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른 새벽.
검천부에서 쌍두마차가 나왔다.
마부석에는 조공하와 문역기가 앉아 있었고, 뒤로 염량과 방옥헌이 말을 타고 따랐다.
쌍두마차는 천하방을 벗어나 남쪽 관도를 따라 달렸다.
마차가 천하방 영역을 벗어나자 어디선가 지켜보던 이목들이 분주히 보고했다.
검천부주 출방.
도천부를 비롯한 천하방 곳곳에 무한의 출타 소식이 전해졌다.
***
가림막을 친 어두운 마차 안에서 무한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네 적이 아니다.
뜬금없는 도왕의 한마디.
천하방주이자 천하의 패자답지 않은 회한에 찬 목소리였다.
순간 몸을 돌려 도왕을 볼 뻔했다. 그러나 묵직한 기운이 그걸 막았다. 도왕의 기운이었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이지? 왜 돌아보는 걸 막은 거지?’
도왕.
약관의 나이에 한 자루 혈천도로 도천방을 세워 무림의 패자로 단숨에 떠오른 인물.
마천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여 무림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가 심양조, 천기자, 복호명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사천방을 세운다.
심양조 사후 천하방주에 오른 그는 당금 무림의 정점이다.
그런 그가 아직 어린 무한에게 자신이 적이 아니라고 하다니.
‘할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뜻인가?’
머릿속이 어지러워질수록 무한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갔다.
해가 질 무렵.
염량이 마차 옆으로 말을 붙이며 말했다.
“오늘 여기서 묵어야겠습니다.”
마차가 선 곳은 꽤 큰 현.
무한이 객잔에 들자 염량이 말했다.
“뒤따르는 이목은 모두 여섯이었습니다.”
무한이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별 말이 없자 염량이 나갔다.
- 정확히 아홉입니다.
무흔의 전음이 들려왔다.
‘역시 무흔은…… 검천사위를 능가하는구나.’
검천사위의 맏이 염량과 둘째 방옥헌은 신검무적대의 조장으로 일류를 넘어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들이다.
조공하와 문역기 역시 일류라는 이름이 아까운 인물들.
그러나 그들이 찾은 수보다 무흔 혼자 찾은 암중의 이목이 더 많았다.
‘이런 고수가 왜 나를 호위하는 걸까?’
오랜 의문이었다.
심지어 강유조차 의문을 품고 무한에게 주의를 준 바 있다.
그럼에도 곁을 내준 것은, 무한 자신의 안위를 진정으로 챙기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할아버지의 안배인가?’
무흔은 말이 없는 사내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다.
‘언젠가는 말하겠지.’
다가온 의도가 있다면…… 결국은 드러날 것이다.
다음 날.
쌍두마차는 이른 새벽 객잔을 떠났다.
그 뒤를 그림자들이 따랐다.
정확히 아홉이었다.
***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점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던 객잔 점소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이 언제 들어왔지?’
반점 구석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가 들어온 걸 본 기억이 없다.
차림으로 보아 보따리 상인 같았다.
점소이가 다가가자 그가 주문했다.
“소면 한 그릇 주시오.”
아직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청년은 다름 아닌, 무한이었다.
무한은 소면을 먹고 바로 일어나 길을 떠났다.
마차는 동쪽으로 갔는데 무한은 남서쪽으로 갔다.
요산자의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산을 탔다. 온종일 달린 후 관도로 내려서 천천히 걸었다.
- 따라붙은 이는 없습니다.
무흔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제야 무한의 걸음에 여유가 생겼다.
말을 한 필 구해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무한은 서안 골목에서 자랐고, 이후 천하방 검천부에 처박혀 살았기에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지 못했다.
요산자와 다닐 때도 산과 강으로 다녔고, 천무행을 나갔을 때는 갈 때나 올 때나 서둘렀기에 마을에 들어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검천사위를 따로 보내고 한가로이 가는 건 이 때문이었다.
무한은 자신을 알아보는 이 없는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다.
가면서 농부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걸 한참 지켜보기도 하고, 혼인하는 행렬을 만나 따라가기도 했다.
장례 행렬에서 지전을 뿌리고, 심지어 마을 잔치에 끼어들어 먹고 마셨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았으니 사람 사는 게 그리웠던가 보군.’
무흔은 무한이 아직 어린 나이이니 호기심이 많아 그럴 거라 이해는 했으나 헛된 시간이라 여겼다.
‘무림인, 그것도 천하방 검천부주의 자리에 오른 순간 평범한 삶은 없다고 봐야지.’
모두가 우러러보는 권좌.
그렇기에 잠시 틈을 보였다가는 누군가에게 순식간에 뺏기고 만다.
무흔은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무한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귀영 같은 자를 받아준 것만 봐도 그렇다.
무흔의 판단으로는 죽였어야 옳았다. 화근은 미리 없애는 게 무림의 진리 아닌가.
‘천성이 순해.’
그가 보기에 무한은 순하고 성실했다. 성격만 볼 때 천하방이나 검천부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천하방을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무흔은 뱃사공과 어울려 낚시를 하는 무한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고작 낚싯대 하나 드리우는 건데 뱃사공의 가르침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난한 성격에 성실함을 갖췄으니 평범한 이들 속에서라면 자기 한 생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그때 무흔이 흠칫, 일어섰다.
무한이 고기를 잡았다. 그러더니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자랑하듯 흔든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았나?’
의외였다.
무흔은 자신의 은신술이라면 도왕이나 권왕 같은 고수도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 자부해왔다.
쉽게 생각했다.
‘내가 따라다니는 걸 아니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도 있었을 테지.’
무난한 잠행이라 은신술을 극성으로 펼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공이 나날이 늘고 있긴 해.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거지?’
