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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32화 (132/250)

132화

당현모가 확인이라도 하듯 재차 흑천 전향을 거론하며 무한을 유심히 보았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한이 돌려 대답했다.

“좋아. 자네를 믿기로 하지. 하지만 피전격의 제의는 생각해봐야겠네. 그자는 믿을 수 없는 자야.”

당현모는 고강후가 보내온 서찰을 들더니 주욱, 찢었다.

“당가 장로들과 젊은 무인들은 당장이라도 전면전을 벌이자고 주장하고 있네. 그들은 내가 흑천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

“제가 보기에 가주께서는 누구를 두려워할 분이 아닙니다.”

당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네.”

“그게 뭡니까?”

“자네, 만독곡을 아는가?”

무한은 지난번에 남궁우가 만독곡을 거론한 걸 떠올렸다.

“듣기는 했지만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정마대전으로 무림이 혼란스러울 때 만독곡은 사람의 이지를 조종하는 약을 만들었네. 다행히 초기에 이 사실을 안 독왕께서 본가의 무인을 이끌고 만독곡을 궤멸시키셨지.”

“사람의 이지를 조종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마천의 실혼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걸세.”

무한은 당가로 오는 도중 싸웠던 괴인들을 떠올렸다.

“혹시 만독곡이 다시 발호하고 있습니까?”

“확실치는 않네. 당시 만독곡주와 곡인들 대다수가 죽었지. 하지만 몇몇은 살아 도주했을 수도 있지 않았겠나?”

당현모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만독곡 지하에 있는 비밀공간이라네. 정황상 이지를 조종하는 약물이나 비법이 숨겨져 있을 걸세.”

“모두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만독곡주가 죽으면서 비밀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폭파했다네. 그러니 땅속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 뿐이지.”

무한이 잠시 생각했다.

‘만독곡은 독왕이 폐관수련 중인 곳이다. 하필 왜 그곳을 택했을까?’

짐작이 갔다.

“독왕께서는 만독곡의 비밀공간을 지키고 계시는 거로군요. 어딘가 다른 통로가 있고, 만독곡 후인들이 이를 통해 비밀공간에 접근하려는 걸 막으려는 것 아닙니까?”

당현모가 약간 놀라 무한을 보았다. 몇 마디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정황을 꿰뚫어보다니. 내심 감탄하며 말했다.

“그렇다네. 그동안 잠잠하기에 만독곡의 후인들이 포기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번에 소가주 일행을 습격한 자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네.”

당현모가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소가주에게 들은 바로는 이번에 나온 이들은 단순히 이지를 상실한 정도였더군. 예전 만독곡은 그보다 훨씬 강한 괴인들을 만들었지. 그 비법이나 약재가 비밀창고에 있을 거라 보네.”

무한은 손우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당현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소가주로부터 자네가 손우자를 의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놀랐네. 현전 장로를 암살한 배후가 소가주를 노린 자와 동일인이라면, 손우자가 만독곡의 후인이라는 뜻이니까.”

“습격한 자가 죽으며 손우자의 본명을 일러주었습니다. 오경연이라더군요. 만독곡 수뇌부에 오씨 성을 지닌 자가 있었습니까?”

당현모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보지 못했네. 만독곡주는 표씨였네. 수뇌부에도 오씨가 있었던 기억은 없네만… 내가 모르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 탄식을 하였다.

“만독곡의 후인이라면 당연히 당가를 노리겠지. 자신들과 상극이니까. 내가 주저하는 게 이 때문일세. 당가의 진정한 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흑천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당현모는 갈등을 하고 있었다.

흑천과 싸우자는 내부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이대로 밀리기만 한다면 오대세가 일원인 당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테니까.

“아무튼 피전격이 화친을 제의해왔으니…….”

말을 이어가던 당현모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들어보니 현고 장로가 가주를 만나야겠다고 하고, 소가주 당전수가 이를 막는 중이다.

당현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했는데?”

“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가주.”

현고 장로는 물러나지 않았다.

당현모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들어오시게.”

외인 앞에서 장로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지 당현모가 못마땅해 하면서도 현고 장로를 들였다.

현고 장로의 손에 투명한 유리병이 있었다. 그가 무한을 보며 말했다.

“잠시 외인은 물려주시지요.”

무한이 현고 장로를 주시했다.

현고 장로는 침착을 가장하고 있으나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그때 당현모가 무한에게 일렀다.

“마저 할 얘기가 있으니 옆방에서 잠시 기다려주겠나.”

무한은 내키지 않았으나 당가의 일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무한이 옆방으로 건너왔다.

두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운을 퍼뜨려 움직임을 면밀히 감지하였다.

현고 장로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대체 그게 뭔데…….”

퍽, 하며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당현모가 묻는 목소리가 뚝, 끊겼다.

“크윽!”

비명성이 터지자 무한이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현고 장로가 당현모의 복부에 비수를 꽂고는 비트는 중이다.

당현모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설마 당가 한복판에서 가주를 시해하는 광경을 볼 줄 상상도 못 한 무한이 잠시 멈칫했는데, 현고 장로가 고함을 질렀다.

“심무한이 가주를 시해하였다!”

그러고는 몸을 던져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무한이 황급히 당현모를 부축하였다.

“크으으…….”

당현모가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자신의 심장 주위 요혈을 짚었다. 무한도 비수를 뽑고 복부 주위 요혈을 짚어 주었다.

그사이 당전수와 무사들이 뛰어들었다.

“아버지!”

당전수의 눈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와 비수를 들고 있는 무한이 들어왔다.

“심무한!”

당전수가 눈이 휙, 돌아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무한이 천정을 향해 소리쳤다.

“무흔! 소가주를 제압해요!”

