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검마가 도로 주저앉았다.
“그럼 나는 나중에 가겠다.”
“그러시던가요. 참, 일전에 천 낭자에게 노인장에 대해 말했습니다.”
무한의 말에 검마가 대경실색했다.
“뭐?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었다는 말이냐? 감히 나에 대해…….”
검마의 매서운 눈빛이 무한을 찌를 듯했다.
“나중에 물어보시죠.”
무한이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나갔다.
“가만, 기다려라.”
검마가 뒤쫓아 나왔다.
무한이 천소향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단 말야.’
무한이 내심 웃으며 백의영과 함께 천소향의 거처로 갔다.
천소향의 얼굴은 부쩍 환해졌다.
“좋은 소식이 있나보군요?”
“방금 이금 오라버니가 다녀가셨어요.”
천이금은 천평산의 명을 받아 백가상단에 머물고 있다.
“아버지께서 직접 백가상단에 오시겠다는군요.”
“천 단주께서? 왜?”
백의영이 놀라자 천소향이 배시시 웃었다.
“염려하지 말아요. 우리 혼담을 마무리 지으러 오신데요.”
백의영의 얼굴도 환해지더니 무한에게 예를 취했다.
“부주, 정말 감사드리오.”
“별말씀을. 천 낭자가 백 소단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거겠죠.”
“흥! 애송이 녀석이 늙은이처럼 구는 건 정말 못 봐주겠군.”
검마가 코웃음 치자 무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기 인생이 못마땅한 자는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지. 어려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분명해.”
혼잣말처럼 흘렸지만 방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이놈이?”
검마가 눈을 부릅떴다.
그때 천소향이 의자에서 내려와 검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르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소향을 보는 검마의 표정이 복잡했다.
검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주겠느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저 역시 함께 하겠습니다.”
백의영이 그녀 옆에 나란히 꿇어앉았다.
그러자 무한이 두 사람을 일으켰다.
“저 노인장도 원하는 바가 있어 그런 것이니 두 분은 지나친 예는 거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검마는 무한이 사사건건 자신의 심경을 건드리자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검마는 당대 천마 혁련후를 배출한 마천검가에서 지고한 신분으로 살아왔다.
전대 마천검가 가주의 친아우였고, 현 가주의 숙부이기도 했다. 마천검가의 원로로, 천마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괴팍한 성격에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던 검마이건만 지난 십 수 년 간 그럴 일이 없었다.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절절매고 알아서 대우해왔다. 무한처럼 말끝마다 토를 다는 놈은 수십 년래 처음이다.
그런데도 쳐 죽이지 못하는 게 분할 뿐이다.
“너희는 나가 있거라. 천 낭자와 할 말이 있다.”
검마가 무한과 백의영에게 말했다.
백의영이 주저했으나 무한이 소매를 잡아끌고 나왔다.
“별일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은 문밖에서 앞으로 할 사업에 대해 논의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검마가 나왔다.
검마는 말없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무한과 백의영이 다시 들어가려니 천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천소향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백의영은 검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했으나 조용히 돌아섰다.
무한 역시 백의영을 따라 나왔다.
“천하상단 일이 마무리 되었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갈 겁니다. 사업을 잘 부탁드립니다.”
“천하방까지 타고 가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뇨. 마차는 제게도 있습니다.”
“예, 그럼 사업이 안정되는 대로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작별인사를 하는데 천소향의 하녀가 와서 무한을 청했다.
“아가씨께서 검천부주를 뵙고 싶어 합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한이 바로 일어서자 백의영도 따라 일어섰다.
하녀가 백의영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소단주께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무한만 보자는 뜻이다.
백의영이 무한에게 말했다.
“무림의 일인가 봅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무한이 다시 천소향의 거처로 갔다.
천소향은 자신의 거처 다탁에 앉아 있었다.
무한이 자리에 앉자 천소향이 말했다.
“그분은 기막을 펼쳐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더군요. 부주께서도 그리할 수 있습니까?”
무한이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 노인처럼 넓게는 못 펼쳐도 다탁 주위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는 바깥을 향해 말했다.
“무흔 대협, 주위를 감시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어디선가 무흔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흔 대협이 바깥을 경계하니 다탁 주위만 막아도 충분할 겁니다.”
무한이 기를 운용하여 밀어냈다.
다탁 주위로 기막이 어리자 천소향이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저는 물론이고 천하상단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천소향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일은 무림, 특히 천하방과도 밀접한 일이라 아무래도 부주와 상의하는 게 좋을 듯 싶어 청했습니다.”
“어머님이 마천검가의 사람이셨습니까?”
치고 들어온 무한의 말에 천소향이 흠칫, 놀랐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천 단주를 뵙고 나서 추정해본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분과 나눈 이야기를 저와 상의해도 괜찮겠습니까?”
