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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84화 (84/250)

84화

집으로 돌아온 무한은 천평산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천 낭자의 어머니가 마천도라면 검마와 관계가 있을 수 있지.’

평범한 마천도가 아닐 것이다.

‘검마가 불원천리, 마천을 배신하고 찾아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겠지.’

누굴까?

그건 검마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고벽후가 찾아왔다.

“도운종과 비찰대가 서현으로 왔다.”

“검마의 행적이 노출된 건가요?”

황산에서 검마의 행적을 못 찾았다면 인근 현을 뒤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현 밖에 머물면서 은밀히 탐색하고 있더군.”

“검마와 약속한 한 달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공교롭군요.”

“대체 왜 그런 약속을 한 거냐?”

고벽후는 무한이 한 달 기한을 요청했을 당시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무한이 말했다.

“검마가 마천을 배신했다는 게 사실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그래. 마천검가는 마천 팔대마가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지. 그런데 그 가문의 수뇌가 배신을 한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지.”

“그럼에도 마천에 쫓기고 있었지요.”

“위장이었을 게야. 그 때문에 우리는 감숙 북부를 잃었지.”

“꼭 그렇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마천의 수뇌 검마가 고작 감숙 북부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삼는다?

“그렇다면 검마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냐?”

“검마 정도 되는 사람이 목숨이 아까워서 제 권유를 받아들였을까요?”

“…….”

“검마는 여기서 할 일이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으음.”

고벽후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검마가 서현으로 올 만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습니다.”

“서현…… 천하상단?”

“비슷합니다. 다만 천하상단이 아니라 천 낭자 때문인 듯합니다.”

“천 낭자?”

고벽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마가 내상을 무릅쓰고 내공 치료까지 한 게 이상하기는 했지. 하지만 천 낭자와 검마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데?”

“짐작이 가는 바는 있는데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천평산과 나눈 대화를 밝힐 수는 없었다.

“검마가 무슨 이유로 왔든, 시간이 없다. 비찰대가 여기를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야.”

고벽후는 한시바삐 검마를 잡아 서현을 떠나고자 했다.

“검마를 강제로 제압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는 소마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럴 테지. 이제 내상도 어느 정도 회복했을 것이니 제압하기가 더 힘들긴 하겠군.”

무한이 검마에게 시간을 벌어준 걸 탓할 만한데, 고벽후는 그러지 않았다.

‘과연 호남아다.’

무한이 고벽후를 보며 말했다.

“싸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검마가 순순히 잡혀서 감숙으로 간다고?”

무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검마란 존재를 우리도 이용하자는 겁니다.”

“…….”

“죽은 유 장로는 마천과 전쟁을 벌일 심산이었습니다.”

고벽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행 작전은 군사부와 장로회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유 장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당연하지. 천하방 강경파가 벌인 짓이야.”

천하방 장로회의나 군사부는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다.

“그 발목을 잡은 게 고원의 맹약이고, 맹약의 집행자가 고 대형입니다.”

“…….”

“군사부에서는 고원의 맹약은 거론하지 않고, 갑자기 마천이 침공한 걸로 공표하고 멸마대는 실종처리 했죠.”

고벽후의 안색이 굳었다.

“이제 군사부는 아마도 검마와 고 대형을 동시에 처리하려 할 겁니다. 비밀리에 무력대를 보낸 이유입니다.”

“흥!”

고벽후가 코웃음을 쳤다.

“검마와 고 대형이 서로 싸우다 죽었다고 발표하고, 고원의 맹약 집행자가 마천에 의해 죽었다는 구실로 맹약을 파기할 겁니다. 그러면 전쟁이 시작되는 거죠.”

고벽후가 놀란 시선으로 무한을 보았다. 잠시 후,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

“아마도 십중팔구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더더욱 검마를 잡아야지. 군사부에서 명분을 잡을 수 없도록 해야 하니까. 검마를 잡아 사실을 밝히면 군사부 역시 방내 문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

“검마를 데리고 가면, 두 분 모두 군사부 손아귀에 들어가는 겁니다. 조작하기 쉽죠.”

“으음.”

고벽후가 신음을 흘렸다.

그로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소마에게 가면 어떻겠나? 마천의 전향자를 잡아 준 대가로 감숙지부를 돌려받는다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고벽후가 끄응, 하고 다시 한 번 침음을 삼켰다.

말을 꺼냈지만 그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마에게 검마와 감숙지부를 양손에 쥐어주고 어느 하나를 택하라면?

그가 생각해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

무한이 말했다.

“형님은 본방으로 가셔야 합니다.”

“뭐라고? 금방 강경파가 수작질을 할 거라 하지 않았냐?”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로 들어가야죠. 강경파가 뭘 꾸미고 있는지 알려면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그리고 검마는 강경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변수로 놔둬야 합니다.”

고벽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검마를 놔주라니.

“검마가 천 낭자를 찾은 건 단순한 인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전향 운운하며 마천을 나오지 않았겠지요.”

“으음.”

“마천 역시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가 하는 걸 지켜보면 마천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야.”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그가 자유로워야 강경파를 견제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강경파가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 고벽후와 검마 둘 모두를 잡아야 확실하게 누명을 씌울 수 있다.

“으음…….”

고벽후가 침음을 삼켰다.

이대로 천하방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검마를 잡지 않는다면 그간 사라졌던 명분조차 없다.

“잠시 고초를 겪기는 하겠죠. 유 장로를 죽인 책임을 물을 것이고, 어쩌면 마천과 내통했다는 누명도 씌울지 모릅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나를 살릴 방도도 있겠군.”

