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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65화 (65/250)

65화

몰락하는 백가상단을 다시 일으켜 세울 기회가 왔다.

죽든 살든 잡고 봐야 한다.

“백가가 상계에 투신한 지 백여 년! 그간 무수한 위기를 겪었으나 한 번도 경쟁이 두려워 물러선 적은 없었습니다.”

“단순한 상권 경쟁이 아닐 겁니다.”

“상권 경쟁은 어찌 보면 직접 칼 들고 싸우는 것보다 치열하고 독합니다. 상대의 목을 베지는 않지만 스스로 목을 매달게끔 몰아붙이는 곳이 상계입니다.”

백의영의 말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계도 만만치 않군요.”

“그렇습니다. 상인들도 죽을 각오로 사업을 하는 겁니다. 다만…….”

백의영이 말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천하방 문파들이 상계 다툼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공공연하게 개입은 않더라도 은밀하게 간여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몰래 수작을 부린다면 그것까지 막을 방도는 없겠지요.”

백의영은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무한이 내민 손을 잡고 싶다.

천하상단과 경쟁하는 것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도천부의 위협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목숨 아니, 자신과 가솔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무한이 백의영의 속을 읽은 듯 말했다.

“검천부는 상단 간의 경쟁에 간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무림 세력이 끼어들면 그건 묵과할 수 없지요.”

백의영의 귀가 번쩍 뜨였다.

무한의 말은 검천부가 배후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백가상단을 선택하신 겁니까?”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고.”

“단지 그것 때문이란 말입니까?”

“알아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백가상단은 이 지방에서 제법 잘나가던 상단이었더군요. 그런데 천하상단과 경쟁하며 점차 어려움을 겪었죠. 단순히 상권다툼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

백의영은 무한이 그간의 사정을 알고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상단이 상권을 잠식해오자 백가상단은 총력을 모아 일전을 벌였다.

그리고 승기를 쥘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 도천부의 경고가 날아들었고, 거기서 물러서는 바람에 계속 몰린 것이다.

하지만 같은 천하방 사람에게 도천부의 경고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무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도천부에서 왔다는 말을 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요?”

“…….”

백의영의 침묵은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무한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천하방의 방침을 도천부가 어긴 모양이네요.”

백의영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도천부가 두려웠으니까.

무한이 백의영의 속을 짐작하곤 말을 이었다.

“혹 도천부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백의영이 고개를 저었다.

도천부에서 온 고수는 한밤중에 와서 몇 마디하고 갔을 뿐이다.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다만 백가상단의 경비를 우습게 만든 고수라는 것뿐.

“어쩌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지요.”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백의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도천부의 수작은 막아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천하상단과의 경쟁은 오로지 백가상단의 몫입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한 것 같군요.”

무한이 말을 마치자 백의영이 어금니를 깨물더니 바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백가상단 소단주 백의영, 검천부 사업을 맡겨주시면 충심으로 운영하겠습니다.”

무한이 마주 예를 취하고는 허공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대협?”

한 사람이 뚝, 떨어졌다.

칙칙한 흑의무복을 입은 이는 어딘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백의영은 화들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라났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아무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 암중호위를 맡고 계신 분입니다.”

무한이 무흔에게 말했다.

“당분간 백가상단에 머물렀으면 합니다.”

백의영의 안위를 지키라는 뜻이다.

무흔의 무미건조한 얼굴에 당혹스런 빛이 흘렀다.

“안 됩니다. 제 임무는 부주를 호위하는 겁니다.”

“그게 저를 지키는 일입니다. 게다가 제게는 검천사위가 있습니다.”

쌍두마차를 끌고 온 검천사위는 서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는 귀영과 그들이 있으면 된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무한의 말에 무흔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당분간입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백의영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해하다 자신의 안위를 염려한 무한의 호의라는 걸 알자 감격했다.

‘나보다 어린데…… 마음 씀이 깊구나.’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묵직하게 다가오는 무한이었다.

***

백가상단에서 거처를 내준다고 했으나 무한은 이를 거절하고 귀영을 시켜 서현 외곽에 작은 집을 빌렸다.

귀영이 투덜거렸다.

“그냥 객잔에 머무시죠? 돈도 많으시잖아요.”

“아무래도 내 집이 편하지 않겠어요?”

“식사도 그렇고, 지내려면 불편하실 텐데.”

“귀 대협이 수고 좀 해주세요.”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요.”

백의영을 만난 뒤부터 무한은 귀영에게 대협이라고 불렀다.

‘언제는 목을 자르려더니 이제는 대협이라고 부르다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귀영은 아무래도 낯간지러웠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복하시는 겁니까?”

백의영 앞에서 무한을 전주라고 밝힌 건 귀영의 독단적인 생각이었다.

“덕분에 얘기가 잘 됐잖습니까.”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협 덕분에 아주 잘됐지요.”

“또? 대협! 저 대협 아니라니까요!”

“대협 호칭이 싫은가요?”

“저도 제 주제를 압니다.”

“주제가 어떤데요?”

대답하려니 귀영은 할 말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 우연히 다친 살수를 돌봐주고는 그 보답으로 은신술을 익혔다. 그걸 밑천 삼아 이목 노릇을 하다가 고강후에게 고용되어 무한을 감시해왔다.