검마를 의식해서 무한이 말했다.
“그분은 제가 알아서 판단하라 했습니다. 생각해봤는데 부주께서 서현에서 일을 처리하신 걸 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소향은 이미 스스로를 백가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가상단은 검천부와 한배를 탄 셈이다. 그러니 천소향은 더더욱 무한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전대 마천검가 가주의 외동딸이었답니다.”
“……!”
무한도 놀랐다.
마천검가 사람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전대 가주의 딸이었다니.
“저분은…… 전대 가주의 친아우로 어머니께는 숙부십니다. 제겐 외종조부가 되시죠.”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마는 혈연을 찾아온 것이다.
“외종조부는 오랫동안 전대 마천검가 가주와 딸이었던 어머니가 천하방과의 전쟁 중 돌아가셨다고 알고 계셨답니다. 당시 전황은 무척 혼란스러웠고, 보고가 그리 올라와 믿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천소향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외종조부는 오랜 세월 두 분의 유해를 찾았는데 최근 전대 가주, 그러니까 외조부의 죽음에 음모가 있었다는 걸 알아냈답니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천 낭자의 존재를 알아내고 여기까지 온 것이군요. 핏줄이란 정말 진하군요.”
“저를 처음 본 순간 바로 알아차리셨다고 하더군요.”
천소향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혁련향, 어머님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소향(小香)이라 지으신 이유가 있었더군요.”
“저분이 전대 마천검가 가주의 친아우라면 마천 내에서 신분이 지극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단순히 핏줄을 찾아 마천을 배반했다는 오명까지 쓰면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습니다.”
천소향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역시 예리하시군요. 외종조부께서는 마천검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마천검?”
“마천검은 마천검가의 상징이자 신물이랍니다. 어머니께서 전장에서 살아남으셨다면 잘 보관했을 것이고, 핏줄인 제게 넘기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오셨답니다.”
“천 낭자는 마천검을 본 적이 있습니까?”
천소향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이 사실은 아무도 알아선 안 되겠군요. 어머니가 마천검가의 사람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천하상단은 물론이고 천 낭자와 백 형도 곤란해질 겁니다.”
“그래서 부주께 상의 드리는 겁니다. 외종조부는 마천검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 서현을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무한은 검마가 마천검을 찾으러 온 이유가 궁금했다.
마천검가의 신물이라지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천하방과 마천에 파란을 일으킬 가치가 있을까?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천소향이 말을 이었다.
“외종조부는 제가 검을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문제가 복잡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천 단주는 어머니의 신분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마천검을 봤다면 내력이 범상치 않은 검이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고, 어머니의 신분도 아셨겠지요. 그렇게 따져보면 아마도 모르고 계실 겁니다.”
“정말 모르셨을까요? 부부 사이였는데?”
“천 단주께서는 마천 사람이라는 것만 추정할 뿐 어머니께 신분을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소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면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겁니다. 마천검가의 외동딸과 그냥 마천도는 신분이 다르니까요. 마천검가 가주의 딸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천하상단은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철저히 신분을 감췄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군요.”
“중요한 건 검의 행방인데…….”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락가락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낭자의 어머니는 당시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마천검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어딘가 감춰두었을 겁니다.”
무한이 천소향을 주시하며 물었다.
“저라면 그 단서를 천 낭자에게 남겨 놓았을 겁니다.”
천소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보니 어머니가 직접 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비단으로 짠 향낭이었다.
색상이 무척 고왔는데 금색 수실로 갖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봐도 되겠습니까?”
무한이 살펴봤지만 평범한 향낭이었다.
그런데 문양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문양이 범상치 않군요. 어쩌면 외종조부께서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천소향의 표정이 복잡했다.
이를 본 무한이 물었다.
“외종조부께 이걸 드릴 겁니까?”
“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천소향이 되레 물었다.
이제 보니 이 향낭을 건네줘도 될지 판단하기 어려워 무한을 부른 것이다.
검마가 어머니의 숙부라지만 마천도다. 그것도 마천의 주축인 팔대마가의 수장 격인 마천검가의 원로다.
천소향은 명문정파인 무산파에서 수련을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마천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무한에게 상의를 청한 것이다.
“건네주세요.”
무한의 말에 천소향이 흠칫, 놀랐다.
“저분의 별호가 검마입니다. 마천검이 마천검가의 신물과도 같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으려 들 겁니다. 그 와중에 천 낭자와의 관계가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건네주어 서현을 떠나게 하는 게 좋습니다.”
“그게 마천을 이롭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요?”
무한이 천소향을 무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지금 제게 가장 위협이 되는 적이 누군지 아십니까?”
“예?”
무한이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하자 천소향이 의아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