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튿날, 무한은 남궁명을 따라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무룡을 찾았다.
남궁무룡은 객청이 아닌 자신의 서재에서 무한을 맞았다.
남궁무룡은 집안을 일으킬 무인이 되라는 뜻에서 무룡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오히려 책을 좋아하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다.
지금은 창천검룡이라는 별호를 얻었지만 젊어서는 창천서생이라 불렸다.
남궁무룡은 창가에 서서 한 손에 책을 들고 읽고 있었다.
남궁명과 무한이 들어오자 서탁에 책을 놓고 손짓을 하였다.
무한이 포권을 하자 가볍게 손을 저었다.
“서로 과한 예는 하지 말기로 하지. 자네 부친과 나는 함께 마천과 싸웠다네. 전우의 아들을 보니 반갑군.”
남궁무룡은 머리가 검고 눈빛이 맑았다. 청수한 모습이 무인이 아니라 문인에 가까웠다.
“마침 좋은 차를 구했네. 황산모봉이라 들어봤는가.”
“듣기는 했으나 아직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잘 됐군. 자리에 앉게”
다탁 사이에 두고 앉자 남궁무룡이 직접 다구를 펼쳤다.
무한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흥미로웠다.
찻물을 끓이고 다구를 정돈하는 남궁무룡을 누가 중원 십대고수라고 할까.
문득, 구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이들이 어찌 귀계가 판치는 무림에서 오대세가의 명성을 유지하는지 궁금했다.
다향이 서재에 퍼졌다.
“과연 좋은 차로군요. 향이 아주 진한데 맛은 의외로 부드럽군요.”
“그렇지? 황산의 지기가 보내온 것일세. 황산여음(黃山如音)이라는 친구일세.”
“별호에서 아취가 느껴지는군요.”
“음공으로 보기 드문 성취를 이룬 친구라네.”
“음공이요?”
“그렇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연주를 들어보게.”
남궁무룡은 황산여음의 음률이 얼마나 신묘한지 한참이나 설명했다.
음률에 대한 이야기는 시서화로 이어졌는데, 내용이 무척 깊어 무한도 간간이 맞장구칠 뿐이었다.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지자 남궁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버님이 마천과의 전쟁에 참가하신 건 알고 있었는데 무한의 선친과 함께 싸우셨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무한도 말했다.
“그러면 감숙에 계셨겠군요.”
남궁무룡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천이 호북과 하남까지 진출할 때였지. 자네 선친이 감숙으로 간 것은 훨씬 후의 일이네. 마천이 중원에서 패하고 물러난 후였으니까.”
남궁무룡은 자신의 젊은 날을 되새기다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여러 사람이 죽었지. 전쟁이란 끔찍한 것이야.”
남궁무룡의 시선이 벽면을 향했다.
준수한 용모의 노인을 그린 초상이 걸려 있었다.
“선친께서도 그때 입은 부상으로 고생하다 결국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마천이 다시 중원을 넘본다면 용서치 않을 겁니다.”
늘 선선한 웃음을 짓던 남궁명도 지금은 정색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남궁무룡이 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
남궁무룡이 남궁명에게 물었다.
“오늘 본가에서 휘주의 후기지수회합을 열린다고 들었는데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게냐?”
“오시에 후원에서 열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오셔서 격려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됐다. 젊은이들끼리 어울리는 자리에 내가 가봐야 뭘 하겠느냐.”
그러더니 무한에게 말했다.
“며칠 머물면서 나와 함께 황산여음을 찾아보지 않겠나? 그도 검신의 후예를 보면 분명히 기뻐할 걸세.”
“죄송합니다. 여정에 여유가 없어 오래 머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가?”
남궁무룡이 아쉬워하였다.
“오늘 무한도 후기지수 회합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이만 일어나볼까 합니다.”
“반가운 일이군. 휘주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검천부가 교류하면 여러모로 좋은 일일 걸세.”
남궁무룡의 서재를 나와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가면서 남궁명이 말했다.
“아버님 말씀이 지루하지 않았던가?”
“만일 모르고 뵈었다면 창천검룡이 아니라 글사부인 줄 알았을 겁니다.”
남궁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아버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그리 말한다네.”
후기지수 회합은 남궁세가의 군룡전(群龍殿)에서 열렸다.
커다란 대전 앞에 대략 마흔 명가량 되어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궁악과 남궁호도 그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는가? 마침 막 회합을 시작하려던 참이네.”
남궁악이 대전 상석으로 올라가 사방으로 포권을 하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휘주 후기지수 회합을 열겠소. 모두 앉아 주시오.”
젊은이들이 대전으로 들어와 모두 앉자 남궁악이 다시 한 번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말했다.
“강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리 모인 동도 여러분께 감사드리오.”
남궁악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이 자리에 마침 특별한 분이 참석하였소. 소개해드리겠소.”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쳐다봤다.
누구기에 남궁세가 소가주가 특별한 분이라고 했을까.
보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남궁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하방 검천부 심무한 부주시오.”
“검천부? 천하사패!”
대전안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놀라 휘둥그레 뜬 눈이 무한을 향해 쏟아졌다.
무한은 이제까지 이렇듯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어색했다.
천하제일인의 후계자.
천하방 천하사패의 일원.
무한의 신분은 무림에서 지고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세상에는 덜 알려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무한을 보는 젊은 남녀들의 시선은 놀람에 이어 호기심과 선망, 질투와 같은 갖가지 감정으로 바뀌어 갔다.
“할아버지 덕을 단단히 봤군.”
은근히 시기하는 목소리도 나지막이 들려왔다.
“심무한입니다.”