‘내 인생도 참 간단하구나.’

귀영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냥 귀 호위, 이렇게 부르시죠?”

“그런데 장 씨 아니던가요?”

“본명은 잊어주십시오. 귀영으로 사는 게 익숙합니다.”

“그렇군요. 각자 사연이 있는 법이죠. 관부에 쫓기는 수배범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귀영은 입이 튀어나와 대답하지 않았다.

무한이 놀리듯 물었다.

“수배범인가요?”

“아뇨! 제가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사람을 해한 적은 없다고요.”

귀영이 펄쩍 뛰었다.

“본인이 원하니 그리 부르도록 하지요. 귀 호위…… 어감이 이상한데 어쩔 수 없지요.”

그때 바깥에서 기척이 들렸다.

귀영이 나갔다 오더니 흡족해하였다.

“백가상단에서 집안을 돌봐줄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돌려보내세요.”

“예? 백가상단에서 성의를 보인 건데 왜 굳이 돌려보냅니까?”

“돌려보내세요.”

귀영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를 알뜰하게 부려먹겠다는 거로구나.’

귀영이 백가상단에서 온 이들을 돌려보내고 오자 무한이 말했다.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애꿎은 이들이 희생될 수도 있어요.”

“누가 여기를 공격이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감히 천하방 검천부주를 노리고?”

“그동안 나를 감시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요.”

귀영도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무한과 천하상단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무한이 방문첩을 꺼내 귀영에게 건넸다.

“이걸 천하상단에 건네주고 오세요.”

사흘 후 방문하겠다는 방문첩이었다.

귀영을 보내고, 무한은 뒤뜰로 가서 수련을 하였다. 굳이 집을 마련한 이유가 수련 때문이었다.

경천십이식 후반사식을 한시라도 빨리 완성해야 한다.

후반사식은 개별적으로 펼칠 때는 그런대로 흉내를 낼 수 있는데 실전에서 쓰기는 부족하다.

경천십이식은 할아버지 심양조의 성명절기로 천하제일검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어렴풋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경천십이식도 결국 검의 극의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야.’

경천십이식 너머 진정한 검의 경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가야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노화순청이라는 말이 있다.

의식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경지.

경천십이식과 같은 신공을 노화순청의 경지까지 이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경천십이식을 완벽하게 이뤄내야 돼.’

***

천하상단을 가기로 한 날.

“귀 호위는 쉬세요. 검천사위가 호위할 겁니다.”

“그러죠. 저도 할 일 많습니다.”

귀영이 좋아라 하며 바로 돌아서 들어갔다.

잠시 후 무한은 검천사위의 호위를 받으며 쌍두마차를 타고 천하상단으로 향했다.

염량과 방옥헌이 말을 타고 앞장서고 조공하와 문역기가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았다.

서현 외곽 강가에 있는 커다란 천하상단의 장원은 얼마나 규모가 큰지 작은 성이라고 해도 될 듯했다.

심지어 강가에 천하상단만을 위한 항구가 있었다.

천하상단이라 쓰인 커다란 패루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과 마차가 오갔다.

패루를 지키는 수문위사들이 제지하지 않는 걸로 보아 외원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듯했다.

패루를 지나자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서 있다가 검천부의 깃발이 꽂힌 쌍두마차를 보고 다가왔다.

“검천부에서 오셨습니까?”

마차를 끌고 있는 문역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부주를 뵙고자 합니다.”

마차 창문 가림막이 열리고 무한의 얼굴이 보였다.

“천하상단 육총관 조영산입니다.”

무한이 사내를 보았다.

팔자수염을 짧게 기른 사내는 눈이 가늘었는데 심계가 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무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산은 거만한 무한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으나 내색하지 않고 앞을 가리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무한이 조용히 창문 가림막을 닫고 앞을 주시하였다.

‘육총관이라…….’

무한이 미리 방문첩을 보낸 이유가 있었다.

누가 자신을 맞이할 것인지 궁금했다.

천하상단은 네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총관이 있다. 오늘 마중 나온 육총관이 가장 말석이다.

천하상단에서 검천부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잠시 후, 무한은 화려한 빈청에서 조영산과 마주 앉았다.

“단주는 몸이 불편하여 손님을 맞을 상황이 아니십니다. 소단주 네 분은 출타중이십니다.”

조영산이 자기가 응대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육총관이라지만 그가 다루는 상권은 어지간한 상단 이상이다. 그만큼 천하상단의 규모는 컸다.

마흔 나이에 천하상단 육총관에 올랐으니 조영산도 대단한 자임에 분명했다.

그랬기에 검천부주를 만난 이 자리에서도 뻣뻣하게 굴었다.

‘아직 애송이잖아. 뭘 알겠어. 사업을 물려받았으니 눈으로 보고 싶은 게지. 적당히 응대하고 술자리 몇 번 열어주면 되겠지.’

무한의 표정은 담담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조영산은 먼저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년간 검천부의 사업이 부진하여 저희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말은 안타깝다 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은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조영산이 검천부 사업을 재조정하겠다고 말을 하려는데 무한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동안 천하상단에 맡겼던 광산과 염전, 점포의 위탁운영권을 회수하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차분했던 조영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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