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잔노가 내공을 끌어올려 경락을 파고드는 뇌전의 기운을 막아내며 뒤로 몸을 솟구쳤다.
“화경이었구나!”
도왕을 비롯하여 당금 십대고수들의 경지가 화경이다.
잔노는 무한의 무공 수위를 화경으로 착각했다.
무한은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무위를 노출한 이상 잔노를 놓칠 수 없었다.
파팟!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싶은 순간 잔노의 가슴으로 검이 튀어 나왔다.
그새 뒤로 돌아 등 뒤에서 검을 찌른 것이다.
“크헉!”
단호하고도 무자비한 검이 잔노의 심장을 쪼갰다.
“너…….”
잔노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무한을 돌아봤으나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을 거두었다.
무한이 착잡한 심정으로 잔노의 죽음을 지켜보는데 한쪽에서 비명성이 들렸다.
“컥!”
마지막 남은 도천대원이 쓰러졌다.
잔노가 죽었음에도 천잔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고우와 마철립, 당전수와 당가 호위 한 명 그리고 남궁우와 귀영이었다.
무한은 곧바로 신법을 펼쳤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남궁우와 귀영을 에워싼 괴인들을 관통했다.
뒤이어 당전수와 당가 호위의 포위망을 풀고, 마지막으로 고우와 마철립을 상대하는 괴인들을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일당백의 무위에 남궁우와 귀영은 입을 쩍 벌렸다.
특히 귀영의 놀람이 컸다.
‘언제 저렇게 무지막지한 경지에 올랐지?’
항상 옆에서 지켜봤기에 무한의 무공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크윽……”
괴인들이 모두 쓰러지자 고우가 비틀거리다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마철립 역시 도를 땅바닥에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한이 귀영에게 물었다.
“장 감찰과 공 감찰은?”
“죽지는 않았어. 그런데 부상이 깊어.”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귀영을 대신하여 남궁우가 대신 대답했다.
뒤쪽에 장교명과 공우가 쓰러져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남궁우와 귀영이 필사적으로 지키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난도질당했을 것이다.
“감찰호위 노릇을 제대로 했네. 수고했어.”
남궁우도 힘에 부친 듯 비틀거리면서 무한에게 다가와 물었다.
“근데…… 경지가 어찌 되는 거야?”
“무슨 경지?”
남궁우가 무한을 가리켰다.
“화경이잖아. 이건 말이 안 된다고. 그 나이에 화경이라니.”
“당연하지. 화경일 수가 없잖아. 뇌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거지.”
일행들은 눈앞의 괴인들을 상대하느라 무한이 천잔사괴와 잔노를 죽이는 걸 보지 못했다.
“이들이 뇌공에 약하더라고.”
무한이 둘러대며 어딘가를 보았다.
강변을 내려다보는 산중턱 어디쯤을 바라보자 남궁우가 뒤따라 시선을 주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앙상한 겨울 숲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 적이 또 있어?”
“아니.”
무한이 시선을 거두고 귀영에게 일렀다.
“장 감찰과 공 감찰을 마차에 태우세요.”
이어 당전수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인들의 시신을 여기서 수습하는 게 좋겠어.”
온통 피를 뒤집어 쓴 당전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호위하느라 희생당한 무인들을 두고 가는 게 더없이 괴로웠으나 지금으로선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전수와 남은 호위가 강변 숲으로 들어가 얼어붙은 땅을 팠다.
이 모습을 본 마철립도 숲으로 들어가 도를 휘둘러 땅을 내리쳤다.
격전을 치르느라 진이 빠졌기에 구덩이를 파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귀영이 보다 못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는 고우에게 다가가 툭 쳤다.
“고 대공자, 정신 차려야지. 도천대원들을 그냥 버리고 갈 거야?”
고우가 싸우는 와중에 도주한 걸 본 귀영은 존댓말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고우는 이를 인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탓인지 목덜미가 움츠러들어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에이…… 한심한 놈.”
귀영이 경멸하듯 내뱉고는 당가의 마차에서 삽을 꺼내 마철립 옆으로 가서 땅을 팠다.
마철립이 핏발이 선 눈으로 귀영을 봤다.
“뭘 봐. 어쨌든 다 같은 천하방 사람이잖아. 에이, 다 얼어붙었잖아. 도무지 삽이 들어가지 않네.”
귀영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용케 구덩이를 파나갔다.
당가의 마차에는 당현전 장로의 시신과 장교명, 공우가 실렸다.
“으…….”
당현전의 관을 본 장교명은 내키지 않았으나 허벅지에 칼을 맞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한겨울인데다 당가의 독으로 시신의 부패를 막아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공우는 인사불성이었기에 불평하지도 못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일행은 강을 따라 내려갔다.
강변 산기슭 커다란 바위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진경…… 저 나이에 진경이라. 자네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겠네.”
싸움의 전 과정을 지켜 본 화수전의 살수 운객은 무한의 무공 수위를 정확히 파악했다.
운객이 시린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하늘 어딘가에 우객의 넋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자네 뒤를 따를지 모르겠네.”
운객은 멀어져가는 무한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
일행 대부분을 잃어버렸으니 가는 길에는 침묵만 흘렀다.
“저기 포구마을이 있습니다.”
귀영이 제법 큰 포구마을을 가리켰다.
포구마을에서 건너편으로 배를 이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겨울이라 강이 얼어붙었기에 배다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선 씻고 식사하지요.”
무한이 삼층으로 된 객잔을 가리켰다.
