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왜소하지만 단단한 체구를 지닌 장년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뒤로 횃불을 든 당가의 무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냉혹해 보이는 인상의 장년인을 보자 당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현고 장로를 뵙습니다.”
당현고가 나타나자 당주호가 결연하게 외쳤다.
“죽여라. 내가 한 짓은 내가 책임지겠다!”
방금 무한이 검을 목에 댔을 때 하얗게 질렸던 당주호가 갑자기 호기롭게 외치자 무한은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현고가 그런 당주호를 흘깃 보고는 무한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검천부주인가?”
무한이 검을 거꾸로 쥐고 가볍게 포권을 하며 예를 취했다.
“검천부주 심무한입니다. 지금은 천하방 특임감찰로 왔습니다. 당현고 장로를 뵙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몰라도 검은 일단 거둬야 하지 않겠나. 당가타에서 당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네.”
무한은 두말하지 않고 검을 휙, 던졌다.
검은 허공에서 몇 바퀴 돌다가 당주호의 옆에 꽂혔다. 당주호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무한이 당현고를 향해 말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당가에 왔으면 당가의 가법을 따라야겠지요.”
무한이 대범하게 당주호를 풀어주자 오히려 당현고가 머쓱해하였다. 당현고가 무사들에게 일렀다.
“데려가서 연금해둬라.”
그러자 무한이 막았다.
“……다만, 무슨 이유로 저를 암살하려 했는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암살이라니?”
무한이 침실을 가리켰다.
“무슨 독인지 몰라도 자다가 죽을 뻔했지요. 과연 당가의 독은 명불허전이더군요. 확인해보시지요.”
당현고가 옆에 있는 무사에게 말했다.
“가서 확인해봐라.”
무사가 들어갔다 나오더니 당현고에게 고했다.
“쇄골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당현고가 당주호에게 물었다.
“네가 검천부주를 암살하려 했느냐?”
당주호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현전 장로께서 천하방 한복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당가에서 천하방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현고가 당주호에게 다가가더니 뺨을 후려쳤다.
“네 이놈! 검천부주는 현전 장로를 시해한 흉수를 잡은 이다. 어찌 이리 앞뒤 가리지 못하고 경솔하게 구는 것이냐?”
당현고가 무사들에게 재차 일렀다.
“이놈을 뇌옥에 처박아라.”
그러고는 무한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본 장로가 대신하여 사과하겠소. 젊은 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으나 죄를 지었으니 엄벌을 할 것이오.”
무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주호를 잡자마자 당현고 장로가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한의 무공을 과소평가했다가 당주호가 잡히자 급히 신병을 인수하려는 속셈이다. 이는 당현고도 오늘 밤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무한이 오자마자 독수를 쓴 걸 보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일 테고.
당주호를 내세워 현전 장로의 죽음을 비난하고, 바로 그날 밤에 독수를 써서 무한을 죽인 후… 젊은 혈기를 누르지 못한 당주호 단독범행이라며 적당히 처리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상치 못한 건 무한의 무공이었다.
‘장로가 개입했다면… 가주의 뜻일 가능성도 있겠군.’
애초에 당가로 온 이유가 흑천과의 접점을 만들어 자신의 출생에 관한 정황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뜻하지 않게 일이 쉽게 풀렸기에 굳이 당가를 찾을 이유는 없었지만, 피전격의 제의가 있어 와야 했다.
무한으로서는 현재 전선을 고착화하고 흑천의 영역으로 삼겠다는 피전격의 제의를 당가에서 어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당가에서 피전격의 제의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냥 떠날까?’
당가에서 자신을 적대시한다면 굳이 도울 이유가 없다.
당현전 장로의 흉수와 배후 손우자에 대해서는 당전수에 일러주었으니 약속은 지킨 셈이다.
하지만…….
‘당가와 흑천의 갈등이 지속되는 건 손우자가 바라는 바다.’
손우자는 당가와 흑천의 싸움을 부추긴 후 다음 수순을 밟을 것이다.
정확히 무얼 노리는지는 몰라도 막아야 한다.
‘가주를 만나 그의 의중을 확인하고 떠나도 늦지 않을 거야.’
무한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대문 쪽이 소란스럽더니 당전수가 무사들과 함께 몰려왔다.
당주호가 무한을 암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당주호! 감히 내 손님에게 독수를 써!”
격분한 당전수가 무사들에게 부축을 받고 나가는 당주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갈겼다.
퍼억!
갑작스런 당전수의 주먹질에 당주호는 막지 못하고 그대로 턱을 맞았다.
“소가주! 이게 무슨 짓이오! 외인이 있는 데서 일가 손윗사람을 때리다니!”
당현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제지하고 나섰다.
당전수가 당현고를 향해 말했다.
“현고 장로야말로 이 자리에 어찌 계시는 겁니까? 소가주의 귀빈에게 독수를 쓴 자를 비호하는 겁니까?”
“어허! 소가주!”
듣기에 따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에 당현고가 목소리를 높였다.
당전수는 소가주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어려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렇기에 장로나 방계 손윗사람들이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당전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대드니 당현고가 괘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주호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사실 본가에서 의기 있는 자 치고 천하방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는 이가 없네.”
“그래서 쇄골수를 써서 제 의형을 죽이려 했습니까?”
당전수의 입에서 의형이라는 말이 나오자 당현고는 물론이고 무한도 내심 놀랐다.
