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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10화 (110/250)

110화

무한이 결심을 굳히자 검세가 바뀌었다.

쉬시식!

경천십이식 회천격이 펼쳐지며 주위 십여 장이 검세로 뒤덮였다.

사방에서 검광이 휘몰아치더니 달려들던 괴인 대여섯 명이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아!”

이를 본 남궁우가 경탄성을 흘렸다.

‘정말 초절정이잖아!’

고우에게 무한이 초절정이라고 한 건 이전에 남궁세가에서의 비무를 보고 짐작한 추측이었다.

사실 무한의 나이에 초절정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만일 무한의 무공 수위가 초절정을 넘어 진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파팟!

거침없이 펼쳐지는 검세에 괴인들이 우수수 나가 떨어졌다.

강변을 등진 채 도천대가 가운데를 막고 당가가 좌측, 그리고 우측이 무한 일행이었다.

가장 숫자가 적었지만 무한이 압도적인 무위를 발휘하였기에 괴인들은 본능적으로 가운데 도천부 쪽으로 몰렸다.

어느 순간.

고우가 외쳤다.

“퇴각! 퇴각한다!”

갑작스런 명령에 마철립이 화들짝 놀랐다.

비록 초반 기세에 밀렸지만 천하방 정예 도천대답게 버텨내는 중이다.

여기서 도천대가 등을 보이면 한가운데가 뚫리고 당가와 무한 일행은 고립되고 만다.

마철립이 당가나 무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다 같이 죽는 형세다.

“안됩니다! 전열이 무너지면 다 죽습니다!”

“적이 너무 많아! 일단 물러나서 정비한다!”

고우는 최전선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앞에 선 무인들이 죽어나가자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을 지켜줄 무인들이 사라지면, 괴인들의 도끼가 자신의 머리를 찍을 것만 같았다.

“명령이다! 퇴각한다!”

고우가 강 쪽으로 빠지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도천대 무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런!”

마철립은 고우가 이렇게 황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도천부의 장손이자 문무 양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로 불렸던 고우.

도천부의 앞날을 이끌어 갈 재목이자 장차 천하방주에 오를 후계자로 추앙받았던 고우가 이렇게 비겁하고 심약한 인간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안 돼! 버티라고!”

마철립이 외쳤으나 대원들은 이미 뒤로 빠졌다.

도천대가 뒤로 빠지자 괴인들이 빈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야, 이 미친놈아! 너 혼자 살자고 빠지면 어쩌자는 거야!”

귀영이 고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한 역시 싸늘한 눈빛으로 고우를 봤으나 지금은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둘이 여기를 맡아!”

무한이 몸을 날려 도천대의 빈자리에 내려서며 폭풍처럼 검을 휘둘렀다.

파파팡!

기파가 터지며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대여섯 명이 한 번에 쓰러졌다.

우두머리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전력 노출을 최소화하려 했으나 상황이 다급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초절정의 무위를 완연히 드러내자 밀려들던 괴인들도 주춤했다.

“소가주! 이쪽으로 와! 함께 진을 형성하자!”

무한이 당가를 향해 소리쳤다.

당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적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암기나 독으로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당전수의 네 호위 중에 둘이 죽고, 일곱 명이었던 무인들도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당현전과 전날 죽은 무인들을 실은 마차도 이미 적의 손에 넘어갔고, 함께 싸우던 마부와 인부도 모두 죽었다.

당전수가 당가의 무인들을 독려하여 무한 일행과 합류했다.

“안쪽으로 들어와서 암기로 지원해줘!”

남궁우가 당가의 무인들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귀영과 남궁우, 장교명과 공우가 사방을 점하고, 가운데 있는 당가의 무인들이 수전과 비도를 날리자 괴인들의 공세도 주춤해졌다.

무한이 괴인들이 몰려오는 방향을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수십 명의 괴인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우리도 빠지자. 도천대와 합류하자고!”

남궁우가 외쳤다.

