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악일비를 중심으로 한 도천부 지지파가 많았고, 패천부 지지파가 둘,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조령문 숭전양이 외따로 앉았다.
겉으로는 한데 어울려 웃음을 나누고 있지만, 디디고 선 발판은 엄연히 나뉘어 있는 셈이다.
주연이 무르익을 무렵, 한 사람이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휘주의 후기지수가 함께 한 듯합니다. 이런 자리에 비무가 빠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러자 모두가 환호했다.
남궁악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휘주의 앞날을 이끌어갈 영웅들이 모였으니 무를 논해보는 건 당연한 일이오. 다만 일말의 불상사도 있어선 안 되니 목검으로 하고 상대의 옷깃을 베거나 몸에 대는 걸로 승부를 내는 게 좋겠소.”
“하하. 어린 아이들도 아닌데 목검이라니요. 진검으로 합시다. 대신 상대에게 부상을 입히면 바로 실격 처리하면 되지 않겠소.”
악일비의 제안에 남궁악이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 분들이라 염려됩니다. 본가에서 피를 본다면 회합을 주관한 제가 못 견딜 것입니다.”
남궁악이 스스로를 낮춰 말하니 악일비도 더는 주장하지 못했다.
앞마당에 바로 비무장이 마련됐다.
비무는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의 이름을 작은 죽패에 적어 목합에 넣고, 한 사람씩 임의로 상대를 뽑는 방식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승자가 자신의 죽패를 다시 목합에 넣는 식으로 계속 비무를 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연회의 흥을 돋우는 정도이니 한 번 비무로 끝내기로 합시다.”
남궁악이 비무 방식을 설명하곤 자신의 앞에 목합을 가져다 놨다.
남궁악이 주관을 하고 남궁호가 심판으로 보기로 하였기에 남궁세가에서는 남궁명이 나가기로 했다.
남궁명이 자신의 이름을 적다 말고 무한에게 죽패를 권했다.
“자네도 적어야지?”
“왜 이러십니까? 저는 객입니다.”
“하긴 손님으로 모셔놓고 비무하자 할 수 없지.”
남궁명은 은근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준비가 되자 남궁악이 좌중을 둘러보고 목합을 가리켰다.
“자, 그럼 누가 먼저 뽑겠습니까?”
“내가 먼저 뽑겠습니다.”
악일비가 뚜벅뚜벅 걸어 나가 목합에서 죽패를 뽑아 건넸다.
남궁악이 죽패를 보고 어딘가로 시선을 보냈다.
“공소후 소협?”
남궁악이 공소후 이름이 적힌 죽패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첫 번부터 악일비의 상대가 된 공소후는 죽을상이었다.
악일비는 휘주 후기지수에서 남궁악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인물.
공소후가 입술을 꾹, 깨물고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비무는 싱겁게 끝났다.
공소후가 기를 쓰고 몰아붙였으나 악일비가 가볍게 막아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이십여 합이 흘러 상대의 체면을 적당히 세웠다고 판단한 악일비가 한순간 목검을 휘저어 공소후의 가슴에 대었다.
승패가 가려지자 공소후가 목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을 하였다.
“많이 배웠습니다. 확실히 악 형을 감당하기 어렵군요.”
패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건만 워낙 실력 차가 컸기에 공소후는 한 수 가르침을 받았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아니, 내가 아무래도 검을 쥔 연차가 많지 않은가. 자네가 내 나이였다면 아마 맞수를 이뤘을 것이네.”
악일비가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이어 다음 비무가 진행되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한 비무였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누구도 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패자는 깨끗하게 승복하고, 승자는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간혹 승복을 못 하여 씩씩거리는 이도 있었으나 남궁호가 공정하게 심판을 보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보기 좋군요.”
무한이 중얼거렸다.
남궁명이 슬며시 웃었다.
“본가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지. 더욱이 색마를 잡기 위한 회합이니 분위기를 깰 수도 없고…… 다른 곳이었다면 아마 얼굴을 붉히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네.”
“그렇군요.”
무한이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휘주에서 제법 주목받는 후기지수들의 비무였지만 무한의 눈에 차는 이는 없었다.
별다른 불상사 없이 마지막 비무가 끝났다. 연회장 분위기는 크게 달아올랐다.
남궁악이 비무를 마친다고 말하려고 일어서는데 누군가 앞으로 나오며 외쳤다.
“검천부주께서 휘주까지 오셨으니 한 수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앞서 세 번째 비무에서 이긴 자였다. 그새 술을 마셨는지 취기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한은 손님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손님에게 비무를 청하는 건 남궁세가의 면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남궁악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정렴, 이제 비무를 파하고 남은 술을 마실 참이었네.”
냉랭한 어투였으나 이정렴은 눈치채지 못했다.
“무인으로 태어나 검신의 절기를 볼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입니까? 부디 견식을 넓혀주셨으면 합니다.”
남궁악이 다시 제지하려는데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형의 뜻이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무한이 비무장으로 나가며 말했다.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경천십이식이 어떤 무공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 경천십이식!”
“천하제일검법!”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무한이 비무장에 서서 말했다.
“아쉽게도 경천십이식을 익히는 도중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보여드릴 수가 없군요.”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검천부주가 경천십이식을 아직 연성하지 못했다고?”
무한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천하방 천무관 문하생 시절 사람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있습니다.”
“……?”
“삼재검수. 그게 제 별호였지요.”
무한의 말에 또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이정렴이 벌건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오? 고작 삼재검으로 응하겠다니.”
그때 남궁명이 나섰다.