순간 천정에 무흔이 떨어져 당전수의 마혈을 짚었다.

무사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왔으나 가주와 소가주가 잡히자 칼을 앞세울 뿐 달려들지 못했다.

그때 바깥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당현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천부주 심무한이 가주를 해쳤다!”

동시에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운이 느껴졌다.

“크으으…….”

당현모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말했다.

“나는 틀렸네. 소가주를 구해주…….”

“말씀하지 마십시오. 상처가 크지 않습니다.”

당가주 정도 되는 이가 복부를 찔렸다고 바로 죽을 리가 없다.

“아, 아니… 쌍인고(雙因蠱)에 당했네. 나는 가망 없어…….”

쌍인고?

할아버지가 천일고에 당한 이후 고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무한은 대번 안색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왜 당현모가 비수를 맞은 복부가 아니라 심장 요혈을 봉쇄했는지 알았다.

쌍인고는 한 쌍의 벌레를 뜻한다. 대개 암놈이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들어가 심장에 머물면서 신선한 피를 먹으며 산다.

운남에서는 쌍인고 암수 두 마리 중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따라 죽는 습성을 이용해 감쪽같이 사람을 죽일 때 쓴다.

‘그게 수놈이었나?’

당현고가 들어올 때 손에 쥐고 있던 투명한 병이 떠올랐다.

쌍인고가 서로를 감지하는 범위는 일 장 거리. 그 안에서 터뜨려 죽여야 했기에 가까이 접근했으리라.

무한이 들었던 퍽 하는 소리는 수놈이 든 병이 깨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수놈이 죽는 동시에 심장에 있던 암놈이 터지면서 심장에 독이 퍼졌을 터이니, 당가주라 해도 꼼짝없이 비수를 맞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대번 상황을 파악한 무한이 당현모의 수혈을 짚곤, 무흔에게 일렀다.

“소가주를 데리고 따라와요.”

바깥에 수많은 기운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일단 피신하는 게 급선무였다.

무한이 당전수를 따라 들어온 무사들을 향해 말했다.

“가주께서 한 말은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당신들은 다 죽습니다. 그냥 내가 소가주를 납치하여 도주한 것으로 보고하세요.”

그 말에 무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당전수의 호위들이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자신들도 위험한 처지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당현모를 업고 그대로 허공으로 솟았다.

콰앙!

천정이 터져 나가며 무한이 지붕에 올라섰다.

사방이 횃불의 바다다.

무한은 가장 수가 적은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이어 당전수를 안은 무흔이 지붕에 올라섰다가 무한을 따라갔다.

천하방을 떠난 무흔은 부상당한 연이설을 한적한 마을로 데려갔다.

며칠간 정양을 한 끝에 연이설이 기운을 차리자 흑천으로 돌아가라 이른 뒤 당가로 왔다. 무한이 당가로 향했으니 거기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무한이 자신의 곁을 떠나라 했으나 무흔은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

흑월주 진소향이 무흔에게 내린 명은 무한을 암중에서 호위하란 것이었고, 이는 무한의 명에 우선하는 거라 생각했다.

무한이 당가로 오는 도중 실종됐다는 말에 찾아 나서려다 연이설이 급하게 보낸 밀서를 받고 그대로 당가타에 숨어 기다렸다.

당주호가 쇄골수로 무한을 죽이려 할 때, 무한의 천목혈에 자극을 보낸 이가 무흔이다.

유령 같은 경신으로 앞서가는 무한을 보는 무흔의 눈빛이 깊었다.

조금 전 무한이 자신을 불러 소가주를 제압하라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있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못 보던 사이에 무공이 일취월장하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은 지붕 위를 질주하였다.

“멈춰라!”

사방에서 고함이 터지며 비수와 쇠뇌가 날아들고, 지붕 위로 올라서 길을 막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무한의 무명신법은 이제 그야말로 노화순청에 달했다.

앞을 막아서도 한 줄기 묵빛이 되어 스쳐 가니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당가타를 벗어난 무한은 산속을 질주하다 지형을 살폈다. 그러곤 가까운 산을 올라 중턱 부근에 있는 동굴을 찾아냈다.

작은 동굴이었으나 바람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무한이 당가주 당현모를 동굴 벽에 기대어 앉혔다.

이어 무흔이 들어오더니 당전수를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무한과 무흔.

두 사람은 지난 팔 년여 세월을 함께 하였기에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무흔은 동굴 바깥에서 산 아래쪽을 응시하였다.

아직 한밤중이기에 저 멀리서 우왕좌왕하는 횃불이 보였다.

- 쫓는 이는 없습니다.

무흔이 동굴 안 무한에게 전음을 날렸다.

다시 돌아온 무흔은 무한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자신이 흑천 사람인 걸 알고도 연이설과 함께 보내준 무한을 진심으로 따를 생각이다.

“……!”

마혈이 짚인 당전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연신 아버지를 살폈다.

무한이 깊은 탄식을 하고는 말했다.

“흉수는 내가 아니야. 현고 장로가 한 짓이지. 마혈을 풀어줄 테니 흥분하지 마.”

당전수는 거실로 뛰어들었을 때 본 광경에 이성을 잃었다가 곧바로 아버지 당현모와 무한의 대화를 들었다.

무한이 마혈을 풀어주자 황급히 당현모에 다가가 오열을 하였다.

“아버지…….”

무한이 기운을 풀어 당현모의 몸을 살폈다.

심장의 움직임이 극히 미약하였다.

무한은 당현모의 수혈부터 먼저 풀어주었다.

“으음.”

당현모가 심장과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무한은 그의 등 뒤로 가서 기운을 불어넣어주며 상태를 살폈다.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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