공포가 어렸다. 이어서 거대한 체구가 말에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광포한 기세를 부리던 마적 우두머리로서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무한의 시선이 땅에 떨어진 마적 우두머리에게 향했다.
마적 우두머리는 자신이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무한 쪽을 바라보고 죽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억울한 시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한은 내심 씁쓸하였다.
장렬하게 싸우다 죽거나 한 자루 비도에 허무하게 당하거나, 죽음은 동일하다.
무한이 시선을 거두어 마적들을 바라보았다.
마적들이 움찔하더니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동사철이 다가와 포권을 하였다.
“번번이 심 부주의 도움을 받는구려.”
동사철의 말투가 정중해졌다.
“강호동도로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피해가 컸을 듯합니다.”
동사철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표사 서넛이 죽고 십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마적들도 적당히 통행세를 쥐어주면 길을 열어주는데, 오늘은 작정하고 온 듯하구려.”
“노리는 표물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동사철은 말없이 표마차를 둘러보았다.
표물에 대한 건 비밀이니 무한도 더 묻지 않았다.
“일단 수습부터 해야겠소.”
동사철이 표두들에게 가서 지시를 하자 표두들이 죽은 표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표마차를 단속하였다.
잠시 후 동사철이 돌아와 말했다.
“이 길은 섬서로 가는 길인데 함께 가시겠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곳을 좀 돌아다니다 가려 합니다. 먼저 가시지요.”
동사철이 의아한 눈빛으로 무한을 보다 예를 취하고 표마차 선두에 섰다.
무한이 쓰러진 마적들의 목에서 비도를 수습하고 말에 올랐을 때 길을 돌려 달려오는 동사철이 보였다.
무한이 잠시 기다리자 동사철이 다가와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전에 내가 우리 안면이 있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지 않았소?”
객잔에서 동사철이 처음 보는 무한에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냐고 했었다.
“생각났소. 부주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소. 나이는 훨씬 중년이었지만… 부주가 나이 들면 딱 그 모습이 되었을 게요.”
“……!”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이 길을 가다보니 그때 일이 떠올랐소.”
무한이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분을 여기서 만났다는 겁니까?”
“그렇소.”
동사철이 높은 산을 가리켰다.
“저 산 아래 명란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소. 강을 따라가다 보면 분지가 나오는데 육로로는 가지 못하는 곳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