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검마의 목적이 천소향이었다면 정말 공교로운 일일 것이다.
천소향이 백의영을 구하기 위해 중상을 입은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무한이 검마를 백가상단으로 이끈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고? 그럴 수 있나?’
무한은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적을 의식하며 살았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그 이면에 숨은 누군가의 의도를 따져보는 게 몸에 뱄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경우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소단주, 천 낭자는 이제 괜찮을 겁니다. 요양만 잘하면 됩니다.”
“부주의 은혜, 충심으로 보답하겠소.”
“별말씀을.”
무한이 가볍게 예를 취하고 고벽후와 함께 나왔다.
멀리 검마가 자신의 거처로 가는 게 보였다.
고벽후가 검마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별일이군.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이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남을 구하다니.”
“고 대형, 혹 감숙에도 천하상단 지부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새외와의 무역은 모든 상단이 나서서 하니까.”
“천하상단과 마천의 접점이 있을까요?”
“상단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아. 하지만 천하상단 만큼은 마천과 거래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공식적으로는 그렇겠죠.”
“하기는…… 암중으로 하는 것까지 알 수는 없지. 돈이면 영혼도 판다는 상인들이니 은밀히 거래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가는데 백가상단 대문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고벽후가 묻자 장초가 나는 듯이 달려갔다가 돌아와 고했다.
“천하상단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천 낭자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무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바람 잘 날이 없군.’
대문 쪽으로 가니 문 한가운데 버티고 선 백의영이 보였다.
대문 앞에는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고 훤칠한 사내가 내리는 중이었다.
“누굽니까?”
무한이 다가가며 묻자 백의영이 침중한 어조로 일러주었다.
“천하상단 일소단주 천이금이오.”
마차에서 내린 천이금이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의영아. 오랜만이구나.”
“이금 형님이 백가상단을 찾는 날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천이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장사를 하다보면 서로 앙금이 생길 수도 있지 않느냐? 지난 일을 일일이 기억하고 어찌 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냐.”
“하하. 그렇군요. 천하상단은 지난 일을 다 잊은 모양이군요.”
백의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천이금이 주위를 돌아보다 무한을 발견하더니 말했다.
“검천부주가 와 있는 모양이군. 종해에게 들었다. 검천부의 사업을 맡게 됐다지.”
“하늘이 백가를 저버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 역시 백가의 일이 늘 안타까웠다.”
“그랬다니 의외로군요.”
천이금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 일은 종해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한 일이다. 솔직히 나는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
“내가 소향과 네가 정혼하는 걸 반대했다는 건 인정하마.”
“그랬군요. 우리 사이에 남은 게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냉랭한 백의영이 태도에 천이금은 기분이 상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지난 일에 연연하는데 과연 큰 사업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
“찾아오신 이유를 물었습니다.”
천이금이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향이 여기 있다고 들었다. 데려가려고 왔다.”
백의영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보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향은 천하상단 사람이다. 백가에서 보내고 말고 할 사안이 아니다.”
“소향은 이제 백가의 사람입니다.”
천이금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의영아. 자중해라. 혼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어찌 소향이 백가의 사람이란 말이냐?”
“그건 천종해에게 물어보면 아실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가려질 것이다. 그때 사실이 밝혀진 뒤 내가 사과할 일이 있다면 사과하겠다. 하지만 우선은 소향을 데려가야겠다.”
천이금은 이미 내막을 알고 온 듯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보낼 수 없습니다.”
“상인이 합의를 하지 못하고 힘으로 해결해서야 되겠느냐? 원하는 게 뭐냐?”
“조용히 돌아가 주시길 원합니다.”
천이금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네가 나를 막다른 길로 모는구나.”
천이금이 손을 들자 따라 왔던 천하상단의 무사들이 앞으로 우르르 나왔다.
천이금은 옆에서 지켜보는 무한이 신경 쓰였다.
“이 일은 천가와 백가의 사적인 문제이니 검천부는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소.”
무한은 말없이 한 발 물러났다.
고벽후와 연추산 등이 있으니 염려할 게 전혀 없었으니까.
“밥값을 할 때인가 보군.”
아니나 다를까, 고벽후가 눈을 찡긋하고는 어슬렁어슬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면서 척, 도를 뽑아 어깨에 걸쳤다.
무한은 하마터면 웃음을 뿜을 뻔했다.
고개를 쳐들고 좌우로 목을 꺾으며 가는 모습이 마치 동네 불량배 같아 보여서였다.
‘근데 반월도는 어찌 하고.’
고벽후가 든 건 반월도가 아니라 주방간에서 쓰는 식도였다. 반월도가 워낙 눈에 띄는 칼이라 식도로 대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천이금이 인상을 쓰고는 백의영에게 말했다.
“꼭 이래야겠느냐? 사람들 다친다.”
고벽후가 백의영 앞을 가로막더니 식도를 흔들었다.
“이봐, 그런 걱정은 말고 거기 애들이나 보내. 살살 다뤄주마.”
천이금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일개 호원무사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는 자였다.
“백가가 다됐군. 일개 호원무사가 설치다니. 오늘 싸우자고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천하상단을 무시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누가 손을 봐줘라.”
그러자 천하상단의 무사 중 둘이 달려 나갔다.
“해치지는 말고.”
천이금이 혹시나 싶어 한마디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말이 그들을 살리는 셈이 됐다.