어느 순간부터 형이라 부르더니 이제 의형제란다.
“검천부주가 소가주의 의형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네. 당가 사람이 당했는데 묵과하고 넘어가면 천하가 손가락질 할 것이야.”
그때, 엄준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현고 장로의 말이 맞다. 허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문으로 향했다.
짙은 녹빛 장포를 입은 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쓴 관모에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은 다름 아닌 당대 당가의 가주, 당현모였다.
“그 상대를 가리지 못하고 날뛰면, 오히려 세간에서 당가는 혈기만 앞세울 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다고 욕을 할 것이오.”
당 가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당현고가 얼굴을 붉혔다.
당 가주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사리분별을 못한다고……?’
가주가 대놓고 장로를 비난한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알아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수치와 모욕감을 느꼈다.
“가주께서 이 밤에 어인 일로…….”
“소가주의 의형이 당가타에서 암습을 당했다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소.”
당 가주의 시선이 당주호를 향했다.
“내가 늘 충고하지 않았더냐? 앞뒤를 가려 행동하라고 말이다. 네놈이 저지른 일은 너뿐만이 아니라 당가 모두가 책임져야 할 일이 되었다.”
가주의 말에 당주호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네 목숨은 검천부주에게 맡기겠다.”
당 가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무한에게 향했다.
“내일 만날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이 밤에 만나게 됐군. 내가 당현모일세.”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가주를 뵙습니다.”
당현모는 오대세가의 가주답게 전신에 위엄이 흘렀다. 두 눈은 형형한 빛이 흘렀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낮추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무한을 보는 당 가주의 시선이 어느 순간 부드러워졌다.
“자네 덕분에 소가주가 목숨을 건졌다더군.”
오는 도중 습격 받은 사실을 언급한 당 가주가 시선을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주호는 옥에 가둬두고 검천부주의 명에 따라 처리하라. 나머지는 가서 경계를 마저 서라.”
“가, 가주… 일족의 목숨을 어찌 외인에게…….”
“독수를 썼다는 건 실패했을 때 상대에게 목숨을 내놓겠다는 뜻 아닌가?”
당가주가 냉랭한 어조로 당현고의 말을 자르고는 무한에게 말했다.
“부주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나?”
당 가주가 먼저 무한이 묵는 별원으로 들어갔다.
당전수가 따라 들어가려는 걸 당 가주가 막았다.
“너는 밖에 있거라.”
무한과 독대하겠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별원 다실에 무한이 당 가주와 마주 앉았다.
오대세가의 가주는 남궁무룡에 이어 두 번째였다. 당현모와 남궁무룡은 기질이 완연히 달랐다.
남궁무룡이 온화한 서생이라면 당현모는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자였다.
“현전 장로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들었네.”
당현모의 침중한 표정을 보니 아마도 배후에 손우자가 있다는 것도 들은 듯했다.
“천하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가는 개의치 않네. 하지만 장로가 죽고, 많은 무사들이 죽었네. 심지어 소가주마저 당할 뻔 했어.”
당현모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런데도 천하방이란 곳은…… 책임을 묻기 어렵지. 그 이유를 아는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문파가 모인 천하방이다. 각 문파마다 독자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달이 났을 때 천하방 차원에서 책임을 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천하방이 온갖 이권은 누리면서 그런 식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 걸 못마땅히 여겨왔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차차 알게 될 걸세. 우선 묻고 싶은 게 있네.”
당현모가 소매에서 서찰 두 통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천하방에서 몇 가지 제의가 왔네.”
하나는 도천부 고강후가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부 명의였다.
무한은 가만 볼 뿐 열지 않았다.
“도천부 고강후는 함께 연대하여 흑천을 치자고 하더군. 아들 고우가 죽었으니 당연한 행보겠지.”
당현모가 두 번째 서찰을 손가락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군사부에서 보낸 이 밀서지.”
당현모가 밀서를 쓰윽, 밀었다. 열어보라는 뜻이다.
무한이 밀서를 열어 읽었다.
“…….”
“자네가 흑천에 귀의했을 가능성과 함께 당가에게 모종의 제의를 해올 것이라는 내용이지.”
밀서의 내용은 당현모가 한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 당가에서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당현모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밀서를 받았을 때 고민을 했던 게 사실이네. 누가 믿을 수 있겠나? 천하제일인의 손자가 흑천으로 전향하다니. 하지만 천하방 군사부가 당가에게 허튼소리를 할 리 또한 없지.”
밀서를 받은 당 가주가 고민한 것은 소가주 당전수가 무한을 의형이라 하며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소가주를 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밀서를 보낸 이의 의도대로 행동했을지도 모르지.”
당현모는 무한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봤다.
“그래서 자네의 해명부터 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향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사천주 피전격의 제의를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당현모의 안색이 굳었다.
“피전격의 제의?”
“그가 제의한 것은 현재 전선을 경계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것입니다.”
“화친을 맺자는 건가?”
당현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들었다.
“그가 그런 제의를 하는 이유가 뭔가?”
“그건 저 때문입니다.”
“자네 때문이라고?”
당현모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무한 때문에 흑천이 진격을 멈춘다고?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그래도 이 밀서를 믿으십니까?”
당현모다 밀서를 보다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데 말이지. 군사부라고만 되어 있지 누가 보냈다는 명의가 없더군.”
역시 당현모는 만만치 않은 자였다. 이미 밀서의 내용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향에 대한 소문이 나돈 건 확실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