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무한
序
마차가 멈췄다.
“소주(小主), 나와 보시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작은 두 눈이 빛났다.
“…….”
지난 보름 동안 창문을 가린 어두운 마차 안에서만 지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말을 바꿔가며 달렸다.
그 시간 동안 무한(懋漢)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열 살.
도무지 어린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무거운 침묵에 호위무사들도 은연중 무한을 어려워했다.
덜컹.
마차 문이 열리자 수염을 가지런하게 기른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내려서 쉬시죠. 반시진만 가면 당도합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바람이 서늘했다.
계절은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마차가 선 곳은 고갯마루였다.
“보시죠. 천하제일방입니다!”
사내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
거대한 산기슭에 널따랗게 펼쳐진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벽은 햇볕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무수한 전각이 고래등처럼 펼쳐진 성은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마치 용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세였다.
성의 정문 앞은 좌우와 앞으로 대로가 펼쳐져 있었는데, 마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정도로 넓었다.
대로를 따라 마을이 들어섰다.
네모반듯한 격자 형태의 길로 구획이 잘 정리된 마을은 성이 생기며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외곽으로 가면서 길은 자연스레 휘어지고 집들 또한 각양각색으로 바뀌었다.
마을 대로에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
“소주의 성입니다.”
사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진득한 감회가 묻어 있었다.
무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저녁노을을 받은 사내의 얼굴은 하늘의 신장처럼 굳세 보였는데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다.
천하방 신검대주(神劍隊主) 담철조.
그의 이름이다.
만적(萬敵)을 감당할 것 같은 철담호한의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무한의 시선이 다시 성으로 향했다.
천하방(天下幇).
중원 무림의 패자.
무한은 천하방을 내려다보며 어머니가 죽기 전날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1화
꽤 넓고 긴 방이었다.
기다란 방 끝에 널따란 단이 있었고, 단상 가운데 책상 너머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희디흰 백발에 보기 좋게 내려온 수염이 돋보이는 노인이었다.
책상 양쪽을 밝힌 등불에 비친 노인의 얼굴은 인간사 희로애락을 넘어선 듯 무심했다.
그의 눈에 한줄기 빛이 스쳤다.
“네가 무한이로구나.”
무한은 노인과 일 장 거리에 서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무한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무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정중하게 예를 취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은 입에서 가늘지만,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한의 행동에 노인 심양조는 내심 흥미를 느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진중함에 맹랑하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말하라.”
“어찌하여 이제야 제가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걸 알았을까요?”
무한은 영롱한 눈을 치켜뜨고는 심양조를 빤히 주시했다.
처음 보는 손자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심양조가 흠칫했다. 그러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냐?”
무한은 심양조의 눈빛을 보곤 잠시 고개 숙였다가 천천히 걸어가 심양조 앞에 섰다.
‘이놈 봐라?’
심양조는 방금 처음 본 손자가 자신을 시험했다는 걸 깨달았다.
검신(劒神) 심양조.
한 자루 검으로 신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그의 손에 쓰러져간 무인은 헤아릴 수가 없다.
하늘도 벤다는 그를 시험하다니.
다시 한 번 맹랑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무슨 의도로 나를 시험한 걸까?’
순간 자진했다는 며느리가 떠올랐다.
한 달여 전.
손자를 데려가 달라는 서찰을 받았다.
석 달 전 아들 심군하를 잃고 실의에 빠졌던 심양조는 혼란스러웠다.
아들 심군하는 혼인을 한 적이 없었고, 여색을 밝히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열 살짜리 손자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 아우 천기자를 보내 확인했다.
- 군하의 아들이 맞습니다. 대형도 보면 알 것입니다.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손자가 있다는 서안(西安)을 다녀온 천기자의 말이었다.
곧바로 신검대주 담철조를 보냈다. 그리고 무한을 데리고 돌아온 담철조의 보고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얼굴도 모르는 며느리가 그새 자진했고, 손자 홀로 상을 치르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담철조는 장례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하고 나서 오느라 늦었다며 엎드려 죄를 청했다.
‘이 녀석, 내가 지 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심양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들 심군하가 왜 아무도 모르게 혼인을 했는지는 천기자의 보고를 통해 알았다.
‘흑천의 여인이었다고 했지.’
흑도의 패자 흑천(黑天) 출신을 천하방으로 들일 수는 없는 일.
하지만 핏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담철조를 보냈는데…….
흑천의 여인이 그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식에게 드리워진 흑천이라는 굴레를 죽음으로 벗긴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아는 심양조는 처음 보는 손자가 더 애틋했다.
방에 들어서는 무한을 보자마자 심양조는 천기자가 보면 알 것이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한은 아들 심군하의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닮았다.
어딘가 모르게 약간 여린 듯한 면이 있긴 하지만, 어린 시절 심군하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양조가 무한의 손을 잡았다.
“이제야 너를 보다니. 할아비가 무심했구나.”
흐뭇한 눈으로 손자를 보던 심양조가 흠칫, 놀랐다.
‘그릇을 만들어 놓았구나!’
슬며시 기운을 흘려 보니 내공은 없는데, 근골과 혈맥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게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란 걸 모를 리 없는 심양조다.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벌모세수를 한 결과다.
