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천종해는 속을 감추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잘되었습니다. 검천부에서 천하상단과의 거래를 파기하겠다고 통보해왔습니다. 앞으로 도천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온 걸세.”
장일양은 홀짝,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얄밉게 말했다.
“예?”
“생각해보게. 지금 검천부와 거래를 끊는다면 사람들이 어찌 보겠나? 도천부가 검천부를 밀어낸 것처럼 보일 게 아닌가?”
“검천부에서 먼저 통보한 겁니다.”
“사람들은 저간의 진실을 보지 않네. 다만 숙부들이 외로운 고아의 사업을 밀어냈다고 떠들 걸세.”
허어.
천종해는 기가 막혔다.
뭔 소리야?
“감히 어떤 놈들이 도천부를 모함한단 말입니까?”
장일양은 입에 댄 찻잔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지금 천하방 상황을 모르니 내가 일러주겠네. 조만간 천하방은 후계자 옹립에 들어갈 걸세.”
“아! 그렇군요. 도왕 어르신께서 연세가 있으시니 후계자를 세울 때도 됐지요.”
“지금으로선 도천부주께서 가장 유력하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고강후 어르신이야말로 도왕 어른의 적장자이자 무공으로도 이미 상대가 없다는 분 아닙니까?”
“그러나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시기하는 자들도 많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구설수가 일어나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는 말일세.”
천종해는 무척 영민한 자였지만 장일양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검천부주가 어린 나이에도 야망이 크네. 제 할애비가 천하제일인이었잖은가? 그래서 천하방을 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
“그게 가당키나 합니까?”
“천하제일인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네. 검천부주는 그걸 노리는 걸세.”
“그게 사업과 무슨 상관이 있답니까?”
장일양이 한숨을 쉬었다.
“천하상단과 검천부 간의 계약이 깨지면, 진실이 어떻든 간에 도천부가 검천부를 밀어낸 모양새가 될 걸세.”
“……!”
“벌써 도천부 때문에 검천부 사업이 몰락했다는 소문이 나돈다더군.”
아!
천종해는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그렇군요……. 도천부의 입장은 알겠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일단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를 하시지요.”
“그럼세. 나이가 드니 노독이 쉽게 풀리지 않는군.”
그날 밤.
천종해는 장일양과의 대화를 복기하다 깨달은 바가 있다.
‘도천부…… 차도살인을 하겠다는 뜻이로군.’
도천부와 자신은 이미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무한을 핑계로 결별을 통보하는 건…… 알아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제기랄. 암살이라면 저희가 더 잘할 텐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천종해로서는 다른 선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무한에 대한 앙심이 깊었다.
‘건방진 놈…….’
도천부와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응징을 해야 할 놈이다.
결심을 굳히고 심복을 불렀다.
“곽삼양 종적은 알아보았나?”
곽삼양에게 무한의 무공 수위를 알아보라 했는데 소식이 없다.
“아무래도 잡힌 것 같습니다.”
“호위들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
짜증이 치밀었다.
‘놈의 무공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곽삼양은 무공은 없지만 수완이 좋았기에 은밀한 일을 시켜왔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역시 검천부라는 말인가?’
너무 안일하게 대응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삼양과 우리를 연결 지을 고리를 다 끊어놔라. 그리고…….”
천종해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놈을 확실히 처리해야겠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심복이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화수전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화수전?”
“맡은 일을 그르친 바가 없다더군요. 다만, 의뢰비가 꽤 듭니다.”
“돈이 얼마 들던 상관없다. 알아봐라.”
심복이 사라진 뒤 천종해는 장일양이 묵고 있는 처소를 향했다.
“이소단주께서 밤늦게 무슨 일이신가?”
“노독을 푸시는 데는 술이 최고지요.”
천종해가 술병을 들어 보였다.
“이렇듯 야심한 밤에 찾아온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려.”
천종해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까놓고 말씀드리지요. 검천부와의 거래가 끝나면 그간 검천부 사업을 위장폐업 하여 도천부로 넘긴 것이 드러날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장일양이 시치미를 뗐고, 천종해가 속으로 욕했다.
‘너구리 새끼. 너랑 같이 한 일이잖아?’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모두 도천부를 위한 제 충정이었지요.”
장일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골치 아프군. 이거야말로 큰일이야.”
“그래서 말입니다.”
천종해가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일이 순리대로 흐를 수 있도록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좋지.”
장일양은 어떻게라고 묻지 않았다.
천종해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자금이 좀 필요합니다. 제 자금이 대부분 묶여 있으니…… 도천부 점포 하나를 매각했으면 합니다.”
젊은 여우가 늙은 너구리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
귀영이 돌아왔다.
무척 침중한 얼굴이었다.
“살수를 보낸답니다.”
“결국 최악의 수를 선택하는군요.”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거든요?”
귀영이 평소와 다르게 진중했다.
무한이 살짝, 놀라 물었다.
“복잡한 일입니까?”
“놈들이 화수전에 의뢰할 모양인데…… 하아!”
“화수전?”
“살수들이 문파까지 이룬 곳이죠.”
“그래요?”
무한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귀영이 정색했다.
“화수전이 마음먹으면 대파의 장문인도 반드시 죽일 수 있답니다.”
“정말인가요?”
“제 사부에게 들었습니다.”
“사부가 누군데요?”
“말씀드려도 모를 겁니다. 이름 없는 살수였거든요.”
귀영이 지난날 구한 살수가 화수전 사람이었다. 살수행은 성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걸 귀영이 구했다.
