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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72화 (72/250)

72화

늦은 밤.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무흔 대형?”

귀영은 언제부터인가 무흔을 대형으로 칭하고 친한 척 들러붙었다.

물론 무흔은 일체 무시한다.

무흔은 귀영을 본 척 만 척, 무한에게 다가와 포권을 하고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말씀하신 대로 백 공자가 암습을 당할 뻔했습니다.”

“무사한가요?”

“검천사위가 일차 저지를 하고 제가 이차 공격을 막았는데 삼차 공격이 있었습니다.”

검천사위라면 염량 등을 말한다.

“백 공자는 왼팔에 자상을 입었습니다만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소향이라는 낭자가 크게 다쳤습니다.”

“예? 천 낭자가 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소향이 왜 백가상단에 있었던 거지?

하필이면 그 시각에?

“죄송합니다. 제가 이차 공격을 막는 사이 마지막 자객이 살수를 펼쳤는데 천 낭자가 몸으로 막았습니다. 가슴에 칼을 맞았습니다.”

가슴에 자상이라면 여인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부상이다.

“아, 안타까운 일이네요. 무척 예쁜 낭자였는데…….”

귀영은 백의영과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 나타났던 천소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 공자 가슴도 찢어졌겠군요. 정혼했던 낭자가 다쳤으니. 얼마나 다쳤던가요? 혹시?”

귀영이 자신의 가슴을 베는 시늉을 했다.

가슴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거냐는 뜻이다.

무흔이 노려보자 귀영이 시선을 돌렸다.

무한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화수전이 대단하기는 하군요. 염 호위와 무흔 대협의 방비를 뚫다니.”

“죄송합니다.”

무흔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대협께서 죄송할 일이 아니지요. 오히려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협이 아니었으면 백 형과 천 낭자는 죽었을 겁니다.”

무흔이 무한을 보는 눈빛이 출렁거렸다.

질책을 예상했는데 마치 그 자리에서 본 듯 자신의 공을 알아주었다.

“어쩌면 다시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며칠만 잘 부탁드립니다.”

“차라리 천하상단을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염 호위 생각도 같습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천하상단 모든 이가 이 일에 동조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분명 사주했습니다.”

“천하상단이라면 자정 능력이 있을 겁니다.”

무흔과 귀영은 무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하상단을 박살내러 온 게 아니었습니까?”

귀영이 물었다.

“제게 박살날 천하상단이 아니죠. 그럴 이유도 없고요.”

“이유가 왜 없습니까? 천하상단이 얼마나 많은 사업을 말아먹었는데요.”

“돌려받아야죠. 그러기 위해서 기다려야 합니다.”

“갑자기 순진한 척 하시네? 이미 처먹은 걸 순순히 토해낼 사람은 없다고요.”

“말조심해라.”

듣고 있던 무흔이 귀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싸늘했다.

귀영이 입을 닫았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천종해가 설치면 설칠수록 답이 빨리 나올 겁니다.”

무한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만 가보시죠.”

누군가 오고 있었다.

이제 어지간한 이들의 기운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다.

무흔이 창밖으로 사라지고 귀영은 대들보 위로 올라갔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현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천부주 계신가?”

있는지 뻔히 알고도 묻는 소리다.

“들어오시죠.”

현승이 들어왔다.

낯빛이 부드럽다.

“미안하게 됐네. 놈들의 배후를 캐느라 시간이 걸렸지 뭔가. 확인하니 자네 말이 맞더군. 지현께서 굳이 확인할 것 없이 증언에 수결만 받고 자네를 돌려보내라 했네.”

“잘됐군요.”

“어서 가시게. 내가 배웅하겠네.”

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밤에 나가라고?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지 않겠나?”

무슨 꿍꿍이인지 현승이 나가기를 재촉했다.

어두운 하늘에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무한이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읽던 책 몇 권이다.

무한이 책을 보따리에 넣어 묶으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객사의 음식은 어디서 만드는 겁니까?”

“외원 주방간에서 담당한다네. 그건 왜 묻나?”

현승이 의아해했다.

“이 지방 음식이 아니더군요.”

“경성 쪽 사람이네. 현령께서 워낙 입맛이 까다로우셔서 부임 올 때 숙수를 여러 사람 데려왔다네.”

“아하.”

“어서 가세.”

현승은 어떻게든 빨리 무한을 내보내려는 눈치였다. 그는 서현부 정문까지 나왔다.

“죄인들은 어찌되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려 했으니 모두 참수될 걸세.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서현부 담장 너머를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비가 올 듯하구만. 이걸 쓰고 가게.”

현승이 선심 쓰듯 가지고 있던 우산을 건네주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멀리 나가지 못하네. 밤길 조심해 가게.”

무한이 발걸음을 떼자마자 서현부 육중한 대문이 닫혔다.

‘너무 뻔하군.’

그만큼 상대가 조급하다는 뜻이다.

비가 오는 밤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걸린 등도 군데군데 꺼져 있었다.

- 부주, 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무흔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한이 손을 내밀자 허공에서 검이 날아와 잡혔다.

- 귀 호위에게 서현부 외원 숙수와 옥에 갇힌 죄인들을 빼내라고 하세요.

- 앞에 매복이 있습니다.

무흔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여 무한에게 경고했다. 자신이 뒤따르겠다는 뜻이다.

- 이번 일의 성패는 증인을 확보하는 데 있습니다. 숙수와 죄인들이 중요합니다.

- 제게 중요한 건 부주의 안위입니다.

