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56화 (56/250)

56화

이튿날.

강유가 검천부로 찾아왔다.

“천무관 출관을 축하한다. 이제 공식적으로 후견인의 자리를 내려놓을 것이다.”

강유가 가져온 목궤에서 검천부의 인(印)을 보여주고 무한에게 넘겨주었다.

검천부의 인을 받았다는 건 공식적으로 검천부의 이름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한이 예를 올렸다.

어렸을 때는 몰랐으나 지금 돌아보니 강유가 은근히 자신의 뒤를 지켜주었음을 알고 있다.

강유가 검천부 인을 넘겨주고 간 다음 날 총관 포승이 찾아왔다.

포승이 큼지막한 궤짝을 들고 온 하인들에게 일렀다.

“여기 놓고 나가서 기다려라.”

하인들이 무한 앞에 궤짝을 놓고 나갔다.

포승이 궤짝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그동안 총관부에서 관리해온 검천부 재정 관련 문서들이네. 심 부주가 독립했으니 검천부에 넘기고자 하네.”

지금까지는 석 달에 한 번씩 정리된 문서만 보내왔는데,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검천부에서 관리해야 한다.

옆에 있던 유아가 반색했다.

“크흐흐.”

괴이한 웃음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유아로서는 지난 수년간 고대했던 순간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다시피 천하방은 여러 문파가 모여 세운 방파네. 각 문파는 각자 재정을 알아서 하지. 그리고 일정 부분을 천하방에 출연하는데 천하사패가 내는 몫이 칠 할 가까이 된다네.”

포승이 검천부에서 내놓아야 할 출연금에 대해 설명했다.

일 년에 은 오십만 냥.

막대한 금액이었다.

“검천부는 그동안 사업 규모가 줄어들었으니 앞으로 오 년 간은 은 십만 냥으로 감액할 것을 장로회의에 건의해놨네. 너무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네.”

포승이 덧붙였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기존에 출연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결정은 재정기록을 검토해보고 해도 늦지 않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

포승이 여지를 두었다.

“이제는 정말 총관이 필요할 것이네. 저번에 말했듯이 소개할 사람이 있네.”

“배려는 감사합니다. 총관을 선정하는 일은 차차 생각해보겠습니다.”

무한이 완곡하게 거절했다.

“으음, 자네는 정말…….”

포승은 무한이 자기 말을 듣는 법이 없다는 걸 새삼 떠올리며 끄응, 하고 몸을 돌렸다.

포승이 돌아간 뒤 무한은 유아를 불러 함께 재정기록을 검토했다.

이전에도 장부를 받아 보았지만 재정기록으로 모든 걸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상황이 정말 심각하네요. 이렇게 해처먹도록 뭘 하고 있었대요? 포 총관이야말로 총관 자격을 의심해봐야겠어요.”

유아가 입에 거품을 품었다.

심양조 사후 검천부에서 관리하던 사업이 대부분 축소되거나 아예 사라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입원인 천하상단의 사업이 대폭 줄어들었다.

‘천하상단…….’

무한이 장부에서 시선을 떼어 창밖을 바라봤다.

‘천평산…….’

기억 저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시선의 끝에 재신이라 불리는 자의 이름이 있었다.

‘조만간 봐야 할 것 같구나.’

***

며칠 후.

무한은 아침 일찍 심씨 사당을 찾았다.

위패 앞에 향을 피우고 정좌한 채, 모락모락 피어나는 향연(香煙)을 보는 무한의 표정은 그지없이 무심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장부 정리를 끝낸 유아가 보고하려고 찾아왔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냥 돌아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무한은 연달아 사당을 찾아와 온종일 지켰다.

유아는 물론 담철조나 공곤조차 은근히 걱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당에 나직하면서도 차가운……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에 찾을 때는 흉수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무한이 일어서서 몸을 돌려 사당을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동작이 사당에 자욱한 향 연기를 갈랐다.

걸음의 끝에 저녁노을로 붉은 하늘이 비치는 사당 문이 있었다.

마치 피구름을 연상케 하듯 붉은 노을을 향하여 가는 무한의 얼굴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더없이 굳어갔다.

지난 팔 년여 세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이 서안 골목 상인의 아들인 줄 알았던 자신을 천하방 검천부의 주인으로 바꿔 놓았다.

‘내가 이룬 게 아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 심양조의 안배에 의해 순탄하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그가 한 일은 안배에 따라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무한은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러기에 자만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길을 열어야 한다.’

문턱을 넘기 직전 무한의 시선이 붉은 노을을 받아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향했다.

“…….”

잠시 자신의 손을 보던 무한이 이윽고 문턱을 넘었다.

순간, 세상의 공기가 바뀐 듯했다.

적어도 심씨 사당 앞은 그랬다.

“……!”

사당 앞마당에 빗자루를 들고 선 하인 하나가 무한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간 보아왔던 무한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린 하인은 움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무한이 완전히 사라지자 어둠과 함께 심씨 사당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하인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뇌리에 오래전 어느 날이 스쳐갔다.

‘할아버지가 그랬지.’

