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위탁운영권을 회수한다니……무슨 뜻이신지요. 직접 운영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영산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검천부 사업을 통째로 빼다니!
천하상단의 상권 일 할이 사라지는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무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말씀드린 대로 위탁운영을 해지할 것입니다. 작년까지 정산이 되었으니 올해 거래만 정산하면 되겠군요.”
“위탁운영 계약은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천하상단에서 투자한 금액도 적지 않습니다. 권리 관계가 복잡하여 따질 사안이 한둘이 아닙니다.”
“당연히 투자금액을 정산해드려야죠.”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해지 통보를 한다는 건 상도의에 어긋나지요.”
무한이 품에서 문서를 꺼냈다.
“이건 천하상단과 검천부가 맺은 위탁운영 계약서입니다. 귀 상단에도 한 부가 보관되어 있을 테니 나중에라도 확인해볼 수 있겠지요.”
무한이 문서를 펼쳐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조항에 따르면 검천부는 언제든 위탁운영권을 회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영산이 계약서를 보니 정말 그렇게 되어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조항이…….”
불평등한 계약 내용에 당황한 조영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과거 천하상단이 지금과 같은 규모가 아니었을 당시 맺은 계약이었기에 천하상단에 불리한 조항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주 불평등한 계약서로군요.”
“그런가요? 하지만 천 단주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다.”
“…….”
“이렇게라도 해서 검천부 사업을 얻고자 했던 날이 있었던 거겠지요.”
담담한 어조였으나 비수 같은 일침에 조영산은 말문이 막혔다.
천하상단주 천평산은 검천부의 사업을 가져오기 위해 아주 파격적인 계약서를 작성하여 검천부 사업을 받아왔다.
심양조는 사업에 간여하지 않았기에 이제까지 그 누구도 계약서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계약서 진위 여부를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거처로 안내할 테니 머무르시면서…….”
조영산이 여지를 남겨두려 하는데 무한이 손을 저었다.
“그건 귀 상단에서 알아보실 일이고.”
무한은 또 다른 문서를 꺼냈다.
검천부와 천하상단의 거래 일체를 정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접수하였다는 확인 인장을 찍어서 백가상단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백가상단이요?”
조영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휘주 상계에서 제법 잘나가던 백가상단이었으나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천하상단과 관계가 아주 좋지 않다.
혼담이 오가던 사이가 사업 때문에 원수지간이 된 곳이니 조영산의 반응도 그럴 만했다.
“앞으로 백가상단에서 위탁운영을 할 예정입니다. 그렇게 처리하는 걸로 알고 가겠습니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영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자기가 관할하는 사업은 아니지만 그냥 보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다급해진 조영산이 무한을 잡았다.
“이렇게 가시면 서운하지요. 검천부와 천하상단이 거래한 지가 수십 년인데 사업이야기만 하고 끝낼 수야 없지요. 조촐한 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오랫동안 맺은 거래를 정리한다는 게 서로 불편한 일입니다. 어색한 술자리를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조영산은 딱 잘라 거절하고 가는 무한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정중하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뼈를 때렸다.
‘작심하고 온 모양이구나.’
사실 연회는 원래 없었다.
하룻밤만이라도 붙잡아두려는 조영산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이럴 때가 아니다.’
검천부와의 거래는 이소단주(二小團主) 천종해가 도맡아하고 있다.
조영산은 육총관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은 데다, 하는 일이 주로 표국과 전장을 관리하는 일이라 검천부와의 거래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무한을 응대한 것은 천종해의 지시 때문이었다.
천종해는 검천부의 신임부주가 찾아온다고 하자 의중을 떠보고자 육총관 조영산을 내보냈다.
그런데 모든 거래를 파기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칫 자신이 덤터기를 쓸지도 모른다.
조영산은 곧바로 천종해를 찾아가 무한이 건넨 문서를 전했다.
“검천부주가 건넨 문서입니다. 살펴보시지요.”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문서만 전달하는 사람처럼 굴고는 나와 버렸다.
“뭐라고? 모든 사업을 회수하겠다고? 미친 거 아냐?”
천종해가 인상을 썼다.
“어린놈이 제멋대로군. 지가 갑인 줄 아나보지?”
천종해가 콧방귀를 뀌었다.
***
천하상단 내원 깊숙한 곳.
상단주 천평산과 네 아들이 모였다.
간단한 다담이지만 이 자리에서 천하상단의 큰 그림이 그려진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담이 끝나갈 무렵.
천평산이 옆에 놓인 땅콩을 까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천종해를 향해 물었다.
“검천부주가 왔다는데 무슨 일이냐?”
육십이 훌쩍 넘은 천평산은 몸집이 비대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먹기에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살이 쪘다.
두 눈은 살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중원 상권이 요동친다.
“별거 아닙니다.”
천종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려 했으나 천평산이 땅콩을 집어 입에 넣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했다.
“용건이 무어냐고 물었는데 별 게 아니라니…… 뒷방으로 물러나니 이런 소리까지 듣는군.”
천종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알려지기로 천평산이 뒷전으로 물러났다 하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들들에게 전권을 물려준 것은 사실이나 그가 나서면 모든 게 뒤집힌다.
황급히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신경 쓰실까봐 한 말입니다.”
“효자로구나. 내가 신경 쓸 일인지 아닌지까지 생각해주고.”
