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결례는 무슨, 장돌뱅이들 신세한탄이 별건가? 이리 앉게.”
상인이 자리를 내주었다.
이들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옮겨가며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이었다.
“자네도 장사꾼인가 본데 무슨 물건을 취급하나?”
“이제 배워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하하. 아직 나이가 어린데 품은 뜻이 큰가보군.”
무한은 상인들 틈에 끼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한이 열심히 들으니 상인들이 신나서 떠들었다.
“산서상방, 광동상회, 산동상단, 휘주상방, 천하상단이 세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지.”
“흥! 그래봐야 돈은 전장들이 다 끌어 모으고 있다고.”
“큰 상단은 전장을 끼고 있는데 서로 경쟁이 치열하지. 그야말로 지금 상계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네.”
“요즘은 육선전장이 크게 세를 불리고 있어. 황실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지.”
“표국? 표국이라면 사해표국과 중원표국이야.”
세상은 넓고 상인은 많았다. 상인들의 세력도 각양각색이었다.
‘소소에게 들은 것보다 생생하네.’
무한은 천하방을 나서기 전 군사부 소소에게 상계 동정에 대해 들었다.
실제 상인들에게 들은 상계는 천하방 군사부가 파악하고 있는 것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
무한에게 중요한 것은 안휘, 특히 휘주의 상계였다.
휘주 상계는 휘주상단과 천하상단, 남궁세가가 몰려 있었다.
다행이 상인들로부터 휘주상계와 천하상단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천하상단…… 생각보다 크구나.’
오대세가라는 남궁세가와 맞먹는 힘을 지닌 곳이었다.
며칠 후, 배는 휘주의 한 포구에 당도했다.
배에서 내리던 무한의 눈에 멀리 녹의여인이 사라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
귀영은 서현에서 가장 호화로운 객잔 별채를 홀로 썼다.
그의 인생에서 지금과 같은 나날은 없었다. 기름진 음식과 좋은 술, 차와 여자들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아음…….”
귀영은 별채 정원에 앉아 일품 차를 마시며 간밤의 숙취를 달랬다.
알록달록 단풍이 진 나무들이 뜰을 채워 보기 좋았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처음 서현에 왔을 때 허름한 객잔에 머물며 천하상단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여 보냈다.
그랬더니 무한에게서 답신이 왔는데 부유한 상인 행세를 하라고 하였다. 필요한 돈도 넉넉하게 보내왔다.
그 말대로 귀영은 외지에서 온 거부 행세를 하며 지냈다.
그러자 서현의 유지라던가 상단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왔다.
그들에게서 들은 천하상단에 대한 정보는 그가 주변을 탐문하며 알아낸 것보다 훨씬 내밀하고 가치가 컸다.
‘오호, 이래서 거부 행세를 하라고 한 거군. 크하하. 나야 좋지.’
귀영은 날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서현의 부유층과 어울렸다.
이러다 술독에 빠져 죽을까 걱정할 정도로 방탕한 나날들이었다.
오늘도 새벽까지 마신 후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는 중이다.
‘좋긴 한데. 매일 이러는 것도 피곤한 일이구나.’
숙취가 가시자 졸음이 밀려왔다. 밤마다 늦게까지 연회를 다니다보니 잠이 부족했다.
귀영은 찻잔을 내려놓고 꾸벅꾸벅 졸았다.
침까지 흘리며 단잠을 자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보이네요.”
“응, 좋지…….”
귀영은 잠결에 대답하다 말고 화들짝 깼다.
눈앞에 무한이 서 있었다.
귀영이 벌떡 일어났다.
“언제 오셨습니까.”
“신분에 맞게 행세해야지요. 호북 거상 조 대인께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아! 그렇지.”
귀영은 조씨 대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무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사람들을 만났을까 싶네.’
귀영의 모습은 딱 봐도 졸부로 보였다. 옷차림은 비싸 보이는데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무한의 속도 모르고 귀영이 신나서 보고했다.
“천하상단은 단주와 네 아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데, 그중 둘째 아들 천종해가 가장 상재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이건 무척 중요한 사실이죠. 대부분 단주나 첫째가 좌우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둘째 아들이 좌지우지한다고 합니다. 천하상단은 대총관을 비롯해 모두 여섯 명의 총관이 있고, 이들 대부분이 둘째 아들을 지원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귀영은 그간 자신이 들은 천하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동안 늘어놓았다.
대부분 무한이 오면서 보따리 상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핫핫. 진짜 정보는 고급 술집 으슥한 자리에서 오가더군요. 서현에서 한가락 한다는 놈들과 어울리느라…….”
귀영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정보를 모았는지 자랑했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배첩을 한 무더기 가져와 탁자에 쏟았다.
“이렇게 많은 곳에서 보자고 하니 제가 하루도 거를 수가 없더라고요.”
무한이 배첩들을 살펴봤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상은 고만고만한 곳들이었다.
하나하나 살피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배첩이 있었다.
백가상단.
오다가 들은 바로는 한때 천하상단과 경쟁을 할 정도로 큰 상단이었는데, 최근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곳이다.
‘안타까운 일이야. 몇 대를 이어온 상단이 그렇게 한순간 무너지다니…….’
보따리 상인이 아쉬워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무한이 백가상단 배첩을 건넸다.
“만나자고 하세요.”
***
서현의 유서 깊은 객잔 화영루 후원.
화사한 꽃향이 감도는 정원에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서성이고 있었다.
