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2화 (2/250)

2화

무한은 작은 입으로 뇌까리듯 말했다.

“아직 어린아이잖아요.”

심양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험난한 강호에서 어리다고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할 수 없다.

“삭초제근이라는 말을 모르느냐? 암중의 적은 후환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무한의 표정은 그새 담담해졌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기서 피하면, 어딘가에 숨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예요.”

검신은 손자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복심을 털어놓았다.

“그렇지. 이 할아비가 적당한 곳을 알아놓았다.”

어린 무한이 작은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요.”

“……?”

“저는 할아버지의 손자이자 검천부주의 아들이자…… 천하방의 주인이 될 거예요. 그러자면 위험과 맞서야죠.”

심양조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 살짜리 아이가 할 말이 아니었다.

“네 애비가 그러더냐? 천하방의 주인이 너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자기가 상인이라고 했는데.”

“아, 그랬다지.”

천하제일인이자 검신으로 추앙받는 심양조도 어린 손자의 당돌함에 놀라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가 그랬어요.”

“……?”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심양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게 천하방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는 걸 여기 와서 알았어요.”

***

심양조는 며칠 고민했다.

흑천의 여인이 손자에게 천하방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흑천의 계략이 아닐까?’

그런 의심은 무한을 보는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아들 심군하의 광명정대한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손자가 흑천의 마수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숨만 나왔다.

‘군하야. 어찌 흑천의 여인과 인연을 맺었던 거냐.’

심양조의 시선이 자신의 집무실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는 무한을 향했다.

시간이 없다.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심양조가 무한에게 물었다.

“천하방의 주인이 되면 무얼 할 생각이냐?”

무한이 심양조를 빤히 보다 말했다.

“천하방을… 해산할 거예요.”

“……!”

심양조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심양조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방은 이 할아비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방파다. 그걸 해산하겠다고?”

“할아버지도 원하는 거 아니셨어요?”

“…….”

기가 막혔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다.

심양조는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네 엄마가 가르쳐 준 게 있더냐?”

“……?”

진지한 심양조의 표정에 무한이 엄마를 떠올렸다.

“특별히 가르쳐 준 건 없어요. 책을 많이 구해주셨죠.”

“무슨 책이었더냐?”

“사서오경과 제자백가, 육도삼략, 화엄경, 금강경, 법구경, 산해경, 도덕경, 장자…….”

“그만! 책 말고 또 가르친 건 없느냐?”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놀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뭔가 가르치려고 한 게 있긴 해요.”

엄마는 다른 여자와 달리 흑의를 즐겨 입었다.

천하의 주인이 되라고 한 엄마는 무한이 글을 깨치자마자 많은 책을 구해 읽게 했다.

그래서 과거를 봐서 조정에 나가라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무한이 다섯 살 되던 해.

엄마는 무한을 창문도 없는 지하 광에 가두었다.

“광에 있는 물건을 찾는 놀이란다. 빨리 찾으면 맛있는 빙과를 줄 거야.”

무한은 몇 날 며칠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광 곳곳에 있는 장난감을 모두 찾아낸 뒤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눈을 감고 생활하게 했다.

멀쩡한 눈을 두고 장님 행세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엄마와 하는 놀이니까.

아버지가 늘 집을 비웠기에 엄마와 둘이 살았다. 집안을 돌보는 조씨 할아범이 있었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같이 놀 수가 없었다.

무한은 무려 일 년이나 눈을 감고 생활했다. 덕분에 소리에 더없이 민감해졌다.

조씨 할아범이 헛기침 하는 소리만 듣고도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정도가 되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엄마가 시킨 건 일 장 밖 벽에 몇 개의 점이 찍혀 있는지 찾는 놀이였다.

수십 개의 점을 모두 알아맞히자 이번에는 벽에 점 하나를 찍고는 삼 장 밖에서 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보이지도 않던 점이 백 일쯤 지나자 희미하게 보이더니 일 년이 되자 뚜렷이 보였다.

그 뒤부터 엄마는 무한을 시장에 데려가 사람들을 지켜보라고 했다.

“저 사람이 어디로 갈지 알아맞히면 당과를 사줄게.”

처음에는 한 사람이었는데 나중에는 한꺼번에 열 명, 스무 명이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맞혀보라고 했다.

무한이 시장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맞히자, 그 다음에는 사람을 불러다 앞에 앉히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맞혀보라고 했다.

어렵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을 지켜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으음…….’

무한의 말을 들은 심양조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불가에 타심통이 있고 도가에는 천리안이 있다.

무한이 하는 말은 이를 수련하는 방법과 비슷했다.

무한의 생모를 직접 만났던 천기자는 흑천의 고위인사일 거라고 추정했다.

‘흑천에 그런 수련법이 있었나?’

강호에는 상대의 심기를 읽어내는 수련법들이 있다.

심오막측한 기공이라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과장된 게 대부분이라 좌도방문의 술수로 치부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무한을 보니 흑천에 그런 술수가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심양조 역시 어지간한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게 매번 정확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정말 사람의 속을 읽어내는 술수가 있다면, 흑천노조가 천하 흑도를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맞겠구나.’