무한이 고우가 간 방향을 보니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괴인들에게 에워싸여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퇴각하느라 진을 풀어버린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도천대 무인 하나하나가 일류고수들이었으나 괴인들의 육탄공세는 상궤를 벗어났기에 속속 쓰러져갔다.

살아 있는 자는 고우와 마철립 그리고 세 명의 대원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또 한 대원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열다섯 명이 죽어 나간 것이다.

고우는 공포에 휩싸여 마구 칼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괴인들은 고우와 도천대를 몰아놓고 벌떼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마철립이 이를 악물고 분전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길을 뚫을 테니 따라 와.”

무한이 몸을 날리며 일행과 도천대 사이의 괴인들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파파팟!

수십 갈래의 검기가 파도처럼 괴인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무한의 검에는 감숙에서와 달리 주저함이 없었다.

퍼퍼퍽!

괴인들이 육편이 되어 흩날리고 피보라가 일었다.

압도적인 공세에 감정이 없어 보이던 괴인들마저 주춤했다.

무한의 앞으로 훤하게 길이 뚫렸다.

“서둘러!”

“길을 확보해라!”

당전수가 손에 든 수전을 날리며 앞장서고, 당가의 무인들이 양옆으로 쇠침과 비도를 던지며 무한이 뚫은 통로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남궁우와 귀영, 장교명과 공우가 뒤에서 공격하는 괴인들을 막으며 따랐다.

무한이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며 검기를 폭사했다.

파지지직!

이번에는 뇌전기까지 담았다.

뇌전의 기운이 공기를 가르며 마치 수십 자루의 검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다시 십여 명의 괴인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사이 일행이 고우와 합류했다.

“이대로 빠져 나가자!”

무한이 무명신법을 펼쳐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서며 길을 열려는데, 음침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물러나라!”

순간 괴인들이 썰물 빠지듯 뒤로 물러났다.

대신 무한의 앞쪽에 네 명의 괴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얇고 긴 도를 지닌 자들이었다.

역시 얼굴을 난자한 이들로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그 뒤로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한쪽 팔이 짧고 양귀가 없는 잔노였다.

잔노가 앞으로 나서는데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네 명의 괴인이 양옆으로 갈라서며 잔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잔노의 음험한 눈빛이 피바다가 된 강변을 훑었다.

“…….”

무한의 무위는 그가 손우자에게 들은 이상이었다.

십여 년을 공들여 키운 천잔대가 절반 이상 희생됐다.

상대가 천하방 제일의 무력대 도천대와 오대세가 당가의 무인들이라지만 그 수가 서른 명 남짓에 불과하다. 예상대로라면 천잔대의 피해는 열 명이 넘지 않아야 했다.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건 무한 때문이다. 천잔대의 절반이 무한에게 당했다.

잔노가 무한을 노려봤다. 음침한 눈빛 깊숙한 곳에 증오가 어려 있다.

추노를 죽이고 온 길이다. 그에게 동료의 피를 묻히게 한 무한을 갈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다.

무한은 그 눈빛을 받으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손우자!’

손우자가 자신을 노리는 건 이해할 수 있었으나 당전수와 고우까지 해치려 한 건 예상치 못했다.

새로 나타난 우두머리와 네 명의 괴인들을 제외하면 남아 있는 괴인들은 서른 명 가량이었다.

“죽여라.”

잔노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짤막하게 내뱉으며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네 명의 괴인들이 아직 강변에 남아 있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스르륵!

무한은 퍼뜩 화수전의 살수들이 떠올랐다. 괴인들의 움직임은 화수전의 살수 못지않았다.

무한이 천목투심술과 기감을 끌어올리는 순간 네 방위에서 칼이 쑥 들어왔다.

가늘고 긴 도가 소리도 없이 안개를 갈랐다. 살기도 기척도 없었다. 그저 공허했다.

아무런 의지도 없이 찔러온 도는 닿는 순간 맹렬한 증오를 터뜨렸다.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터지는 광기와 증오가 뱀의 혓바닥처럼 허공을 휘저었다.

