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수십 명이 모인 대연무장에 침묵이 흘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지요.”
누군가 물었다.
“무력대를 축소할 겁니다. 신검대와 무적대 모두 규모를 줄여 운용할 겁니다.”
무한이 설명하는데 성급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나가라 이 말씀입니까?”
다분히 항의조였다.
“아닙니다.”
무한이 딱 잘라 말했다.
“검천부에는 사람이 모자랍니다. 떠나는 사람도 잡아야 할 처지지요.”
“그런데 왜 내보내겠다는 겁니까?”
“무력대 외에도 사람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뜻입니다.”
대원들이 술렁거렸다.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칼잡이들에게 무력대 말고 할 게 뭐가 있다는 건가?”
“하긴, 형님은 이제 무력대를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소?”
“뭐야? 나 아직 팔팔하다고! 붙어볼까?”
무한은 제각기 떠드는 대원들을 가만 지켜보았다.
대원들은 서로 떠들다 점차 조용해졌다.
단상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무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모두가 입을 닫았다.
무한이 신검무적대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한의 눈빛에 담긴 기운은 담담하였으나 사람의 폐부를 들여다보는 듯 깊었다.
무한의 눈빛을 받은 신검무적대원들은 절로 긴장했다.
담철조와 공곤도 놀랐다.
숱한 전장에서 수많은 적과 혈전을 벌이며 살아온 신검무적대원들이 이제 열여덟에 불과한 무한의 시선에 긴장하다니.
무한이 모두와 눈을 마주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검대와 무적대 각기 열 명씩, 모두 스무 명만 남길 겁니다.”
무한은 사흘의 시간을 주고 무력대에 남을 스무 명을 자원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담철조와 공곤을 검각의 집무실로 청했다.
“천하방 각 문파의 사정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담철조와 공곤이 서로를 마주보다 말했다.
“알만큼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요.”
“천하방 각 문파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예?”
“천하방에 들어온 지 팔 년이 되었습니다만 각 파의 사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무한은 지난 팔 년 간 천무관을 다니는 것 외에 검천부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아, 그래서 취임식을 열흘에 걸쳐 크게 열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어지간한 문파의 수장은 다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담철조가 말하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람을 모으는 게 아니라 찾아갈 생각입니다.”
“예?”
담철조는 요즘 들어 반문하는 경우가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큼 무한의 말이 의외였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각 파의 문주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취임식 한 번 치른다고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게 차차 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제가 직접 찾아갈 겁니다.”
담철조와 공곤이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를 봤다.
잠시 후 담철조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천하방 문파가 백여 곳이 넘습니다. 천하방 사람들도 정확히 몇 문파나 되는지 아는 이가 드물 겁니다.”
“네. 일백이십사 곳이지요.”
“그러니까…… 그 많은 곳을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중에는 외성에 들어오지 못한 곳도 꽤 됩니다.”
천하방 내성은 가장 강대한 천하사패가 동서남북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에 천하전이 있다.
그 외 대부분의 문파는 천하 각처에 본문을 두고 인원을 차출하여 천하방 외성에 파견했다.
문파의 성쇠에 따라 각기 장원이나 전각의 규모가 달랐고, 운영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었다.
문주가 상주하는 곳이 있는가 하 면, 장로나 연락책만 두는 문파도 있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문파가 작은 경우는 이마저도 어려워 그저 천하방에 이름만 걸쳐 두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무한은 그곳들을 다 찾아가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루에 한두 곳씩 다니면 석 달이면 충분하겠군요.”
담철조와 공곤의 입이 다시 한 번 딱 벌어졌다.
각 문파를 예방한다고 해서 며칠 잡아야 할 것이라 여겼는데 석 달간 다니겠다니…….
“정말 그 많은 문파를 모두 찾겠다고요?”
“가봐야 문주도 없을 겁니다. 장로나 연락책만 있을 텐데…….”
무한은 담담하게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문주들이 와 있을 테니까요.”
천하에 흩어진 문주들이 온다고?
“중요한 건 제가 그들을 찾아간다는 겁니다.”
“…….”
“앞으로 생사고락을 함께 할 문파들입니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 있는 게 아닌, 모두 한 형제들이지요. 그러니 제가 찾아가는 게 맞지요.”
담철조와 공곤이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맞습니다. 저희도 잊었군요. 천하방 각 문파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 검신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이었는데 세월이 가니 저희마저 잊을 정도로 퇴색하고 말았지요.”
“부주께서 그 뜻을 되새기겠다니 새삼 감격스럽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한의 첫걸음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느 문파부터 가시겠습니까?”
“순서는 검천부 동쪽에서부터 남, 서, 북 순으로 차례차례 갈 겁니다.”
당연히 천하사패부터 찾고, 그 이후 문파의 규모 순으로 찾을 줄 알았던 담철조와 공곤은 이번에도 예상이 빗나가자 실소를 흘렸다.
어린 검천부주는 번번이 그들의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역시 천하제일인의 후손답다. 생각이 크다.’
‘오랫동안 숨죽였던 검천부가 드디어 기지개를 펴는구나.’
두 사람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두 분께서 예방 순서대로 문파의 독문무공이나 속사정을 아는 대로 정리해서 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동안 임무를 수행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무력대 사람들을 통하면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 수 있지요.”
“그럼 됐습니다.”
무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숟가락 개수까지는 필요 없고요.”
담철조와 공곤이 크게 웃었다.
***
사흘 후.
대연무장으로 가니 신검무적대가 모두 모여 있었다.