-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이는 신세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그가 어린 무한을 비난하자 할아버지가 타박하며 중얼거리던 노랫소리가 가물가물 떠올랐다.

‘할아버지. 그 아이는…… 꽃이 아니었어요…….’

재작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하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팔 년 세월 동안 그는 혼인을 하여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검천부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도 이제는 안다.

검천부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어린 부주의 앞길이 험난하리란 걸.

그랬기에 무한이 사당을 찾은 뒤로 자기 일은 젖혀두고 달려와서 열심히 비질했다.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고자, 그래야 그도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살 수 있으니까.

‘부주, 힘내세요.’

오늘도 사당으로 들어가는 무한을 보며 응원했는데 저녁이 되어 나온 무한은…….

‘내가 뭘 본 거지……?’

괜스레 빗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무한은 검각 집무실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쓰던 전각이다.

기다리고 있던 신검대주 담철조와 무적대주 공곤이 무한을 맞았다.

“일찍 오셨습니다.”

“부주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서 대기해야지요.”

담철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희끗한 귀밑머리를 보며 무한이 상석에 앉았다.

열 살 어린 소년이 이제는 청년이 되어 아버지의 자리에 앉는 걸 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무한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무력대를 재편하겠습니다. 아니, 검천부를 재편할 것입니다. 내일 모두 대연무장으로 모여주세요.”

담철조와 공곤이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이제 검천부가 다시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까?”

두 사람은 무한이 열여덟이 되어 천무관을 출관하고, 정식으로 검천부를 맡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검천부가 주인을 찾아 다시 일어선다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부족한 인원부터 채워야겠군요.”

“앞으로 바빠지겠군.”

신검대와 무적대는 무력대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인원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무력대 충원부터 궁리하는데 무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두 분을 검천부의 호법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담철조와 공곤이 멈칫하고는 서로를 보았다.

담철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우리보고 무력대주를 그만두라는 겁니까?”

“예.”

담철조와 공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원이 줄어 제대로 된 무력대 노릇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천하방에서는, 아니 강호에서는 무력이 우선입니다. 우리를 무력대에서 뺀다면 검천부의 힘은 그만큼 약화되는 겁니다.”

“혹시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미덥지 않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직 일당백은 합니다.”

두 사람이 번갈아 반론을 펼쳤다.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무한이 말했다.

“검천부에 대한 두 분의 충정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지금이 개편할 적기입니다.”

무한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말투는 담담했으나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

담철조는 문득, 자신이 데리고 천하방으로 올 때의 무한이 떠올랐다.

열 살 어린 아이답지 않았던 한없이 깊고 무거웠던 표정.

천하방으로 복귀한 뒤 다시 본 무한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 표정이, 팔 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금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발톱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공곤이 눈치 없이 대꾸했다.

“그럼…… 우리더러 물러나라고 하시는 겁니까?”

무한이 담담한 시선으로 공곤을 보았다.

“두 분을 더 부려먹으려고 합니다. 아마 두 분께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짐을 지셔야 할 겁니다.”

“…….”

“…….”

“담 대주께서는 검천부 좌호법, 공 대주께서 우호법을 맡아 주시지요.”

나가라는 소리는 아니라는 말에 담철조와 공곤은 내심 안도했다.

“그러면 무력대주로 누구를 앉힐 생각이십니까?”

“그보다, 우선 무력대에 남을 사람부터 추려야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번 공곤의 얼굴에 노기가 비쳤다. 다혈질인 그는 내심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 우리 대원들을 믿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함께 생사고락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추려내다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데 왜 사람을 추린다는 겁니까? 나머지는 내보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신검대와 무적대는 오랫동안 두 분 대주를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남은 대원들은 대주와의 정이나 의리 때문에 있는 분들입니다. 두 분이 호법이 되어 무력대를 떠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대원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 검천부에 뼈를 묻을 자들입니다.”

“그렇군요.”

“부주께서 대원들을 믿지 않으면 대원들도 부주를 믿지 않습니다.”

담철조와 공곤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무한이 딱 잘라 말했다.

“모두 검천부에 뼈를 묻으셔야 할 거니까요.”

“예?”

어리둥절해 하는 담철조와 공곤에게 무한이 말했다.

“단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이튿날.

신검대와 무적대가 대연무장에 모였다.

무한은 담철조와 공곤을 좌우 호법으로 임명하였음을 알렸다.

“하하, 두 분 대주께서도 이제 좀 쉬실 때가 됐지요.”

“축하드립니다. 우호법!”

대원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축하했다.

무한이 대원들을 살폈다.

대부분이 서른이 훌쩍 넘었고, 몇몇은 쉰 가까이 되어 보였다.

대부분의 무력대가 이십대에서 많아봐야 삼십대 초반으로 편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균 연령이 꽤 높은 편이었다.

‘십년 가까이 새로 충원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이가 있다 보니 가정을 꾸린 자들도 꽤 된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가 주목했다.

“신검대와 무적대를 재편하고자 합니다. 그전에 무력대를 떠날 분들이 계시면 의사를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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