제법 큰 마을인데다 교통의 요지에 있어 객잔도 많았다. 다만 한겨울이라 오가는 이들이 드물었기에 마을은 한적했다.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화들짝 놀랐다. 아침부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들이닥치니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서 오란 말이 나오지 않아 멀뚱멀뚱 쳐다보는 점소이에게 남궁우가 말했다.
“객실이 필요해.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따듯한 물. 목욕도 해야 하니까 넉넉하게 준비해.”
“무슨 객실을 그리 많이 얻어?”
“그럼 넌 당 소가주와 함께 묵던가.”
남궁우는 혼자 객방을 하나 차지했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무한은 일층 반점으로 갔다.
점소이가 다가와 물었다.
“식사는 뭘로 올릴까요?”
“사람들이 오면 함께 주문하지.”
잠시 후 귀영이 내려오고 뒤이어 당전수와 호위가 왔다. 이어서 고우와 마철립이 내려왔다.
“이봐, 주문 받아.”
고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를 불렀다.
마철립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식사를 주문하고 앉아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궁우가 내려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궁우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대체 어디서 온 놈들일까?”
침묵이 괴로웠던 귀영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흑천이겠지.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아니. 왠지 그들은 아닐 것 같아. 사파 느낌이 펄펄 나잖아.”
“흑천이나 사파나 그게 그거지.”
“으음. 뭘 모르는구나. 흑천과 사파는 달라.”
“다르긴. 사사천이 흑월과 합쳐져 흑천이 된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사사천은 사파라기보다 원래 흑도와 가깝지.”
“흑도와 사파의 차이가 뭔데?”
“흑도는 힘을 숭상하지. 악행을 저지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도구로 쓰지는 않는다고.”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와 탁자에 놓았다.
남궁우가 젓가락을 들었다.
“그건 내 건데. 너도 시키라고.”
귀영의 항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튀긴 두부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입 베어 문 남궁우가 말을 이어갔다.
“괴인들은…… 약물에 정신이 금제된 것 같았어. 사마외도의 무리들이 그런 짓을 하지.”
“왜 흑천을 변호하는 거지?”
“변호라니. 남궁세가 최대의 적이 흑천이야. 하지만 적을 깎아내리거나 모함하지는 않아.”
남궁우가 연신 젓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중요한 건 제대로 봐야 적이 누군지 알 수 있다는 거야. 흑천이라고 단정 지었다가 뒤통수 맞을 수도 있지.”
듣고 있던 당전수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신을 금제하는 약물은 만독곡에서 주로 사용했어. 하지만 만독곡은 이미 멸문 당했지.”
당가의 전대가주 독왕이 만독곡을 쳐서 무너뜨렸다.
강호 공적 만독곡을 멸문시키는 와중에 중독된 독왕은 곡을 폐쇄하고 그 안에서 폐관에 들었다.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남궁우는 알고 있었다.
“만독곡의 후인들이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 이야기라 당전수도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어떤 놈들이든…… 한 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반드시 갚아주겠어.”
고우가 어금니를 짓씹어가며 말했다.
천하방 제일문파라고 자처하는 도천부 대공자로서의 면모를 땅바닥에 처박은 장본인이 그리 말하니 누구 하나 믿지 않았다.
“구두신공(口頭神功)으로 누굴 못 죽이겠어.”
귀영이 빈정거렸다.
마철립이 눈알을 부라렸으나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그는 고개를 쳐들 면목조차 없었다.
오만하고 명예욕 또한 누구보다 강했으나 그 역시 도천대 무인으로 살아왔다.
고우의 행동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동시에 도천대주 신악강이 왜 고우를 못미더워했는지 그 이유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고우는 무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기습을 당했고, 적의 수가 많아 불리한 싸움이긴 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싸우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주하다니.
고우가 갑작스레 도주하지만 않았더라도 도천대가 전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고우가 마철립을 향해 말했다.
“도천부로 사람을 보내서 도천대 오개조를 파견해달라고 해.”
오개조면 오십 명에 이른다. 정말 중요한 전투 상황이 아니면 이렇게 대규모로 이동하는 경우가 없다.
마철립은 기가 막혔으나 지시를 따를 방법도 없었다. 도천부로 연락하려면 누군가 가야 했는데 남은 사람이 없다.
“마 조장이 가면 되잖아.”
“대공자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여기…….”
고우가 객잔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대놓고 살상을 벌인 놈들이 객잔이라고 쳐들어오지 않을까?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을 시키면 되잖아. 내가 서찰을 써주지.”
“아무리 대공자의 서찰이라더라도 모르는 이가 가져온 걸 믿고 오개 조가 바로 출동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고우가 힐난하듯 말하자 마철립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니야.”
“일단 식사를 하고 다시 이야기 하시지요.”
“지금 밥이 넘어가!”
마철립마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하자 고우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무한은 두 사람의 대화는 관심이 없었다.
손우자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손우자, 다 죽일 셈이었나?’
고우의 안위는 관심 밖이다. 그가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당전수는 다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전수는 무사히 당가에 도착해야 한다.
‘실패했다는 걸 얼마나 빨리 알 수 있을까?’
- 총군사는 계책을 세울 때 이중 삼중으로 보완해.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지.
소소가 일러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안심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소가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식사를 마친 무한이 당전수를 불렀다.
“적이 다시 올 가능성이 높아.”
당전수도 짐작하고 있었던 듯 바로 대꾸했다.
“우리는 이미 당할 만큼 당했어. 흉수가 설령 천하방 사람이라 해도…….”
당전수의 눈빛이 표독하게 빛났다.
“반드시 책임을 물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