무공을 잃은 살수는 복귀를 포기하고 귀영에게 얹혀살며 무공을 전수했다.
“술을 마시면 화수전의 전설 같은 살수행을 들려주었죠. 놈들은…… 정말 지독하다더군요.”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물었다.
“살법을 익혔습니까?”
“배우긴 했습죠.”
“살법, 한번 봅시다.”
“예에?”
“저쪽에서 화수전 살수를 보낸다면서요.”
“그런……데요?”
“살수의 수법이 어떤 건지 알아봐야죠. 날 죽여 보겠습니까? 사흘간 세 번의 기회를 드리죠.”
“크흐흐. 그래도 됩니까? 이건 정식 대결과 다른 겁니다.”
“궁금하군요.”
“다치실 수도 있는데요. 살법이란 게 한번 손을 쓰면 멈추기 어렵거든요.”
“그럼 제가 부족한 거겠죠.”
귀영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합법적으로 무한을 쥐어 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사흘 후.
“에이 씨팔!”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귀영은 방에 처박혀 두문불출했다.
‘나 몰래 밤마다 영약을 처먹었나…… 귀는 왜 그리 밝은 거야?’
야심차게 시도한 세 번의 살수행이 모두 실패했다.
***
무한은 화수전이 자신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도 태연했다.
오히려 귀영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다가도 한번 밖을 둘러보는 모양이다.
밤잠을 제대로 못자니 눈 밑이 거뭇거뭇 죽어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으아암. 이러다 죽겠네.”
귀영이 자신의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무한이 속으로 혀를 차고 귀영에게 물었다.
“살수행에 대해 이야기 좀 해보세요.”
“살수행이요?”
“사부에게 들은 게 있을 텐데요?”
“그거야 며칠 밤낮을 새고도 남을 만큼 많죠. 뭘 듣고 싶어 그런 겁니까?”
“화수전 살수가 온다니 궁금해서 그러죠.”
“살인의 기예가 일천 가지도 넘는다는데 그걸 일일이 다 방비할 수는 없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움 되는 말은 있죠.”
“그게 뭡니까?”
“살수도 우리가 방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상대가 이제 끝났다고 안심하는 순간을 노린다는 거죠.”
무한이 귀영을 빤히 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뻔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니 그렇죠.”
귀영이 정색을 하였다.
“잘 모르시는군요. 진리는 평범한 데 있답니다.”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밤을 꼬박 새다니…….”
아마 내일쯤에는 지쳐서 곯아떨어지겠지.
“누군가는 새야 하는 거겠죠.”
귀영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시장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귀영이 나가려고 대문을 여는데 쿵, 하고 문짝이 내려앉았다.
“아니, 뭐 이리 부실해?”
무한이 다가가자 귀영이 문짝 위쪽 경첩이 붙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그래서 제가 객잔에서 머물자고 했잖아요. 싼 집은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요.”
“누가 뭐래요? 목수나 불러와요.”
“그냥 객잔으로 가죠?”
“…….”
무한이 노려보자 귀영이 시선을 피했다.
“가더라도 고쳐놓고 가야 하긴 하겠지?”
귀영이 장을 보고 목수를 불러왔다.
목수는 대문을 살펴보고 말했다.
“문틀을 갈아야 합니다. 벌레 먹어서 삭아버렸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한이 귀영에게 말했다.
“천종해에게 가서 사흘 안에 정리하라고 하세요.”
“어, 오늘 목수들이 온다고 했는데요. 수리하는 걸 보고…….”
“그건 내가 하죠.”
귀영이 떠나고 잠시 후에 목수들이 왔다.
무한은 대청 의자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다 꾸벅꾸벅 졸았다.
텅! 텅!
목수들이 망치질하는 소리만 울릴 뿐이다.
잠시 후 목수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공자, 수리를 마쳤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무한이 일어나 대문으로 갔다.
두 명이 공구를 정리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이 문턱에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이음새가 떨어져 나가며 목재가 일부 파손돼서 잘라 붙였습니다.”
무한을 데리러 왔던 목수가 파손 부위를 설명하다 말고 무한의 손목을 콱, 잡았다.
순간 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자가 앉은 그대로 허리를 비틀었다.
손에 한 자 가량의 쇠꼬챙이가 들려 있다.
스스슥.
목수들도 빨랐지만 무한은 더 빨랐다. 잡힌 손목을 튕겨내고 미끄러지듯 뒤로 빠졌다.
그러나 뒤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최라락!
공구를 정리하는 척하던 목수가 쇠그물을 펼치고, 또 다른 이가 기다란 쇠꼬챙이를 찔렀다.
미리 조율한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황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무한의 죽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무한이 선 자세 그대로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이며 쇠그물과 쇠꼬챙이를 피했다.
요산자의 신법은 이름도 없었지만 천하의 절학이었다. 소마의 검도 피했는데 화수전 살수들의 합공에 당할 리 만무했다.
“헉!”
살수들은 치밀한 조합이 빗나가자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네 사람이 사방을 점하고 공격했다.
파파팟!
피할 곳이 없었다.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
무한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들려 있었다.
‘팔황격!’
허공에서 우르릉하는 굉음이 일며 사방에서 기파가 터졌다.
“크윽!”
살수들이 튕겨났다.
그중 하나가 담을 넘어 도주했다.
나머지 세 명은 무한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파팟!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두 명이 고꾸라졌다.
살수들의 무공도 제법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격해왔기에 모두 산채로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을 보았다.
“몇이나 왔나?”
살수가 무한을 노려보다 입을 쫙 벌리고 핏물을 뿜어냈다.
푸아아악!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