백가상단의 외아들 백의영은 골똘히 생각하다 혼잣말을 하였다.
“조 대인이 기회가 됐으면 좋겠구나.”
백의영이 긴 한숨을 쉬었다.
백가상단은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천하상단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새로운 상로를 개척해야 한다.
호북에서 왔다는 거상 조 대인이 기회가 될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대장을 보냈는데 바로 답이 왔다.
막상 만나기로 하니 시중에 떠도는 소문이 신경 쓰였다.
조 대인을 만난 몇몇 사람이 그가 거상은커녕, 부자라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때 월형문 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불빛이 어렸다.
하녀 둘이 등을 들고 들어왔다.
“하하. 오래 기다리셨소?”
화영루 하인을 따라 들어오는 조 대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백의영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화려한 의상이나 번쩍거리는 장신구가 서로 조합을 이루지 못하고 천박하게 보였다.
‘적어도 졸부라는 말은 맞겠군.’
조 대인의 허리춤에 달린 옥패를 본 백의영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백가는 유서 깊은 상인집안이다.
어려서부터 귀한 물건을 보고 자란 백의영이 조 대인의 허리춤에 달린 옥패가 그럴듯한 싸구려라는 몰라볼 수가 없었다.
‘역시 사기꾼이었나?’
실망스러웠지만 백의영은 진중한 자였다. 귀영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요즘 명성이 자자한 조 대인을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백가상단의 소단주께서 직접 와 계실 줄은 몰랐소. 왜 밖에서 이러고 계시는 거요. 어서 들어갑시다. 배가 출출하구려.”
귀영이 너스레를 떨자 뒤따르던 무한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가벼워. 한없이 가벼워.’
귀영은 백의영이 아직 젊은 청년이라는 걸 알자 아랫사람 대하듯 편하게 굴었다.
백의영은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정자를 가리켰다.
“정자에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르시죠.”
벡의영은 내심 씁쓸한 마음이었다.
그는 오늘 자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주연상과 의자의 배치, 병풍과 수놓은 가리개는 물론이고 화등의 색상, 악단과 무희가 머무는 공간까지 적잖은 돈을 썼다.
그런데 조 대인을 보니 사기꾼이라는 평판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초대한 입장에서 그런 내색할 수는 없었다.
백의영은 정자에 올라 귀영에게 손님자리 상석을 안내했다.
그러자 귀영이 쭈뼛하더니 무한의 눈치를 보았다.
백의영의 시선이 귀영을 따라 무한에게 옮겨갔다.
무한의 옷차림은 소박하나 품위가 있어 오히려 눈길을 끌었다.
‘측근이 오히려 기품이 있어 보이는군.’
백의영은 무한이 아직 젊은 걸 보고 조 대인의 수족이라 여겼다.
그런데.
“앉으시죠.”
무한이 말하니 그제야 귀영이 자리에 앉았다.
백의영은 놀랐으나 못 본 척하였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차와 음식, 술을 가져왔다.
그사이 백의영은 무한을 유심히 살폈다.
‘어찌된 일이지? 나이도 어린데 조 대인이 오히려 아랫사람처럼 구는구나.’
무한의 동작 하나하나가 침착하면서도 단정하여 명가에서 자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조 대인 옆에 저런 자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백의영이 헛기침을 하고는 조 대인에게 말했다.
“함께 오신 분은 뉘신지요?”
귀영이 머뭇거리며 무한을 보았다.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대번 알 수 있는 행동이다.
무한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 잘못이다. 용인술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겠구나.’
평생 이목으로 살아온 귀영에게 거부 행세를 하라고 한 건 무한 본인이다.
귀영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었으니 실수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무한이라 합니다.”
귀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분이 본인의 전주(錢主)시라오.”
백의영이 놀라 무한을 보았다.
아직 약관에 미치지 않은 듯한데 조 대인의 전주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전주라니.’
분명히 아랫사람이라고 하라 일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전주라고 소개했다.
이미 나온 말은 거둘 수가 없다.
무한이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전주라는 말은 과장입니다. 그저 휘주, 그중에서도 서현 상계에 관심이 많아 실례를 무릅쓰고 왔으니 박대하지만 말아주시지요.”
무한이 겸손하게 말하니 오히려 더욱 신뢰가 갔다.
무한은 자리에 앉으며 귀영을 노려봤다.
귀영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제 보니 백의영을 상대하는 게 귀찮아 고의로 떠넘긴 게 분명했다.
백의영이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멀리서 오셨으니 제가 술을 한 잔 따르겠습니다.”
술병을 들고 무한에게 다가가던 백의영이 멈춰 섰다.
백의영의 시선이 정자 아래 마당을 향하자 무한도 돌아봤다.
“……?”
무한은 내심 놀랐다.
오는 길에 봤던 녹의여인이 월형문 아래 서 있었던 것이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옥색 상의와 푸른 치마를 입었고 등에 검을 맸다.
‘역시 무림인이었구나.’
무한은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여인은 무한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눈 몇 번 마주쳤다고 얼굴이 익을 리가 없지.’
백의영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서 귀영과 무한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다녀올 테니 양해하여 주시지요.”
“괜찮습니다. 어서 일 보시지요.”
귀영이 경망스레 손을 저어 가보라 하고는 술병을 들어 무한과 자신의 잔에 철철 부었다.
“드시죠. 전주님.”
백의영이 정자를 내려가서는 녹의여인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이야기 하자.”
백의영이 앞장서자 녹의여인이 뒤를 따랐다.
무한의 시선이 월형문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