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20화 (120/250)

120화

아무것도 모르는 우이친이 익숙한 걸음으로 무한을 배로 이끌었다.

배는 백여 명의 인부를 태우고 흑천관 부두를 떠났다.

반 시진 정도 가자 검은 절벽이 연이어 나오다 갑자기 탁 트인 만이 보였다.

만 안쪽 평지는 무척이나 넓었는데 무수한 전각이 들어차 있었다.

높은 절벽이 삼면을 두르고 있어 바닷길이 아니면 대규모 침공이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흑수애를 살피던 무한의 눈이 가장 뒤편에 있는 커다란 전각을 향했다.

‘저기가 흑천노조의 전각이겠군.’

삼층에 이르는 거대한 전각이 마치 천하대전을 방불케 한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우이친이 다가오며 물었다.

“사람이 꽤 많이 사나본데 밖에서 일꾼을 데려올 이유가 있나?”

“무인들은 잡일 하는 걸 수치로 여기 거든.”

“일하는 걸 싫어한다고?”

“그러니까 칼을 잡은 거 아니겠어? 짧고 굵게 살다가는 게 사내의 인생이라고 입버릇처럼 외고 다닌다고.”

우이친의 눈에 동경의 빛이 스쳤다.

“부모님만 안 계시면 나도 진작 흑천에 들었을 거야. 외아들이거든.”

목소리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진다. 흑천이 흑도문파라는 건 개의치 않는 듯했다.

중원의 젊은 청년들이 천하방을 선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인부들이 내리자 하 감독관이 인력을 나누었다.

“너희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을 따라가라.”

무한은 우이친과 함께 전각 공사를 하는 곳으로 갔다.

이층 전각을 짓는 공사였는데 한창 공사 중이었다.

“서둘러라. 원단이 되기 전에 마쳐야 한다.”

공사장 감독관이 새로 온 인부들에게 지시했다.

무한은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흑수애를 살폈다. 마침 전각을 짓는 곳이 야트막한 언덕이어서 정황을 살피기 좋았다.

한겨울임에도 물이 얼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래도 대규모 병력 이동은 쉽지 않을 텐데?’

무력대를 배로 실어 나르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숨겨진 육로가 있을지도 모르지.’

저녁이 되자 감독관이 소리쳤다.

“식사를 하고 야간작업을 할 것이다. 품삯을 두 배로 쳐줄 것이니 지원자는 나와라.”

우이친이 이 말을 듣고 좋아하며 무한에게 생색을 냈다.

“흑수애로 오길 잘했지?”

“나는 좀 쉬고 싶은데.”

무한의 말에 우이친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처음이니 고될 거야. 저기가 숙소니까 먼저 가서 쉬어.”

식사를 마치자 우이친은 공사 현장으로 갔다.

대부분 인부들이 야간작업에 지원을 하였기에 숙소로 가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무한은 숙소로 와서 자리에 누웠다.

숙소에 있는 이는 네다섯 명에 불과했는데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곯아 떨어졌다.

무한은 잠시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지키는 이는 따로 없었다.

선착장 부근은 술집과 기루로 불야성을 이뤘는데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천 무사들과 일하러 온 인부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본산에 기루가 있다니.’

흑도는 흑도였다.

뚝! 딱!

우이친이 있는 불을 밝히고 한창 공사 중인지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무한이 잠시 주위를 살피다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흑천의 본산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경계가 허술했다.

‘하기는…… 뒤는 절벽이고 앞은 강이니 도주할 데도 없으니까.’

경계는 흑수애 선착장 두 곳과 뒤쪽 절벽에 집중되어 있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멀리 흑천전이 보였다.

‘흑천노조…….’

한 번도 보지 못한 외할아버지이다.

흑월을 일으켜 사사천을 통합하여 흑천이라는 거대한 흑도세력을 이뤄낸 거인.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냉혹하고 잔인한 노괴였다.

하지만 흑천노조의 진면목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꿰차고 있다는 천하방 군사부에서도 얼굴은 물론이고 키나 체구 등 용모조차 모른다.

소소는 흑천 내부에서도 흑천노조의 진면목을 아는 이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실존하는 인물인지 의심하는 이까지 있었다고 했다. 물론 그런 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죽음으로 흑천노조의 존재를 확인했다.

무한은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흑천전이 있는 담을 넘었다.

널따란 광장 끝에 삼단으로 이뤄진 계단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삼층 전각이 있었다.

놀랍게도 흑천전 주위에도 경비병이 없었다.

흑천의 천주이니만큼 삼엄한 경계를 펼칠 것이라 여겼는데 의외였다.

삼층 전각 대청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초저녁임에도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만한 규모의 전각은 출입문이 하나둘이 아닐 터.

무한은 왼쪽 회랑을 따라 가며 출입문이 있을 곳을 찾았다.

회랑의 어둠을 타고 가는 무한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도 자취를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빨랐다.

전각 측면에는 출입구가 셋이나 있었다. 뒤쪽 쪽문이 하인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보였다.

무한이 문 앞에 서서 슬며시 밀려고 하는데 문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헉!’

순간 천목혈이 찌릿하며 경고를 하였다.

‘발각됐나?’

무한이 숨을 멈추고 슬며시 뒤로 물러나려는데 웅혼한 음성이 들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려는가?”