- 저들이 이렇게 대놓고 나오는 걸 보면 오늘밤 안으로 증인들을 죽이려 들 겁니다.

- 그래도…….

무흔이 다시 전음을 보내는데 무한이 딱 잘라 말했다.

- 싸우지 않는 자를 무인이라 할 수 없지요.

무한의 말에 무흔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스르르 사라졌다.

무한은 혼자서 천천히 대로를 따라 걸었다.

기다란 골목에 희미한 등이 밝혀져 있고, 등불을 받은 돌바닥이 번질거렸다.

서현부에서 무한의 집까지는 대략 반 시진 정도 걸어야 한다. 경공을 펼치면 순식간에 갈 수 있지만 무한은 그냥 천천히 걸었다.

차분한 걸음걸이였고 표정은 담담했으나 무한의 내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무흔에게서 백의영이 공격당하고 천소향이 중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었다.

이 며칠 간 암살과 독살을 당할 뻔했고, 거래를 한 백가상단이 공격당했다.

그러자 자연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일이 떠올랐고, 묵은 원한이 새롭게 다가왔다.

무한은 자신을 표적 삼아 가장 확실한 증거를 잡을 셈이었다.

화수전 살수에게 자신을 던지는 위험한 일이었으나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해야만 냉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투투툭.

비가 거세지며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으나, 이상스레 인기척이 없었다.

곧 개천이 나왔다. 빗물이 흘러든 개천에 물이 제법 거세게 흘렀다.

개천을 따라가던 무한이 멈췄다.

개천가 버드나무 아래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붉은 우산이 상반신을 가렸으나 사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개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워할 거 없다. 어차피 인생이란 이 개천의 흙탕물처럼 덧없이 흐르는 것일 뿐이니.”

사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들려왔다.

“어디서 멈춘들 무어 대수이겠나.”

무한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에게 흘러나오는 기도는 살수라고 보기 어려웠다.

“화수전?”

사내는 대답이 없다가 한참 만에 스스로에게 이르듯 중얼거렸다.

“죽을 걸 알고 있는 자를 죽이는 건 못할 짓이지. 느닷없는 죽음! 그거야말로 천운이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오늘 일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아.”

“…….”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지?”

사내가 일어서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새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마치 물안개처럼 흩뿌리는 비로 바뀌었다.

우산에 가려졌던 사내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죽기 딱 좋은 밤 아닌가? 그걸 위안 삼으라고 할 밖에.”

사내는 마흔 정도로 보였는데 무척 준수한 얼굴이었다. 약간 그늘진 미간이 오히려 우수에 찬 인상을 주었다.

“이름 없는 살수는 아닌 듯하군요.”

“큭큭큭. 세상의 모든 살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얻는 순간 그는 살수가 아니지.”

사내가 우울하게 웃었다.

“검천부주라지? 삼재검수라더군. 일차 살수행에서 셋을 혼자서 해치웠다니 단순한 삼재검수는 아니겠지.”

사내가 옆에 찬 호리병을 들어 벌컥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뿌옇게 내리는 비 사이로 주향이 흘렀다.

사내는 습관처럼 왼손으로 잡고 있던 우산을 천천히 돌렸다.

“당신이 세 번째 살수인가?”

무한은 서현부에서 음식에 독을 탔던 게 생각나서 물었다.

그게 두 번째 살수행이었다면 이번이 세 번째인 셈이니까.

“세 번째 살수?”

사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흰 이가 드러났다.

“착각하는군.”

사내는 붉은 우산을 빙빙 돌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두 번째 살수행부터 넘어라. 그러면 답을 해주지.”

스스스.

무한은 뿌연 비 사이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운들을 느꼈다.

‘……!’

그제야 사내가 착각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사내가 세 번째 살수는 맞다.

하지만 두 번째 살수행 뒤에 마무리를 지으려는 집행자로서 온 것이다.

독을 쓴 건 과정일 뿐이고, 두 번째 살수행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좋지 않다.’

두 번째 살수행과 세 번째 살수행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그만큼 화수전에서 이번 살행을 중시 여긴다는 뜻이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파파팟!

빗방울 사이로 섬전표가 날아들었다.

무한이 재빨리 우산을 접으며 뒤로 물러나는데 뒤통수로 서늘한 기운이 다가왔다.

곧바로 상반신을 비틀자 수리검이 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한은 암기의 진에 포위되었음을 직감했다.

기감을 퍼뜨려 주위를 경계했는데도 어느새 포위된 것이다.

‘무흔에 버금가는 은신술이다.’

무흔이 마음먹으면 무한도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의 은신술이 그런 경지였다. 몇 명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암기는 무질서하게 날아오는 듯했지만, 피하다 보니 개천 쪽으로 몰렸다.

‘함정이야.’

느끼는 순간 개천 쪽에서 팅, 하고 아주 작은, 뭔가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물소리 사이에 섞여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으리라.

무한이 몸을 돌리며 우산을 후려쳤다.

따다당!

손바닥 만한 쇠침이 튕겨나갔다.

그러나 모두 막지 못했다.

쇠침 하나가 어깨에 박혔다.

싸늘한 기운과 함께 상처 부위가 찌릿하게 저렸다.

‘독?’

적이 보이지 않으니 난감했다.

건물이나 나무 등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무한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 장 거리에 서 있는 붉은 우산의 사내뿐.

그는 구경이라도 나온 듯 한가로이 서 있었으나 가장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가 피식,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다시 암기들이 짓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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