심양조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
무한은 할아버지 심양조와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심양조는 말수가 적었는데 무한도 그랬다.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
심양조가 차를 마시다 말했다.
“나는 죽는다.”
“……?”
“얼마 남지 않았다.”
무한이 심양조를 바라봤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죽는다는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이다.
또래에 비해 진중하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다. 무한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심양조는 마음이 저렸다.
‘아버지가 죽고 엄마가 죽었다. 그런데 할아비도 죽는다는 소리를 해야 하다니…….’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아쉽지만 이게 너와 나의 운명인가 보구나.”
“…….”
무한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심양조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바로 냉정을 찾고 말을 이었다.
“천일고(天日蠱)라는 게 있다.”
심양조는 남의 말 하듯이 천일고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만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천일고는 원래 원숭이를 숙주로 하는 희귀한 벌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알의 형태로 원숭이 몸에 들어간 천일고는 강한 위액을 견디고 장에 붙어 부화한다.
알에서 나온 천일고는 장벽을 뚫고 혈관을 타고 뇌로 올라가 뇌수를 양분으로 살아간다.
천 일 후 수명이 다한 천일고가 죽으면 독으로 화하고 숙주의 뇌도 멈춘다.
“벌레를 죽이면 되잖아요?”
“뇌에 파묻혀 있기에 죽일 수가 없단다.”
방법이 있다면 검신으로 불리는 그가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까.
무한의 눈빛이 한없이 우울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이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할아버지까지.
올해는 슬픈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누가 할아버지를 해치려는 건데요?”
“나도 알 수가 없구나.”
무한이 고개를 숙였다.
심양조가 탄식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앉은 자리가 그런 자리다. 모두가 이 자리에 앉기를 원하니, 흉수를 의심하자면 한두 사람이 아니다.”
“…….”
말없이 들으면서도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다.
무한은 할아버지가 흉수를 모른다고 하지만, 의심하는 인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일러주지 않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한은 그 이유를 생각했다.
심양조는 손자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고 생각에 잠겨 있자 참을 수가 없었다.
끝내 삐죽 나온 입술을 살짝 틀어쥐었다.
“이 녀석, 네 머릿속에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들어앉아 있다는 걸 이 할아비가 모를 줄 아느냐? 지금 구미호가 꼬리치고 있는 거지?”
“우읍.”
무한이 머리를 비틀어 할아버지의 손을 떨치려 했으나 심양조는 놓지 않았다.
“하하하.”
버둥거리는 무한의 모습이 귀여워서 심양조는 크게 웃었다.
심양조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수없는 죽음을 딛고 이 자리에 선 그다. 검신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생사는 초월한 지 오래다.
다만 홀로 남을 손자가 안쓰러웠다.
자신이 살아있다면 천하방의 후계자로 더없이 고귀하게 자랄 수 있을 텐데…….
한껏 웃던 심양조의 눈이 어느 순간 매서워졌다.
천하제일인이자 천하방주.
검신은 생각했다.
‘내가 죽고 나면 무한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 천하방이다.’
심양조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너와 내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구나. 그래서 말인데…… 이 할아비와 함께 중원을 유람하지 않겠느냐?”
“아뇨.”
무한이 딱 잘라 거절했다.
심양조는 서운했다.
“왜? 나와 다니는 게 싫으냐?”
무한이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정말 유람을 하러 가실 생각이 아니잖아요.”
“……?”
“저를 어딘가에 숨기려는 거 아니에요?”
심양조는 내심 놀랐다.
무한이 명석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열 살짜리 아이가 대뜸 전후 상황을 파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 녀석…….’
심양조가 무한을 찬찬히 보다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아버지는 상인이라고 하셨어요. 일 년에 서너 차례, 잠시 집에 들르셨다가 곧바로 또 상행 나간다고 가셨거든요.”
“…….”
“그런데 알고 보니 천하방주의 아들이자 검천부주였지요. 할아버지가 천하제일인이니 아버지도 무척 고수였을 거예요.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심양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들 심군하의 죽음은 그에게도 큰 아픔이다.
그러나 무인으로 말했다.
“그건, 상대가 강했다. 강적을 만나면 어쩔 수 없다. 무인의 숙명 같은 거지.”
무한은 항변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아버지가 상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쉽게 돌아가실 분도 아니라는 것도요.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면…… 누군가 치밀하게 꾸민 암계에 걸리셨을 거예요.”
심양조는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딱 벌리고 무한을 보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차!’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굳은 표정을 수습했다.
무한은 할아버지의 놀람은 모르고 흐느끼듯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천일고에…….”
무한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후, 다시 이어지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누군가 우리 심씨 일가를 노리는 거죠.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고수가 당했다면, 흉수는…… 아마도 천하방 내부에 있겠죠.”
심양조는 어린 손자가 바로 감정을 수습하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들이 저까지 죽일까봐 어딘가에 숨기시려는 거잖아요.”
“그래. 네 생각이 맞다. 보이지 않는 적은 일단 피해야 한단다.”
“할아버지.”
무한이 심양조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저는 피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도망칠 생각도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