노쇠한 음성은 마치 옆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흑천노조!’

순간 흑천전 주위에 왜 경비병이 없는지 이유를 알았다.

화경 아니 현경에 이르렀을지 모르는 고수가 머무는 곳이다. 빈번히 오가는 경비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잠시 멈칫했던 무한이 열린 쪽문으로 들어서려는데 돌연 문이 닫혔다.

사람도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면…… 대체 흑천노조의 공력은 얼마나 될까.

“기왕에 왔으면 정문으로 들어오게.”

이어 대청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한은 망설이지 않고 전각을 돌아 대청 정문을 넘었다.

수백 명은 들어설 수 있는 널따란 대청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한은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펼쳐 흑천전 내부를 감지하였다.

거대한 전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자신이 흑천노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삼층으로 올라오거라.”

노쇠한 음성은 무한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대청 좌우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무한이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대청 천정은 이층까지 트여 있었기에 계단의 끝은 바로 삼층으로 이어졌다.

삼층 어두운 복도로 들어서자 오른쪽 복도 끝 막다른 문이 열리고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무한은 주저하지 않고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장방형의 방이었다.

무한은 천하방에 와서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방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크기와 구조의 방이었다.

맞은편 끝에 한 뼘 높이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책상이 있는 것까지.

책상 뒤에는 백발에 흑관을 쓴 약간 마른 듯한 노인이 앉아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노인이 천천히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무한은 마치 천하방에서 할아버지 심양조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노인의 동작마저 비슷하였다.

다만 무한을 보고 흠칫, 놀란 것만 달랐다.

한밤의 침입자가 그도 생각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건 확실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

침묵이 흘렀으나 눈빛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대화가 오갔다.

말이 아니라 생각으로 나누는 대화였다.

침묵의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상대가 생각하는 이면을 읽어내려는 듯 이따금씩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기도 했다.

이윽고.

노인, 흑천노조가 입을 뗐다.

“눈매가 어미를 닮았구나.”

그 한마디로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립됐다.

무한은 묵묵히 예를 갖췄다.

어찌됐거나 핏줄이다. 서 있는 자리가 흑백으로 나뉘어 있어도 최초의 예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한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흑천노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온 게냐?”

마치 함께 사는 손자에게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제게 외조부가 있다는 말을 최근 들었기에 인사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모르고 지내는 게 편했을 텐데……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군.”

흑천노조의 눈빛이 번뜩이는 순간 무한은 천목혈이 찌릿함을 느꼈다.

“천심공(天心功)은 어미가 가르쳐준 것이냐?”

‘천심공?’

무한은 천목투심술을 지칭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명칭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천목혈을 단련하는 수련이라면 익힌 바 있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뤘군.”

무한은 자신의 천목투심술을 팔성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성을 이루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에 들은 바로 추정한 것이다.

흑천노조는 무한이 천심공을 익힌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에서 천심공을 익힌 자는 나뿐이다. 원래는 투심술에서 출발했지. 그러다 천목혈의 묘용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천심공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면 제가 익힌 것은 투심술 단계이겠군요.”

“흐음. 말이 통해서 좋군.”

흑천노조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천심공이란 게 무척 유용하지만 저주일 수도 있지.”

“저주…….”

“타인의 마음이 들여다보이면 어떻겠느냐? 가까운 지인이라는 놈이 언제고 나를 죽일 속셈을 품고 있는데, 내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면…….”

흑천노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쳐 죽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사람의 마음이란 조변석개 하는데 일일이 죽이다 보면 주위에 남은 놈이 있겠느냐?”

무한은 왜 흑천노조가 두문불출하는지, 흑천전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제 마음도 보입니까?”

“네 녀석도 천심공을 익혔으니 있는 그대로 보기는 어렵구나. 다만 아직 수위가 낮아 대충은 짐작한다만…….”

흑천노조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를 떠보러 온 것 아니냐?”

무한은 마치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무한이 자신이 검천부를 물려받은 과정이 흑천의 계략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걸 지적한 것이다.

‘천심공, 무서운 공법이구나. 모두를 멀리할 만해.’

흑천노조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세상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뭐하겠느냐? 자식의 마음조차 다잡지 못하는데.”

“…….”

“네 어미가 심군하와 혼인을 한 건 자신의 결정이었다. 흑월의 주인 자리까지 던져버렸지.”

흑천노조의 눈에 괘씸하다는 빛이 스쳤다.

“제 존재는 언제 아셨습니까?”

“천하방 검천부에 손자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짐작했다.”

“…….”

“너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나는 이미 네 어미와 연을 끊었다.”

흑천노조의 말은 담담했으나 냉정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며칠 묵고 가거라.”

그러고는 옆에 있는 줄을 당겼다.

잠시 후 늙수그레한 하인 하나가 들어왔다.

“진복, 이 아이에게 동흥전(東興殿)을 내주게.”

“알겠습니다.”

진복이라는 늙은 하인이 등롱을 들고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둘이 방을 나오는데 흑천노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옷도 새로 내주게.”

무한은 내심 웃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면서 남의 눈에 비칠 무한의 차림에 신경을 쓰는 게 느껴졌다.

핏줄의 힘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스쳤다.

흑도의 하늘이자 천심공을 익힌 거인도 마음의 흔들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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