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천이금이 아버지 천평산을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책임을 져야겠지요.”
이어 몸을 돌려 천종해를 슬쩍 보곤, 좌중을 향해 말했다.
“전쟁에서 패하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상단 역시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사람들이 천하상단을 신뢰할 것입니다.”
천평산이 물었다.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천이금이 자신의 옆에 있는 보따리를 들었다.
“제가 관장하는 천하상단의 자체 사업 중 일부입니다. 검천부에서 손해 본 정도는 될 겁니다.”
천이금이 보따리를 들어 무한의 앞에 놓았다.
이를 본 천종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하여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일소단주가 지도록 한 것일까?
놀란 천종해의 시선이 아버지 천평산에게 향했다.
천평산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
천종해는 가슴이 서늘했다.
천이금이 자신이 저지른 손해를 책임진다는 의미는 후계자 다툼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천종해가 망연자실 하는데 천역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보따리를 하나 들고 앞으로 나왔다.
“단주. 상인이 손해를 입혔으면 이자를 지불해야 합니다. 천하상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저도 보태고자 합니다.”
천역금 또한 무한의 앞에 보따리를 놓았다.
뒤이어 천가금도 일어나 나왔다.
“검천부 사업은 천하상단의 기틀을 잡는 데 초석이 된 바 있습니다. 이자를 지불했다고 상도의를 다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약간의 사업을 떼어 도의를 지키고자 합니다.”
천가금도 보따리를 놓고 돌아갔다.
천종해의 낯빛은 이제 흙빛이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천하상단이 크게 손실을 본 것이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는데 천평산이 냉랭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이소단주. 네가 검천부에 입힌 피해는 천하상단에서 배로 갚았다. 너는 오늘부로 천하상단 사람이 아니다. 네가 맡은 사업을 가지고 떠나라. 이후로 너는 천하상단의 이름을 쓰지 못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모두가 놀랐다.
천이금조차 놀라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천평산을 보았다.
“아…….”
천종해가 비틀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단주가 아니라 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보름 안에 사업을 정리해서 천하상단을 떠나야 할 것이다.”
천평산이 말을 마치고 무한을 보았다.
이 정도면 됐느냐는 뜻이었다.
무한의 표정은 담담했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재신도 결국 아버지로구나.’
천평산이 아들을 축출한 결정에 다른 사람들은 놀랐지만, 무한은 오히려 아들의 목숨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천평산은 그간의 일을 조사했을 것이고 천종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죄를 따지지 않고 묻어버리려는 것이다.
천종해가 도천부 사업을 가지고 독립하면 무한도 손대기 어려울 것이다.
무한도 당장 천종해를 죽일 생각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했다.
“천하상단의 상도에 감명 받았습니다.”
무한이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를 보는 천하상단의 형제들을 속이 쓰라렸다.
천하상단의 삼 할이 무한에게 넘어갔다.
무거운 침묵을 헤치고 무한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천역금과 천가금이 내놓은 보따리를 들었다.
“다만 제 계산은 다릅니다.”
다르다니?
천하상단 형제들의 가슴이 철렁했다.
뭘 더 내놓으란 말이냐?
무한이 천천히 천가금 앞으로 가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천부에 대한 도의를 지키기 위해 사업을 내주었다고 하셨지요. 검천부 역시 천하상단의 도움으로 기틀을 다졌으니 이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무한이 보따리를 천가금 앞에 놓았다.
“!”
모두가 놀라 쳐다보기만 하는데 무한이 천역금에게 다가가 남은 보따리를 놓았다.
“검천부 사업을 천하상단에 위탁하였으니 사실 동업을 한 셈이죠. 손해를 봤다고 동업자에게 이자까지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천역금과 천가금의 얼굴에 갖가지 표정이 스쳤다.
상인이 자신의 사업을 떼 주는 건 살을 베어주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사업을 넘기려 하는데 당사자가 돌려준 것이다.