무흔으로서도 이해 가지 않는 빠른 성취였다.
***
무한은 악양에서 도착해서 며칠 동안 한가로이 돌아다녔다.
악양루에 오르기도 하고 고찰과 명승을 돌아다녔다.
“에헴. 오늘은 천하제일인과 그의 후계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객잔 반점에 들러 식사를 하던 무한은 한쪽 구석에 앉아 사람을 모으는 이야기꾼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야기꾼은 목청을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중원 무림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천하방 백여 문파가 중원을 지키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보기 드문 성세를 누리고 있으니 어둠은 힘을 잃고 사마외도의 무리는 감히 대낮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지요.”
이야기꾼의 말에 사람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외쳤다.
“하나마나한 이야기 말고 본론을 꺼내봐.”
“이야깃거리가 정말 없나보지? 천하제일인에 대해서 새롭게 이야기 할 게 뭐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의 채근에 이야기꾼이 분연히 일어서더니 외쳤다.
“맞습니다. 오늘은 바로 천하제일인의 후예, 심무한에 대해 들려드리겠습니다!”
무한은 돌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꾼을 돌아봤다.
‘나에 대해서? 내가 뭘 했다고?’
이야기꾼은 연신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어갔다.
“심무한이 천하방 검천부의 주인에 오른 뒤 각 문파를 예방하였답니다…….”
이야기꾼은 무한의 문파 예방과 화제를 모은 예물에 대해 과장 섞인 소식을 전했다.
‘정말 소문 한 번 빠르구나.’
자신의 행적을 남에게 듣자니 낯이 뜨거워진 무한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인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녹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두건이 달린 녹색 피풍의를 걸치고 목도리로 아래쪽 얼굴을 가렸다.
녹의여인은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수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구나.’
천목투심술이 나날이 깊어지며 평범한 사람의 감정 노출은 대번 읽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무한이 우연히 마주친 듯 시선을 돌리려다 여인이 흠칫, 놀라는 걸 보았다.
여인은 무한의 뒤쪽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뒷문으로 사라졌다.
무한이 뒤를 돌아보니 하얀 무복 차림의 여인들이 객잔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녹의여인은 이들을 피해 사라진 게 분명했다.
여인들의 무복 소매에 산과 구름 문양이 있었다.
‘무산파?’
구대문파에 들지는 않지만 여인들만 받는 유서 깊은 문파다.
‘무산파에 쫓기는 건가?’
무한은 호기심이 일었으나 이내 마음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양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갈 참인데 배 시간이 다 되었다.
항구로 나가 커다란 상선에 올랐다.
“이리 오시오.”
전날 흥정했던 선원이 선창 객실로 안내했다.
객실은 많지 않아 네 개에 불과했다. 무한은 편히 가고 싶어 적잖은 은자를 치르고 객실을 빌렸다.
‘저 여자도 객실을 빌렸나보네?’
공교롭게도 객잔에서 사라진 녹의여인이 선원을 따라 오더니 맞은편 객실로 들어갔다.
통로는 비좁아서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고, 객실 또한 침상 하나뿐이었다.
이 배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호사스러운 편이었다. 다른 이들은 선창 너른 평상에 아무렇게나 누워 가야 했다. 선원들 숙소는 그보다 열악해서 한층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뱃전을 채운 손님들은 대부분 보따리 상인들이었다.
배가 항구를 떠나자 무한은 뱃전으로 나갔다.
악양 항구가 멀어진다.
멀어지는 항구를 보다 시선을 돌리는데 녹의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녹의여인은 뱃전에 기대어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등에 검을 맨 걸로 보아 무림인인 듯했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루에 세 번이나 보니 낯설지가 않아 말이나 붙여볼까 했는데 여인이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쫓기는 입장이니 사람을 피하는 것인가.’
왠지 무안하여 반대편 뱃전으로 가서 강 풍경을 바라보았다.
배는 유유히 흘러 항구에 닿았다.
“미시에 출발할 것이오. 그때까지 볼일이 있는 분은 다녀오시오.”
선원이 선창을 향해 소리쳤다.
무한이 바깥으로 나가려다 저 멀리 천하방 깃발이 꽂혀 있는 걸 보고 도로 내려왔다. 천하방이 관장하는 항구였던 것이다.
무한은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하여 객실에서 운기조식을 하다 배가 다시 출발한 뒤에야 객실을 나와 뱃전으로 올라갔다.
악양에서 타고 온 보따리 상인들이 내리고 새로 보따리 상인들이 탔다.
참 오묘한 일이었다.
상인들은 마치 먹이를 이고 바삐 오가는 개미들 같았다.
‘무인은 없구나.’
세상을 주유하며 느낀 것이 생각보다 무림인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주먹을 쓰는 왈패나 흑도의 무리들은 많았으나 그들을 무림인이라 부르기는 어려웠다.
지금 여기도 상인들의 호위로 보이는 칼잡이 외에 무림인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무림인인 천하방에서 자란 무한에게는 의외로 다가왔다.
무한은 상인들 근처에 앉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올봄에 절강 쪽 차 농사가 좋지 않아서…….”
“옥 광산이 새로 발견이 됐다더군…….”
“전장들이 이자를 너무 올리고 있어. 이래서야 장사를 할 수 있겠나.”
무료한 뱃길이다. 상인들은 끼리끼리 뱃전에 앉아 자신들이 지닌 정보를 주고받았다.
상인 중 하나가 옆에서 열심히 듣는 무한에게 말했다.
“자네는 무어 그리 관심이 많은가?”
무한도 상인 차림이었는데 열심히 듣고 있는 걸 보고 말을 건 것이다.
무한이 예를 취했다.
“듣다 보니 재밌어서 엿듣는 결례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