무한은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 자리에 앉았다.
회합은 사전에 조율이 되었던 듯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명칭은 휘주용봉회로 하고 동서남북 네 지역으로 나뉘어 활동하기로 하였다.
“색마를 잡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회합이니 세부조직을 두지 않겠습니다. 오늘 모인 회는 색마를 잡는 즉시 해산하는 겁니다.”
무한은 남궁악의 말에 의아해하였다.
그러자 남궁명이 설명해줬다.
“오대세가 간에도 은근히 서로를 견제한다네. 만일 남궁세가가 휘주 무림을 연합하여 지휘한다면 다른 세가를 자극할 우려가 있지.”
“그렇군요. 소가주의 생각이 참 깊습니다.”
모인 후기지수 가운데 누군가 소리쳤다.
“아무리 임시조직이지만 각 조를 통솔할 조장과 전체 조율을 담당할 책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조장은 각 조원들이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전체 조율을 맡을 책사는 이 자리에서 추천 받아 정하겠습니다.”
남궁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람이 나섰다.
“길게 생각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남궁세가의 지낭 남궁우 소협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한 곳을 봤다.
무한도 사람들 시선을 따라 보다 감탄했다.
하얀 얼굴에 오똑한 코와 도톰한 입술을 지닌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남궁지낭(南宮智囊)이라면 나도 찬성이오.”
“당연히 남궁지낭이 맡아야지.”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자 남궁악이 남궁우에게 물었다.
“모두의 뜻이 이러한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악을 척결하는데 몸을 사릴 수 있겠습니까?”
남궁우가 낭랑한 목소리로 선뜻 맡을 뜻을 밝히자 모두 환호했다.
“그럼 남궁우를 용봉회 책사로 하겠습니다.”
이어 각 조를 나누고 담당할 지역을 정했다.
“이로써 회합을 마치겠습니다. 저녁 연회 전까지 조별로 조장을 선출하기 바랍니다.”
남궁악이 종회를 선언하자 모인 이들이 조별로 흩어졌다.
“저녁 연회 전에 본가를 구경하지 않겠나?”
남궁명의 말에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한 무리의 젊은 남녀가 다가왔다.
앞에 선 이는 헌앙한 키에 푸른 무복을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남악문 악일비라고 하오. 천하방 안휘지부에 속해 있소.”
“조령방 숭전양이오. 역시 천하방 안휘지부 소속이오.”
무한을 찾아온 이들은 안주와 휘주 일대 천하방 소속 문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대략 십여 명이었는데 중심은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악문 악일비였다.
대부분 이십대 중반이었고 악일비만 서른 가까이 되어 보였다.
무한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천하방 형제를 뵈니 정말 기쁘군요.”
악일비가 다시 한 번 포권을 하며 말했다.
“검천부주께서는 과한 예를 거둬주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검천부주가 취임 후 각파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한 것을 악일비도 알고 있다.
남악문 역시 무한으로부터 예물을 받았다.
하지만 남악문은 도천부와 훨씬 가까웠다. 아니, 휘주 대부분의 문파가 도천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는 무한도 알고 있는 사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진심이다.’
천하사패 간의 갈등을 모르는 걸까?
남악문의 소문주 악일비가 모를 리 없다.
악일비는 무한을 살피며 나직이 말했다.
“과연 검천부는 다르군요.”
의미심장한 어조에 무한이 악일비를 바라봤다.
‘도천부에 반감이 있구나.’
실제로 악일비는 도천부가 남악문을 아래로 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에 대해 평소 반감이 깊었다.
그런데 무한이 정중히 예를 차리며 형제로 예우하니 호감이 갔다.
무한은 속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악일비의 태도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심 부주께서도 색마를 척살하는데 함께 하는지요?”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일이 있어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쉽군요.”
악일비는 진심으로 아쉬워하였다.
그때 남궁악이 다가왔다.
“휘주의 후기지수들을 소개하겠네.”
남궁악이 같이 온 후기지수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대부분 남궁세가의 방계나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문파들이었다.
무한이 보니 휘주는 크게 천하방 소속문파와 남궁세가를 따르는 문파, 그리고 그 어느 곳도 소속하지 않은 문파로 나뉘어 있었다.
천하방에 있을 때는 무림의 정점에 천하방이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직접 나와 보니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세가나 구대문파가 있는 지역은 그 파의 방계나 속가 세력이 강했다. 거기에 천하방 소속 문파와 이도저도 아닌 군소문파들이 혼재되어 있다.
소개를 마치자 남궁악이 악일비를 향해 말했다.
“천하방과 본가는 과거 마천과 함께 싸웠던 동지요. 사실 이 자리 모두가 형제라고 할 수 있소. 그러니 오늘 마음껏 마시고 형제의 우의를 다집시다.”
“정도를 추구하는 한 모두가 형제입니다. 사마외도를 척결하는데 천하방은 언제든 최일선에 설 것입니다.”
악일비가 화답했다.
남궁악과 악일비의 나이대는 비슷했다.
무한은 두 사람이 은근히 휘주 무림의 주도권을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주에서 남궁세가의 세력이 단연 강하지만 천하방 소속문파가 연합하고, 본방의 지원이 있다면 그럭저럭 맞설 만하다.
남궁세가가 휘주의 패자이지만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천하방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녁이 되자 군룡전에서 연회가 열렸다.
젊은이들이 모인 만큼 패기와 활기가 넘쳤다.
무한이 연회석을 살펴보니 남궁세가와 천하방 소속문파, 군소문파로 은연중 나뉘어 앉아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자리를 지정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무리지어 앉은 것이다.
‘천하방 소속문파도 또 나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