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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21화 (121/250)

121화

진복을 따라 흑천전을 나와 동쪽으로 조금 걷자 커다란 대전이 나왔다.

흑천전에 비해 손색이 있다지만 무척 널따란 광장을 지닌 이층 전각이다.

무한은 살짝 놀랐다.

“여기가 맞습니까?”

“예. 여기가 동흥전입니다. 흑천전을 가운데 두고 동흥전과 서패전(西覇殿)이 날개처럼 펼쳐져 있지요.”

묻지도 않았는데 동흥전의 의미까지 설명했다.

“이런 큰 전각이 왜 비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예전에는 흑월전이라 불렀지요.”

‘아!’

자신과 무관한 사이라면서도 흑천노조가 어머니의 전각을 내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복이 말했다.

“근 이십 년 만에 동흥전에 사람이 드는군요.”

진복의 어조는 의미심장했다.

무한은 진복이 어머니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허튼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흑천노조의 수발을 드는 것이겠지.’

흑천전과 달리 동흥전은 돌보는 하인들이 여럿 있었다. 진복이 나타나자 모두 나와 도열하였다.

“당분간 여기 묵으실 손님이시다.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진복의 말에 하인들이 무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한이 대청을 둘러보는 사이 진복이 하인 중 나이가 있는 이에게 뭔가를 지시하였다.

이윽고 진복이 무한을 향해 목례를 하였다.

“그럼 편히 쉬시지요.”

진복이 가자 아직 앳된 시비가 다가와 무릎을 살짝 숙여 인사를 하며 말했다.

“소녀 수수라고 합니다. 침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침전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딸린 방이 많았다.

기름을 먹인 기둥과 문틀에 먼지 하나 없는 것이 그동안 비어 있던 집 같지가 않았다.

시비들이 줄줄이 들어와 침전 옆방의 욕조에 물을 부었다.

“목욕을 하시지요. 새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마치 잠시 외출 나갔다 돌아온 주인을 대하듯 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창가에 놓인 고급스런 자단목 탁자에 술과 간단한 안주가 놓여 있었다.

시비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밖에서 대기 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세심한 시중이었다.

“밤이 늦었으니 모두 가서 쉬게.”

무한이 말하자 사르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비들이 사라졌다.

무한은 술을 따라 마시며 흑수애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강이 보이고, 선착장 부근 술집거리는 여전히 흥청거린다.

무한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흑천노조와 마주칠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흑천도들조차 존재 여부가 궁금하다고 할 정도로 칩거하고 있는 흑천노조다.

흑천전을 살피러 간 것뿐인데 바로 마주칠 줄이야.

더 놀라운 건 흑천노조였다.

무한이 핏줄이라지만 흑천노조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무한이 천하방 검천부주라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처음 보는 외손자이건만, 천심공에 대한 이야기만 몇 마디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묵었다 가라는 말뿐.

대범한 건지 무관심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천하 흑도를 품을 수 있었겠지.’

동시에 동흥전을 내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흑천노조는 자신의 딸이 거처하던 동흥전을 내줌으로써 어떤 위상의 손님인지 확실히 알린 것이다.

‘어쩌면…….’

무한에게 흑천에 남으라는 무언의 제의일 수도 있다.

무한은 차분히 자신의 상황을 되새겼다.

적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략적으로 혼인을 한 게 아님은 확실해졌다.

흑천노조가 자신의 딸과 인연을 끊었다고 굳이 말한 이유는, 인정하지 않은 혼인이자 흑천과 무관하였음을 밝힌 것이다.

어머니 단독으로 의도한 바일 수도 있으나, 어린 시절 기억을 지닌 무한은 그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평소 냉랭했던 어머니지만 아버지가 와 있을 때는 표정부터가 달랐던 것을 무한은 기억하고 있다.

찜찜했던 문제가 해결되자 무한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복수 그리고 천하방 해체…….’

최초의 목표가 다시 선명해졌다.

천하방의 내부를 알면 알수록 천하방을 해체해야 할 이유가 뚜렷해졌다.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사라졌다.

그렇다면 감숙으로 가지 않았을까?

무한은 감숙을 떠올렸다.

어머니 혼자서 거친 변방을 전전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마음이 저렸다.

‘어머니는 흑월주였다고 했어. 나약한 분이 아니야.’

속으로 되뇌며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지금은 손우자를 상대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손우자가 원하는 바는 분명하다.

천하방과 마천, 흑천 간의 전쟁.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손우자는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

잔노나 환노가 데려온 괴인들은 몇 년 만에 길러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약에 절어 이지를 상실한 자들.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지면 무림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을 막아야 해.’

무한의 머릿속에 승룡대와 현무대가 처참하게 죽어나갔던 전장이 떠올랐다.

전쟁을 원하는 자와 그로 인해 죽는 자.

온갖 명분을 내세워도 죽어가는 자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

‘손우자…… 뒤에 누가 있는 게냐?’

손우자 단독행동인지, 아니면 누군가와 손을 잡았는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캐다보면 줄줄이 나올 것이다.

‘그중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할아버지에게 독을 쓴 자가 있겠지.’

무한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마친 무한이 동흥전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전각과 편전, 뒤에 있는 내전과 별원이 딸린 대장원이다.

그러다 보니 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여기저기 보수해야 할 곳도 눈에 뜨였다.

동흥전을 돌아본 무한이 대문을 나서자 호위 넷이 따라붙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호위들은 무한이 어디를 가는지 묻지 않았다.