받아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혹시 이걸로 부족하다고 더 내놓으라는 건가?
형제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무한은 다시 천이금이 내놓은 보따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보기에는 작은 보따리지만 그 안에 든 장부는 하나하나가 수십만 냥의 가치에 달하는 사업들이다.
무한은 하나 남은 보따리를 들고 천이금에게 갔다.
“검천부 사업 실패에 대해 천하상단이 책임지겠다고 하셨지요. 천하상단의 명예를 위해 이 보따리는 받겠습니다.”
천이금이 터져 나오려는 침음을 삼켰다.
동생들 사업은 돌려주고 자신의 것만 취하겠다니 내심 속이 쓰렸다.
“대신, 이 사업을 일소단주께서 키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무한이 보따리를 천이금 앞에 놓았다.
천이금의 안색이 금방 환해졌다.
적어도 반은 건진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무한이 보따리를 돌려주고 천평산을 향해 포권을 했다.
“분란의 근원이 사라졌으니 검천부와 천하상단의 우의가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천평산의 눈꺼풀이 연신 떨렸다.
‘이, 이놈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재신이라 불리는 천평산도 수백만 냥에 이르는 사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무한의 배포에 질렸다.
자신도 저 나이에 저런 배포는 없었다.
아들들이 보따리를 내놓으며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봤다.
그런데 무한은 서슴지 않고 돌려주었다.
문득 그의 뇌리에 심양조가 떠올랐다.
- 방주.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입니다.
- 하하. 그런가? 지금 세상을 보면 자네 말이 맞을지 모르지.
- 천하방을 키우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제게 맡겨주시죠.
- 그렇게 하지. 그런데 하나만 묻지. 세상을 움직이는 게 돈이라고 했나? 허면, 돈을 움직이는 건 뭔가?
- 네?
- 사람일세. 사람이 있으니 돈이 도는 것 아닌가. 하하하.
오래 전 심양조와의 대화다.
야심찬 젊은 상인이었던 그를 심양조가 받아주며 한 말이었다.
‘이놈이…….’
천평산의 가슴이 진탕했다.
‘진정 검신의 피를 이었구나!’
무한은 자신의 눈앞에서 세 아들을 휘어잡았다.
수백만 냥을 내던진 무한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일이 참 보기 좋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천평산은 무한이 천종해에게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한이 천평산을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단주의 차를 한 잔 마시고 싶군요.”
독대를 청한 것이다.
천평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처리할 일이 많으니 조만간 연락을 주겠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한은 천종해가 내놓은 보따리를 들고 천평산의 전각을 나왔다.
귀영은 밖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서 있다 다가오는 무한을 향해 속삭였다.
“혹시 미치신 거 아닙니까?”
“뭐가요?”
“돈을 준다는데 왜 마다하는 거냐고요?”
귀영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무한이 웃으며 물었다.
“귀 호위는 백 냥이 생기면 뭘 할 겁니까?”
“크크, 기루에 가서 마음껏 쓰겠죠. 흐흐.”
귀영이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듯 침을 흘렸다.
“만 냥이 생기면 뭐할 겁니까?”
“으음. 그러면 집을 사고, 투자도 좀 하고, 혼인도 하고…… 흐흐응.”
귀영이 콧소리까지 내며 흐뭇해하였다.
“백만 냥이 생기면요?”
귀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엄청난 돈이다.
이것저것 할 일을 생각하는데 무한이 말했다.
“백 냥 쓰는 게 제일 좋죠?”
“엥?”
“돈 많아 봐야 머리만 복잡하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백만 냥이면 하루에 백 냥씩, 기루를 가도 몇 년…… 대체 몇 십 년을 갈 수 있지?”
귀영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을 하는데 무한은 어느새 저 멀리 가고 있었다.
귀영이 뒤따라가며 외쳤다.
“평생을 쓸 수 있다고요!”