“이 소협, 부주의 말은 사실이야. 그는 삼재검만으로 천무관 문무쌍절에 등극했어.”
“뭐라고?”
이정렴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무한이 목검을 쥐었다.
오랜만에 쥐는 목검이 손에 착, 감겼다.
무한이 의아해하는 이정렴과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제 생각에 무공 수법 자체는 고하가 없습니다. 수련하는 이의 성취가 서로 다를 뿐이죠.”
황산에서의 수련에서 확실히 느낀 바였다.
이정렴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한이 목검을 세웠다.
삼재검 기수식.
아니 기수식이랄 것도 없다.
이정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기롭게 검천부주와 겨루고자 했는데 고작 삼재검으로 응대한다니.
하지만 상대가 나선 이상 무를 수도 없었다.
“좋소.”
그가 목검을 세우더니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찔렀다.
쉭!
이정렴의 목검은 빨랐으나 그 자리에 무한은 없었다.
“엇!”
어느새 왼쪽으로 돌아선 무한이 비어 있는 이정렴의 측면을 겨누고 있었다.
무한의 심의삼재검은 이제 단순한 삼십육방 일수오검이 아니다.
삼재보법에 요산자의 신법이 섞여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려웠고, 일수오검 역시 기존 삼재검로를 버림으로써 단순하지만 검로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법이 되었다.
심의삼재검을 바탕으로 새로운 검법을 이루었다 할 수 있었다.
‘이게 삼재검법이라고?’
강호에 나도는 삼재검을 예측했던 이정렴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켜보는 이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만큼 무한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정렴은 목검이 당장이라도 찌르고 들어올 것 같자 숨을 들이켜고는 빙그르르 회전하며 목검을 뿌렸다.
이번에도 이정렴의 목검은 허공을 그었다.
그뿐 아니라 이정렴의 움직임 끝에 무한의 목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
마치 이정렴이 스스로 무한의 목검에 뛰어든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제대로 놀란 이정렴은 곧바로 땅을 박차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런데 그가 내려서야 할 곳에 어느새 무한이 서서 목검을 겨누고 있었다.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이정렴은 휘주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로 제법 한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무공에 대한 호승심이 강했다. 그런 그가 허겁지겁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익!”
계속해서 몰리던 이정렴이 한순간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목검을 뿌렸다.
“오! 훌륭하다!”
사람들이 경탄성을 지름과 동시에 비명도 터져 나왔다.
“위험해!”
이정렴의 목검은 여전히 허공을 휘저었을 뿐이다.
공중에 뜬 그는 내려서야 했는데 서야 할 자리에 무한의 목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내려선다면 이정렴은 복부가 꿰뚫릴 것 같았다.
그러나 허공에 뜬 이정렴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착!
이정렴은 상대에게 복부를 허용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아무런 타격감이 없자 의아해하였다.
무한은 어느새 일 장 거리에 서서 목검을 겨눈 자세로 서 있었다.
이정렴은 무한이 봐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목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을 하였다.
“고맙소. 아까의 무례는 사죄하겠소. 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겠소?”
진심으로 예를 갖춘 이정렴을 보고는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내가 선공을 하지요.”
무한이 선수를 치고 들어갔다.
쉭!
파팟!
이정렴이 무한의 첫 번째 찌르기를 막았다 싶은 순간 옆에서 내리치는 목검에 퍼뜩 놀라 뒤로 일 장이나 빠졌다.
그러나 무한은 어느새 반대쪽에서 다가와 대각선으로 목검을 올려쳤다.
“엇!”
이정렴이 놀라 검을 거꾸로 세워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무한의 목검은 또 사라지고 없었다.
이정렴이 어리둥절하여 무한을 찾으려다 자신의 어깨에 놓인 목검을 보았다.
무한이 어느새 등 뒤로 가서 그의 어깨에 검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정렴은 멍한 얼굴로 무한을 돌아봤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우와!”
“놀라운 검이다!”
사람들의 탄성에 정신을 차린 이정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당한 것이다.
이정렴이 바로 포권을 하고 말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주제넘게 쳐다보지 못할 곳을 넘봤습니다.”
무한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 형,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제가 좀 빨랐을 뿐입니다. 후일 다시 만나면 어찌될지 누가 압니까?”
이정렴은 체면을 살려주는 부드러운 무한의 말에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
“이 모, 검천부가 어찌하여 천하사패의 수위인지 알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보기 좋게 끝을 맺자 남궁악이 일어나 손뼉을 치며 말했다.
“검천부의 검이 신기에 달했다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했소. 오늘 새로 안목을 넓혔으니 삼배를 마셔야겠소.”
“옳습니다!”
남궁악의 말에 여기저기서 화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 삼배를 하였다.
무한은 자리로 돌아왔다.
악일비가 일어나서 맞으며 말했다.
“놀랍군요. 정말 간단한 초식만으로 이정렴을 손도 못 쓰게 만들다니.”
“친선 비무에 불과합니다.”
“그 친선 비무를 빌미로 은근히 세를 과시하려는 이도 있지요.”
악일비가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남궁우가 눈에 들어왔다.
“이정렴이 나선 것은 남궁지낭이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부주의 무공 수위를 알아볼 셈이었겠지요.”
남궁우가 무한과 눈을 마주치자 찡긋, 하고 눈짓을 하였다.
여자도 아닌 예쁜 남자가 그러니 기분이 묘했다.
악일비가 혀를 찼다.
“지략이 뛰어나긴 한데 엉뚱한 데가 있다는 소문입니다. 가까이 않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