좌호법 담철조와 우호법 공곤도 미리 나와 있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모두 예를 갖췄다.
“무력대에 남으실 분은 정했습니까?”
담철조가 대신 대답했다.
“갑론을박하다 나이순으로 정하기로 했답니다.”
신검대와 무적대에서 각기 열 명이 앞으로 나와 섰다.
“나이가 어린 순으로 원하는 자부터 선발했습니다.”
그래도 다른 무력대보다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다.
신검대에 한 명만 이십대 후반이고 나머지는 모두 삼십을 넘어섰다.
예상했던 바다.
무한이 남은 오십 명을 향해 말했다.
“혹시 검천부를 떠나고 싶은 분 계십니까? 은 백 냥을 드리겠습니다.”
은 백 냥이면 삼 년 치 월봉이다. 무력대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에 보통 무인들보다 월봉이 높았다.
하지만 내일을 보장 못 하는 삶이라 대개 받는 대로 쓰고 만다. 그래서 무인이 돈을 쥐고 있는 경우란 거의 없다.
일시에 백 냥이라는 거액에 모두가 침묵했으나 앞으로 나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모두에게 열 냥씩 드리겠습니다.”
“……?”
“정착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무력대 활동을 하느라 집 한 채 못 가진 분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검천부를 떠나란 말씀이십니까?”
누군가 물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검천부는 한 사람이 아쉬운 처지입니다. 가족이 있는 분이 부내에 머물기 어려우면 성 밖 마을에 집을 구하시라는 겁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요?”
무한이 검천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검천부가 좀 넓어야지요. 건물 몇 곳을 수리했으니 지낼 만할 겁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크게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무한이 각기 열 명씩 남은 신검대와 무적대를 보며 말했다.
“신검대와 무적대는 앞으로 훈련에 집중할 겁니다. 영내 경비나 잡무에서 배제합니다.”
“쳇. 그럼 우리보고 경비 노릇이나 하란 건가? 그냥 무력대 자원할 걸 그랬나?”
누군가 투덜거렸다.
무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경비는 따로 무사들을 고용할 겁니다. 검천부를 위해 사선을 넘나든 분들을 그렇게 예우할 수는 없지요. 모두에게 직책이 주어질 겁니다.”
무한의 시선이 담철조에게 향했다.
담철조가 앞으로 나왔다.
“적일염, 주성곤은 앞으로 나를 보좌한다. 등백량은 신검대 살림을 맡아한 경험이 있으니 만보각(萬寶閣)을 맡아 관리한다.”
담철조는 오랫동안 함께 했던 신검대원의 특성을 손바닥 꿰듯이 알고 있었고, 무한과 상의하여 정한 자리에 배치했다.
담철조가 신검대 출신 무인들을 배치하고 나자 이번에는 공곤이 나와 무적대 출신들을 호명했다.
“유장은 사람 관리에 능하니 천인당(千人堂)을 맡는다.”
공곤 역시 자리를 정해주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을 자신의 보좌로 뽑았다.
무한에게는 새로이 호위가 붙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주를 호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염량, 방옥헌, 조공하, 문역기 네 사람은 신검무적대에서 고수로 손꼽히는 자들이었다.
“네 분이시니 앞으로 검천사위(劍天四衛)로 부르겠습니다.”
모두에게 직책이 주어지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모두 자신의 직책에 만족했다.
“중임을 맡으신 분들도 있는데 월봉을 올려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검천부는 당분간 저를 비롯하여 모두가 월봉으로 은 두 냥을 받을 겁니다.”
무한의 말에 만보각을 맡은 등백량이 말했다.
“무력대도 아닌데 은 두 냥이면 과하지요.”
그러자 비난이 쏟아졌다.
“등백량! 만보각을 맡자마자 구두쇠 노릇하는 거냐?”
“우우.”
그러다 모두가 일제히 웃었다.
무한이 말했다.
“하지만 조만간 천하방 최고의 대우를 해드릴 겁니다. 이는 검천부를 지켜주신 여러분에게 제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입니다.”
무한의 말에 모두가 감격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굳이 그러실 건 없습니다. 지금도 만족합니다.”
여러 사람이 한마디씩 던졌다.
무한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키고 말했다.
“이만 해산합니다. 좌우 호법께서 상세한 업무를 일러주실 겁니다.”
잠시 후 연무장에는 무한과 신검대와 무적대 각기 열 명의 무인들만 남았다.
“여러분의 훈련을 관할하실 교관을 소개하겠습니다.”
무한이 뒤를 돌아봤다.
하기주가 걸어 나왔다.
“천무관 교두로 계셨던 하기주 교관이십니다.”
“천무관?”
신검대와 무적대원들의 얼굴에 실망스런 기색이 어렸다.
전장을 누비는 무력대들은 무관 교두를 은근히 무시한다. 은퇴한 무인이나 변변한 실력이 없는 자들이나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하 교관은 전대 방주이자 검천부주셨던 할아버지의 무기명제자이십니다. 제게는 사숙이 되는 셈이지요.”
무한의 말에 모두 놀랐다.
검신 심양조는 평생 제자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이 직접 심양조의 무기명제자라고 했으니 신검무적대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기주를 바라봤다.
하기주는 난감했다.
자신의 무공이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신검대와 무적대는 일반 무사가 아니다. 천하방 무력대 중에 최정예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류고수라고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숱한 싸움을 치러온 만큼 실전 능력은 하기주를 상회할 것이다.
그러니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난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