정파와 달리 흑도는 각양각색의 인물이 있고, 이권에 따라 움직이는 만큼 일통하기가 어렵다.

흑천이 천하 흑도를 관장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무한의 투심술을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천노조…….’

심양조는 흑천노조와 마천주를 일생일대의 맞수로 여겼으나 직접 본 적은 없다.

마주치는 순간 어느 하나는 죽어야 하니 서로를 피한 셈이다.

심양조는 흑천노조를 의식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하아……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더냐.’

천일고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흑천노조와 마천주를 찾아 승부를 가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들 심군하가 죽고, 손자가 나타나며 그런 생각을 버렸다.

남은 시간, 천하방이라는 도산검림에서 살아가야 할 손자를 위해 쓰기에도 부족하다.

말을 마친 무한은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런 손자를 보며 심양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하방을 해산한다고? 허허…… 저 녀석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가기라도 한 건가?’

몇 년 전 아들 심군하가 그랬다.

- 천하방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습니다. 해산해야 합니다.

심양조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천하방의 정식 후계자 일순위였던 심군하가 스스로의 지위를 내려놓겠다니 기특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다른 꿍꿍이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녀석, 천하방을 해산하고 흑천의 여인과 백년해로라도 할 생각이었던 게냐?’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아들 심군하가 그리웠다.

‘이제 곧 가마. 저승에서 만나면 혼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니 꼼짝 말고 기다려라.’

죽기 전에 할 일이 많다.

심양조는 천하방의 주인이 되겠다는 어린 손자를 위해 해야 할 것을 생각했다.

***

천하대연(天下大宴).

삼 년마다 천하방에 속한 백여 문파의 수장들이 모이는 자리다.

연회의 형식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각 파의 현재 위상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문파의 성쇠에 따라 은연중 자리가 정해지고, 천하방 권력구조가 재편된다.

천하방이 수십 년을 이어오는 동안 무수한 문파가 두각을 나타냈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오랜 세월 상석을 차지한 권력의 핵심은 변함이 없었다.

검천부(劍天府).

도천부(刀天府).

기천부(奇天府).

권천부(拳天府).

검신 심양조와 그의 의형제들이 세운 천하방 권력의 중추.

사람들은 그들을 천하사패(天下四覇)라고 불렀다.

오시(午時) 무렵.

천하방 천하대전에 천하방 백여 문파의 수장들이 작은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천하사패를 기다렸다.

수많은 이들이 모였으나 대전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숙했다.

천하대전 앞 광장에 각 파의 제자들이 역시 개인상을 앞에 두고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대전 북쪽에는 바닥에서 한 자가량 띄운 단이 있었고, 그 위에 네 개의 개인상이 있었다.

쿵!

오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대전 북문이 열리고, 천하사패의 주인들이 하나둘 나타나 단상에 올랐다.

“……!”

도천부 도왕과 권천부 권왕에 이어 기천부의 인물이 들어오자 대전에 모인 수장들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기천부주 천기자 대신 아들 강유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기천부의 권력이 아들에게 이양되었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검천부의 주인 검신 심양조가 들어섰을 때 수장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검신 심양조의 옆을 따라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이에게 쏠리고 어디선가 탄성이 들려왔다.

“아…….”

나이든 몇몇 사람들은 어린 심군하가 들어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천하사패의 주인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심양조가 대전 안에 모인 문파 수장들을 둘러보았다. 죽음을 앞둔 그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들 중에 아들 심군하를 죽이고 자신에게 천일고를 집어넣은 자가 있을 것이다.

탓할 생각은 없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대가는 치르게 할 것이다.

심양조가 옆에 앉은 무한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연약해 보이는 검이지만 향후 천하제일검으로 등극하여 대가를 받아낼 그의 핏줄.

심양조의 눈빛에 기대와 애틋함이 교차했다.

무거운 짐을 손자의 어깨에 올려놓는 심정은 한없이 저리기만 하다.

무한이 심양조의 시선을 받았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손자의 눈빛을 보자 심양조는 마음을 다잡았다.

“일어나라, 무한아. 천하방 문파의 수장들에게 검천부주로서 예를 올려라!”

심양조의 말에 대전 안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검천부의 부주.

이는 검신 심양조의 후계자라는 뜻이다.

천하제일인의 후계자.

무한이 천천히 일어나 모두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검천부주 심무한, 인사드립니다.”

낭랑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으나 울림은 컸다.

‘심무한…… 역시, 검천부의 핏줄이었구나.’

사람들은 심군하 사후 후계가 끊긴 검천부가 다시 이어졌음을 깨달았다.

심양조가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군하의 아들이라네. 검천부주라 하나 아직 나이가 어리니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기 바라네.”

심양조가 무한이 자신의 핏줄임을 확정지었다.

그 한마디로 심무한의 위상은 공고해졌다.

열 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나 그의 뒤에 천하방주 심양조가 있는 이상 아무도 경시할 수 없다.

무한을 소개한 심양조가 손을 들어 천하대연의 개회를 알렸다.

“천하대연을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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