이에 맞서는 무한의 검 또한 무심했다.

네 자루의 도가 휘젓는 공간에도 결이 있었고, 무한의 검은 그 결을 잘랐다.

증오와 무심이 격돌했다.

쾅!

네 명의 괴인이 발산하는 증오의 실체는 강기였다.

네 줄기 강기와 격돌한 무한이 휘청거렸다.

‘강기의 고수?’

믿을 수 없었다.

강기를 쓰는 진경의 고수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고?

일파의 장문인이 되고도 남을 경지인데?

“쳐라!”

순간 잔노가 다시 한 번 손을 저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괴인들이 무한의 일행을 공격했다.

잔노는 네 명의 괴인이 무한을 잡아 놓는 사이 다른 이들을 해치울 작정이었다.

“으윽!”

당가의 무인이 괴인들이 덮쳐들며 벌인 육탄공세에 덧없이 스러져갔다.

고우와 당전수는 또래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나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도천부 대공자나 당가 소가주는 누군가와 생사결을 벌여본 적이 없다.

생사가 오가는 싸움은 무공에만 좌우되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은 간발의 차로 목숨이 오가는 생사투(生死鬪)에서 잔뜩 위축되어 제 실력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놈은…….’

잔노의 음험한 눈빛이 무한을 향했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위였다.

천잔대, 그리고 천잔사괴는 천기자를 죽이기 위해 길러낸 이들이다.

온갖 기진과 괴이한 수로 자신을 방어하는 천기자를 상대하기 위해 이지를 제약한 이들.

그럼에도 무한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무한은 천잔사괴를 상대로 싸우면서도 전황을 살필 여유가 있었다.

그는 고벽후와 생사결에 가까운 비무를 치렀고, 소마와 혈랑, 검마와 같은 초고수들과 직접 겨루거나 싸우는 걸 봤다.

거기에 화수전 살수들과의 격전으로 생사를 가른 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또한 팔성을 넘어 구성을 두드리는 천목투심술 덕분에 강기의 고수가 무려 네 명이나 달려드는데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천목투심술의 효능은 무한 자신도 놀라는 중이다.

구성에 가까워지며 단순히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술수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다.

천잔사괴가 뿌리는 강기의 흐름이 무한의 눈에 보였다.

맹렬하게 공간을 휘감다가 닿는 순간 터지는 강기의 그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무한 역시 초조했다.

자신은 버틸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할 수 없다.’

무한이 결심을 굳혔다.

순간, 검세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파팟!

무한이 검을 세우는 동시에 등 뒤에서 작은 검 네 자루가 솟구쳤다.

반자 길이의 검은 실제 하는 쇠붙이가 아니었다.

강기가 형태를 이룬 일종의 무형검.

슈슈슉!

네 자루의 무형검이 천잔사괴를 향해 유선을 그리며 쏘아갔다.

천잔사괴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합세하여 강기를 쳐냈다.

네 갈래 강기가 벽을 이뤄 무한의 강기 검과 충돌했다.

콰아앙!

벼락이 떨어지는 굉음이 터지고 사방이 강기의 여파로 회오리가 일었다.

스스슥!

괴인들이 주춤하는 사이 무한이 휘두른 검에서 발출한 검기가 들이닥쳤다.

퍼억!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가던 천잔사괴가 검기에 꿰인 듯 멈춰 섰다.

“크윽!”

누군가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성이 터졌다.

이어, 쿵, 쿵 하며 하나 둘씩 쓰러졌다.

이를 본 잔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럴 수가!’

천잔사괴의 합공은 도왕도 막을 수 없다 자신해왔다. 그런데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무한에게 당하다니.

잔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네, 네가…….”

무한은 멈추지 않았다.

무명신법을 펼쳐 순식간에 잔노의 앞에 들이닥쳤다.

곧바로 찔러오는 무한의 검에 파르래한 빛이 번뜩였다.

잔노가 황급히 도를 들어 맞받아치는 순간, 폭풍 같은 뇌전이 잔노의 몸을 관통했다.

“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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