무한은 그 길로 백가상단으로 갔다.
백의영은 무한이 내놓은 보따리를 받아 들고 감개무량한 듯 두 눈을 감았다.
백가상단이 살 길이 열린 것이다.
“바로 모든 사업장으로 사람을 보내 인계를 받겠습니다.”
“결과는 검천부 앞으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운남으로 간 사람은 언제쯤 돌아올까요?”
처리할 일이 하나 남았다.
백의영이 안정적으로 사업하려면 천하상단과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
“최대한 서두르라고 했습니다. 수향초를 바로 구할 수만 있다면 최장 한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구할 수 있는 약초가 아닐 텐데.”
무한의 염려에 백의영이 자신했다.
“그동안 거래했던 운남상단에 기별을 했으니 미리 구해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전서구도 날아갈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다.
백의영은 호남까지 백가상단의 지부와 지부를 이용하여 전달하고, 그 너머는 거래가 있던 상단에 부탁하여 운남상단까지 미리 연락을 해놓았다.
전서구에서 전서구로 이어지는 연락망은 운남까지 며칠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호남지부에서 사람이 출발해서 중간 중간 말을 바꿔가며 달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조정의 파발이 빠르다고 하는데 상단은 그 이상일 수도 있겠네.’
무한은 상단의 긴밀한 연락망에 놀랐다.
“천하방 앞에도 백가상단 지부를 세우겠습니다. 급한 연락이 있으면 백가상단 연락망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천하상단 천이금이 자신의 사업 일부를 검천부로 넘기겠다고 했는데, 계속 맡겼습니다.”
언제고 알 일이니 솔직하게 미리 말했다.
백의영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천이금의 사업까지 가져왔으면 반발이 심했을 겁니다. 백가상단은 이번에 넘겨주신 사업을 일으키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천 낭자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암경이 해소된 후 회복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백의영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한을 보내준 것만 같았다.
“이번 일로 저도 느끼는 바가 컸습니다. 그래서 고수 두 분을 초빙했습니다. 무흔 대협은 부주께 돌아가셔도 될 겁니다.”
백의영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평산이 나선 이상 천종해는 더 이상 백가상단에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다.
백가상단에서의 일을 마무리한 후 무한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천평산과 독대하는 것과 검마를 회유하는 일만 남았다.
***
무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집에서 무공 수련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 고벽후와 멸마대 형제들이 와서 술을 마시고 갔다.
며칠 후 백의영이 찾아왔다.
“수향초를 구했답니다. 지급으로 달려오는 중입니다.”
“며칠이나 걸릴까요?”
“말을 갈아타고 뱃길도 이용한다니 열흘 정도 걸릴 겁니다.”
천평산이 천승무를 보냈다.
무한과의 독대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다.
무한이 날짜를 따져보고는 귀영에게 말했다.
“제가 폐관수련 중이라고 하고 사흘 후 끝나니 그때 갈 거라고 전하세요.”
귀영이 전하자 천승무가 불쾌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재신이 아무 때나 만날 사람인가? 건방진 놈…….”
사흘이 지난 뒤 수향초가 왔다.
무한은 백의영에게 수향초를 받아 천하상단으로 갔다.
이번에도 천승무가 기다리고 있다가 천평산에게 안내했다.
“종해에게 아량을 베풀어 준 점 고맙게 생각하네.”
천평산은 여전히 곁에 주전부리를 두고 먹고 있었다.
“소향의 치료에도 나서주었다고, 이금이 그러더군. 천하상단이 크게 빚을 졌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뭔가?”
“마천과 천하상단은 무슨 사이입니까?”
천평산의 볼이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천이라니. 천하상단은 마천과 거래하지 않네.”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뜻입니까?”
천평산의 두꺼운 눈꺼풀이 흔들렸다.
몸집이 비대한 만큼 얼굴에도 살이 많아 평소 표정을 알기 어려운 천평산이다.
‘뭔가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