무한은 전각공사 현장으로 갔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우이친이 고초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예상대로 공사장 인부 몇몇이 숙소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뒤로 나머지 인부들이 서 있었다.

감독관으로 보이는 이가 몽둥이를 휘휘 흔들며 호통을 쳤다.

“사람이 사라졌는데 몰랐다고? 그게 말이 되나?”

가만 보니 어젯밤 야간근무 대신 숙소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다.

엉뚱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시만.”

감독관이 돌아보니 낯선 귀공자가 호위와 함께 서 있다.

하루 사이에 용모가 완전히 달라졌기에 감독관은 무한을 알아보지 못했다.

“뉘신지?”

“어젯밤 사라진 인부를 찾는 건가?”

“아…….”

감독관이 당황해하였다.

인부로 온 놈이 사라졌으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다.

그래서 쉬쉬, 하고 인부들을 닦달하고 있는데 못 보던 귀공자가 와서 사실을 물으니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모르겠나?”

무한의 물음에 짧은 순간, 감독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전각 공사를 하는 천한 신분이라 흑천의 높은 분들을 뵐 기회가 없어…….”

감독관은 여전히 무한을 사라진 젊은 인부와 연결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부들 속에 섞여 있던 우이친은 무한을 알아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렇잖아도 무한이 사라진 바람에 내심 초조해 하던 차였다.

무슨 해코지를 당한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귀공자로 변신하여 나타나니 어리둥절했다.

무한도 무리를 살피다 우이친이 자신을 보고 뭐라 하려는 걸 봤다.

- 지금은 그냥 있어.

귀에 울리는 전음에 우이친이 깜짝 놀랐다. 무한이 무림인일 거라는 건 상상 못 했다.

“내가 어제 사라진 인부요. 사정이 있어서 신분을 위장하고 들어왔던 것이오.”

무한이 사실대로 말했다.

무한을 따라온 호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할 뿐이다.

“아, 그렇군요.”

감독관이 호위들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일하러 온 사람에 불과하니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다. 다만, 눈앞의 귀공자가 흑천의 고위인사라고만 생각했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넘어갔으면 하오.”

“알겠습니다.”

감독관도 공사를 위해 외부에서 온 사람에 불과하다. 흑천 내부의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돌아서려던 무한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인부 몇 명만 데려갈 수 있을까?”

“예?”

“내가 머무는 거처에 보수가 좀 필요한 곳이 있더군. 목수와 인부 서너 명 정도면 될 것 같네만.”

감독관이 난처해하는데 무한을 따라온 호위가 눈알을 부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시죠.”

“인부는…… 입이 무거운 자여야 하니 내가 고르지.”

무한이 우이친과 그 옆의 사내 셋을 골랐다.

감독관은 울상을 지었다.

공기가 급해 야간작업까지 하는 판국에 다른 공사를 하러 가야 하다니.

그런데 무한이 호위에게 말했다.

“여기 공사현장에 사람을 더 지원해줄 수 있겠나?”

진복으로부터 무한을 최고위층에 준해 대우하라는 말을 들은 호위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무한은 감독관과 우이친 등을 데리고 동흥전으로 돌아와 손 볼 곳을 일러주었다.

“잠시 머무는 곳이지만 왠지 눈에 거슬리는군. 완벽하게 보수할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감독관이 연신 허리를 굽혔다.

흑천에서도 중지(重地)라는 동흥전 보수를 맡았으니 보수는 확실히 쳐줄 게 분명했다.

손님의 신분으로 전각 보수공사까지 지시하였으나 동흥전 하인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시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으신지요.”

수수가 점심식사를 뭘로 할 거냐고 물었다. 마치 동흥전의 주인을 대하는 듯했다.

이쯤 되자 무한도 진복이 자신을 뭐라고 소개했는지 궁금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저 잘 모시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수수의 눈빛은 말과 달리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역시…….’

진복은 무한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하인들에게도 주지시킨 게 분명했다. 동시에 입단속까지 하였으니 진복은 권한이 생각 이상인 듯했다.

무한이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 수수가 와서 고했다.

“서패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게.”

식사를 마저 마친 후 무한은 동흥전 빈청으로 갔다.

빈청에는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을 한 중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을 본 중년인, 사뇌 납득이 가져온 배첩을 건넸다.

“서패전주의 초청장입니다.”

무한이 배첩을 열어본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패전주가 나를 아오?”

무한은 흑천에 들어온 이후 줄곧 하대를 하였다. 천하방 검천부주의 신분으로 흑천의 인물을 존대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역시 검천부주가 맞군.’

긴가민가했던 납득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간밤에 이십 년 간 비어 있던 동흥전에 외부 손님이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손님방이 아닌 주인의 침전을 쓴다는 말에 신원을 파악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간신히 아직 약관이 넘지 않은 손님의 용모를 알아냈을 때 직감적으로 검천부주를 떠올렸다.

납득은 중경에서 실종된 검천부주를 백방으로 추적하는 중이었다.

혈사대주를 통해 무한이 원단이후 스스로 찾아오겠노라 한 말을 들었지만, 믿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흑천의 심처 중 심처인 동흥전에 들다니.

‘대체 검천부주가 무슨 연유로 동흥전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흑천노조의 명이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납득은 날이 새자마자 서패전주이자 사사천주 피전격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당장 가서 만나야겠다는 피전격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초청장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서패전주께서 사사천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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