빠각!
빡!
고벽후가 널찍한 도신으로 무사들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갈겼다.
아주 단순한 움직임이었으나 워낙 빠르니 막을 길이 없었다.
천하상단 무사들이 개구리처럼 대자로 쫙, 뻗었다.
천이금의 안색이 홱 변했다.
호원무사인 줄 알았더니 보기 드문 고수다.
그 뒤로 연추산과 오상, 장초와 홍염이 섰다. 그들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다.
‘검천부의 일을 맡더니 투자를 많이 한 모양이군. 이런 고수를 초빙하다니.’
백의영도 놀랐다.
내력이 있는 자라는 건 알았지만 천하상단의 일류무사들을 한 방에 보낼 고수일 줄은 몰랐다.
‘검천부주의 주위에는 정말 고수가 많구나.’
무흔과 검천사위도 무시 못 할 고수인데 고벽후는 한술 더 뜨는 것 같았다.
천이금은 용의주도한 자였다.
애초에 백의영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천평산도 좋게 말로 설득하여 천소향을 데려오라고 했다.
체면이 크게 상했지만 그 정도로 눈 깜박할 위인이 아니다.
‘피를 보지 않고 어떻게 소향을 데려가야 할까?’
천이금이 머리를 굴리는데 무한이 나섰다.
“두 분, 잠시만 멈추십시오.”
무한은 천이금의 고민을 알 것 같았다.
‘천이금은 천평산의 말을 받아 온 대리인일 뿐이다.’
무한이 백의영과 천이금을 번갈아보고 말했다.
“천 낭자는 지금 중상을 입어 거동할 형편이 아닙니다. 천하상단 또한 자신의 혈육을 홀로 남의 집에 둘 수는 없겠지요.”
모두 무한을 보았다.
“천 낭자의 상세가 호전될 때까지 천 대공자가 백가상단에 머무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이금이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천소향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천평산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렵다.
“나는 좋다. 설마 백가에서 나를 박대하지는 않겠지?”
천이금이 무한의 제의를 받아들이자 백의영도 승낙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중재에 나선 무한의 면을 생각해서 받아들였다.
“천하상단의 대공자께서 머물기에는 누추할 겁니다.”
“상인이라면 찬바람 맞으며 노숙을 할 때도 있는데 지붕만 있다면 뭘 더 바라겠나?”
천이금이 대범하게 말했다.
그는 고벽후 등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듯 물었다.
“이 다섯 분은 범상치 않은데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
“무명소졸이 어찌 일일이 이름을 밝히고 다니겠소. 모르는 게 좋을 것이오.”
고벽후가 잘라 말하고는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고벽후의 뒷모습을 보는 천이금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그는 억지로 안색을 풀고는 백의영에게 말했다.
“소향이 있는 곳이 어디냐?”
백의영이 천하상단 무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들어올 수 없소.”
천이금이 고개를 돌려 무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바깥에서 대기해라.”
천하상단 무사들이 마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천이금이 자신의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됐냐? 이제 나 혼자다.”
우연히 천이금의 손을 본 무한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무공을 익혔구나.’
천종해처럼 천이금도 무공을 익혔다. 짐작하기에 일류는 넘어선 듯했다.
‘상인이 무공을 익히기는 쉽지 않은데.’
백의영이 천이금을 안내하여 사라지자 무한은 백가상단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귀영이 따르며 말했다.
“그냥 갑니까? 저 둘이 아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주먹다짐까지야 벌이진 않겠지요.”
귀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천하방으로 돌아갑니까?”
“그건 왜요? 도천부에서 묻던가요?”
무한의 말에 귀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중첩자 노릇하기 힘드네요.”
“아직 멀었다고 하세요.”
“진짜로 멀었습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죠.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아니 온 것만 못하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서현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든 귀영은 아쉬울 게 없었다.
고강후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먹고 싶은 음식, 마시고 싶은 술 다 먹을 수 있다.
“아주아주 오래 걸릴 거라고 전하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천하상단에서 사람이 왔다.
“단주께서 뵙고자 합니다.”
무한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갑시다.”
귀영과 검천사위가 뒤를 따랐다.
천하상단에 이르자 대총관 천승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기다리고 계시네.”
천승무를 따라 천평산의 전각으로 갔다.
전각 앞에는 천하상단의 무사들이 도열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무척 무거웠다.
무한이 들어서자 정면 단상 커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천평산이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우측으로 천이금, 천종해, 천역금과 천가금 네 형제가 차례로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대총관 천승무를 비롯한 여섯 명의 총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한의 자리는 맞은편 좌측이었다.
자리에 앉자 천평산이 천종해를 불렀다.
“이소단주.”
천종해가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예. 단주.”
“일전에 검천부 사업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넘기라고 했는데 어찌 됐느냐?”
“이미 정리했습니다. 인수인계만 하면 됩니다.”
“바로 넘겨라.”
“예.”
천종해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나와서 무한 앞에 놓았다.
무한은 말없이 보따리를 보았다.
천평산이 큰아들을 불렀다.
“일소단주.”
“네. 단주.”
천이금 또한 천평산을 단주로 호칭했다. 이 자리는 천하상단 수뇌부들의 공식모임이라는 뜻이다.
“이소단주가 검천부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어찌하는 게 좋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