천종해의 등골이 오싹했다.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은…… 검천부 사업에 문제가 약간 생겼습니다.”
우드득, 쩝, 쩝…….
천평산은 땅콩을 집어 먹을 뿐이다.
“검천부주가 위탁사업을 해지하겠다고 하여 설득하는 중입니다.”
천종해가 이실직고했다.
천평산은 두툼한 눈꺼풀을 쳐들고 장남 천이금에게 물었다.
“검천부 사업이 우리 상단에서 차지하는 몫이 얼마나 되지?”
“일 할입니다. 수년 전까지 삼 할이었는데 많이 줄었습니다.”
천종해는 아버지가 검천부 사업을 주관하는 자신을 제쳐두고 이복형 천이금에게 묻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네. 맞습니다. 일 할입니다. 그래서…… 설득 중입니다.”
“설득 중이라.”
천종해가 품에서 무한이 건넨 문서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검천부주는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고해왔지요. 그동안 수십 년에 걸친 위탁사업을 이리 일방적으로 파기한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반드시…….”
천종해가 중언부언 상황을 설명하는데 일소단주 천이금이 끼어들어 힐난하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관리했기에 이 지경이 된 거냐?”
네 명의 소단주는 각기 상권을 나눠받아 경쟁하듯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천종해가 가장 뛰어나 천평산의 신임을 받고 있다.
그러기에 천하방 관련 사업 중 알짜라는 도천부와 검천부 사업권을 운영해왔다.
천하사패 중 기천부는 독자적으로 상권을 운영하고 있고, 패천부의 사업은 일소단주 천이금이 맡고 있으나 규모가 크지 않았다.
평소 불만이 많았던 일소단주 천이금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중간에 끼어든 천이금을 바라보는 천종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나 지금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천종해가 내심 이를 갈았으나 낯빛을 추스르고 말했다.
“검천부 신임부주가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릅니다. 위탁사업이 일반 상거래처럼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 이리 나오지 못하지요. 이건 스스로 망하겠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심무한이라는 아이가 어려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여기에 백가상단이 끼어들었다. 지금이야 움츠러들었지만, 그들의 능력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천이금이 물고 늘어지자 천종해가 코웃음을 쳤다.
“흥! 백가상단 따위가 끼어들게 놔둘 것 같습니까?”
“무력이라도 쓰겠다는 말이냐?”
두 형제가 언쟁을 벌이는 와중에 셋째 천역금과 넷째 천가금은 입을 꾹 닫고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은 새외무역과 황실공납을 맡고 있어 분야가 다르기도 했지만 형들의 다툼에 끼어들 마음도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천평산이 입을 열었다.
“셋째와 넷째는 나가봐라.”
천역금과 천가금이 기다렸다는 듯 부랴부랴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천평산이 문서를 집어 살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천하상단은 천하방과 함께 커왔다. 초창기에는 검천부의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했지.”
천평산이 말할 때는 조용히 듣기만 해야 했다.
“당시 검천부 사업이 천하상단의 칠 할 정도 되었다. 상단이 커가면서 점차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 할은 됐지.”
천평산의 무심한 시선이 천종해를 향했다.
“근데 지난 몇 년 사이 사업이 많이 줄어들어 일 할에 불과하구나. 우리 상단이 커진 이유도 있지만, 이렇게 규모가 줄어든 건 위탁운영자의 책임이기도 하지.”
천평산이 천종해를 보며 말했다.
“실망이구나. 네 재주를 아껴서 도천부와 검천부 사업을 맡겼는데 이런 결과를 낳다니.”
“제 상권은 계속 커가고 있습니다.”
천종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지. 도천부의 사업이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 건 안다. 그런데 검천부는 쪼그라들고 있지.”
천평산이 핵심을 짚었다.
“검천부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건 당연하다. 손해를 보는데 누가 계속 거래를 하겠느냐?”
천평산은 뒷전에 물러났으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천종해는 자신의 변명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천종해가 자신을 낮췄다.
천평산은 철저한 상인이었다. 아들도 능력 위주로 대했다.
장자인 천이금에게 검천부나 도천부를 맡기지 않고 서자인 천종해에게 맡긴 것도 능력 차이를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천평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게 도천부와 검천부를 함께 맡기는 게 실수였나 보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
천종해는 고개를 숙였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아버지 천평산이 자신에 대한 평가가 실수였다고 말했다.
이는 앞으로 그가 맡은 상권이 태반은 날아간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 제가 검천부주를 만나보겠습니다.”
천평산이 잠시 천종해를 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종해야.”
“예. 아버님.”
“검천부주가 직접 왔는데 왜 만나지 않았던 것이냐?”
“그, 그건…….”
천종해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규모가 줄었다 해도 천하상단의 일 할이다. 검천부주가 아직 어리다는 말만 듣고 경시한 건 아니냐?”
“아닙니다. 마침 제가…….”
천종해가 둘러대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천평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두터운 눈꺼풀 속에 비친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조심해야 한다!’
천종해의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오랫동안 천평산의 서자로 살아오며 체득한 경험이다.
‘여기서 거짓말하면 끝장이다!’
천평산은 작은 일이라도 거짓을 고한 자는 용서치 않았다.
바로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천평산이 그런 천종해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두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결론을 지었따.
“알았으면 됐다. 검천부 사업은 깨끗하게 정리해서 넘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