“방도랄 것은 없습니다. 다만 고 대형이 갑작스레 귀환하면 강경파도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라고 봅니다. 그 틈을 타서 여론을 만들면 됩니다.”

“여론?”

“그건 제게 맡겨 주시죠.”

한참 고민한 고벽후가 결심을 했다.

“좋다. 네 말대로 하자.”

“감사합니다.”

“단지 네 말 때문만은 아니다. 멸마대를 실종처리 하다니. 그건 언제든 제 맘대로 처리하겠다는 뜻 아니냐?”

멸마대를 실종처리 한 것은 향후 편한 대로 써먹을 패로 여긴다는 뜻이다.

실종으로 해놨다가 나중에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고, 비밀리에 죽이고 마천과의 전쟁 구실로 삼을 수도 있다.

자신만 얽혀 있다면 모르지만 멸마대 형제 마흔 명의 명예가 달린 일이다.

지금은 실종이지만 마천과 결탁한 걸로 뒤집어씌우면 가족들까지 고초를 겪을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멸마대가 오명을 뒤집어 쓸 수는 없지.”

고벽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귀방하겠다. 군사부 놈들이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확인해야겠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단 제가 방으로 돌아간 다음 돌아오셔야 합니다.”

“바로 귀방하는 건 아닌가?”

무한은 서현으로 온 목적을 모두 이뤘다.

하지만 검마와 천소향의 관계를 확실하게 파악할 생각이다. 당장은 관계가 없어도 향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시일이 좀 걸릴 겁니다. 백가상단에 잠시 머무르시다 표행으로 위장하여 오시면 됩니다.”

“표행이라니?”

“백가상단이 천하방 성 밖 마을에 지부를 세운답니다. 그곳으로 물자를 보내는 표행이 있을 겁니다. 그때 함께 가면 될 겁니다.”

무한이 이미 무사히 귀방할 방도까지 생각해둔 걸 알자 고벽후는 왠지 든든했다.

“그러지. 그동안 좀 쉬어야겠다. 저 늙은이를 뒤쫓느라 개고생 했으니 말이야.”

“그러셔야죠.”

무한이 전낭을 꺼내 건넸다.

“저번에 준 것도 남았다.”

“감숙에 있는 형제들도 생각하셔야죠. 부족할 겁니다.”

멸마대의 남은 인원은 난주에 은신하고 있다. 그쪽으로 보내라는 뜻이다.

고벽후가 크게 웃었다.

“하하. 부자 아우를 두니 이런 게 좋구나.”

고벽후는 사양 않고 받았다.

“혹시 먼저 도착하시면 백가상단 지부에서 기다려주시죠.”

“알겠다.”

고벽후가 떠나자 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검마를 상대해야 한다.

다음 날.

무한이 백가상단 검마의 거처로 갔다.

“또 무슨 일이냐?”

죽림 평상에서 좌정하고 있던 검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도운종과 비찰대가 서현에 왔답니다.”

“그까짓 놈들이 뭐라고 내가 신경 써야 한단 말이냐?”

검마가 좌정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공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검마는 오만한 표정이었다.

“노인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천 낭자에게 화가 미칠 수도 있죠.”

검마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무한은 검마의 중단전에 맺히는 살심을 느꼈다.

마인은 역시 마인이다.

“저를 죽인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공연히 헛심 쓰지 마시죠.”

“대체 뭘 원하는 거냐?”

“노인장과 천 낭자가 무슨 사이인지, 노인장이 뭘 원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더 캐고 싶지는 않군요. 누구나 저마다 감추고 싶은 사정이 있겠죠.”

“흥! 교활한 놈.”

“저는 이제 방으로 돌아갑니다. 아! 고 대형도 더는 쫓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냐?”

“제가 내기에 진 셈이니, 노인장은 마음대로 떠나셔도 됩니다.”

검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무한을 노려봤다.

그때 백의영이 기다란 보따리를 들고 왔다. 생김새로 봐서 검을 싸서 가져온 모양이다.

“부주께서 와 계셨군요.”

무한은 백가장에 와서 곧장 검마를 찾아왔기에 백의영은 무한이 있는 줄 모르고 온 것이다.

백의영이 보따리를 풀어 검을 꺼내더니 양손으로 받들어 검마에게 내밀었다.

검마는 묵묵히 백의영이 내민 검을 바라보았다.

“백가에서 내려온 검입니다. 향아를 구해준 답례로 부족하기는 하나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검마가 검을 받아 뽑았다.

석 자 가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리한 기운이 방 안에 퍼졌다.

보기 드문 명검이었다.

“상가에 이런 검이 있었군.”

검마가 검을 살펴보더니 납검을 하고는 백의영에게 돌려주었다.

백의영이 의아해하였다.

“내가 백가에게 답례를 받을 이유가 없지.”

“향아는 제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검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의영이 무안해하는데 무한이 말했다.

“이분은 천 낭자와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구한 것도 그 인연에 따른 것이니 백 형은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마가 버럭, 화를 냈다.

“흥! 뭐든 네 마음대로 해석하는구나. 그러다 큰코다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백의영에게 말했다.

“보답은 필요 없다. 대신 천 낭자를 봤으면 한다.”

검마가 혹시나 거절할까봐 덧붙였다.

“상세가 완전히 치유됐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백의영으로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검마가 나서자 무한도 따라갔다.

“너는 따라오지 마라.”

“따라가는 거 아닙니다. 서현을 떠나야 하니 천 낭자에게 작별인사라도 해야죠.”

“그놈의 주둥이, 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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