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녀는 소리치며 이미 비상제동 스위치를 당기고 있었다.
“열차가 선로를 이탈했다고!”
-끼이이익!
커브 구간을 대비해 에즈라가 속도를 줄여놓은 덕에 열차 전복은 막을 수 있었다.
바닥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바닥이 되는 일 대신, 열차는 몸체가 조금 기운다 싶더니 조금 가서 멈춰 섰다.
“벼, 별일 없네?”
원래 영화에서 열차가 탈선하면 그 앞에 막 절벽이 있어서 열차가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승객이 굴러떨어져 아슬아슬하게 열차 끝에 또 매달리고, 주인공은 그런 승객을 구하기 위해 조심조심 다가가 손을 내미는 손에 땀을 쥐는 전개가 이어지기 마련인데.
“다들 괜찮아요?”
에즈라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살폈다.
‘괜찮네?’
조금 기운다 싶더니 열차는 멈췄고, 물론 선로를 이탈했으니 남은 4시간 거리는 차를 구해 달려야겠지만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
-쩌적.
“무슨 소리지?”
열차 탈선에도 의연한 모습이던 애런이 창문에 매달려 밖을 내다봤다.
“오, 호수야.”
“…….”
“오 우리 호수 위에 있어!”
나와 데일, 에즈라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내려!!!”
-쩌저저저적.
빙판 깨지는 소리와 함께 데일이 기관실 문을 발로 찼다.
열차 앞머리가 갈라지는 호수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덮친 수압에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흐압.”
문으로 밀려드는 호숫물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울 꼬맹이 수영 되나?
‘내가 애런을 챙겨야 해.’
벌써 꼬르륵 물을 잔뜩 들이마셨을 아이를 걱정하는데, 내 앞으로 무언가가 부드럽고 빠르게 지나갔다.
현란한 발장구를 선보이며 애런이 한 마리의 아기 오징어처럼 미끄럽게 문을 빠져나갔다.
그 뒤는 에즈라였다.
내게 빨리 나오라는 눈짓을 보내고서 에즈라는 부푼 핑크 머리카락을 잔상으로 남기며 기관실을 나갔다.
언더더씨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둘을 따라 나도 문을 빠져나가며 뒤를 돌아보니, 데일이 손이 묶인 레이스를 챙겨서 나오고 있었다.
다들 수영 장인들이구나.
걱정을 내려놓고 수면을 향해 발을 놀렸다.
물이 정말 찼다. 오래 있다간 동사하겠다.
“푸하!”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먼저 올라간 애런과 에즈라가 지면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하.”
“후하.”
수면 위로 머리 두 개가 연이어 떠올랐다. 은발 하나에 흑발 하나.
“그냥 쉽게 가는 법이 없네.”
“데일은 힘이 좋네요. 끌려 올라오면서 너무 든든했습니다.”
레이스는 그 말을 하고서 바로 데일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쯧쯧.’
우리는 호수 언저리로 올라서서 젖은 옷을 짰다.
“벨, 나 추워.”
우선 아이의 옷부터 짜는데 애런이 두 팔을 벌리며 안겨왔다.
‘큰일인데, 이 날씨에 물에 젖다니.’
“레이스, 그쪽 다른 능력은 뭐 없어요? 불을 피운다거나 물을 따듯하게 데운다거나 그런 쓸모 있는 능력이요.”
“집배원한테 불을 뿜으라뇨, 벨.”
아, 정말 쓸모없어.
“에취!”
“어? 애런 기침하네.”
“근데 데일은 어떻게 능력을 쓰는 건가요? 제가 가졌던 물건이 데일에게도 있는 건가요?”
“우리가 통성명하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자 한 일이 있던가?”
“이제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이름으로 불러봤어요. 데! 일!”
“이 새끼가…….”
“애런, 물은 안 먹었어? 먹었으면 뱉어.”
“에취!”
“데일, 애런 기침해요.”
“아…… 내 열차 루루. 그동안 수고 많았어, 고마워? 언닌 널 오래 기억할게. 너와 함께했던 그 행복한 나날들을…….”
“으에취!”
“너 이 새끼 면상부터가 적합하지가 않아. 처음 볼 때부터 별로였다고.”
“저는 데일 얼굴이 마음에 쏙 드는데 아쉽군요.”
“아니, 애가 기침하는데 어른 둘이서 싸울 생각이 들어요?”
“내 전 남친만큼은 아니지만 널 정말 좋아했어.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아니다. 루루야 잘 가.”
‘이 자식들 말을 안 들어!’
-딸랑딸랑딸랑딸랑.
제발 이쪽을 좀 봐달라고, 싸우거나 각자의 감상에 빠진 일행을 향해 냅다 종을 흔들었지만 조금의 효과도 없었다.
-퍽퍽퍽퍽!
결국 종으로 한 대씩 다 등을 후려갈겼다.
그러니까 왜 말을 안 듣니!
그러자 모두가 종에 찍힌 등을 매만지며 아픈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다들 자기 말하느라 정신이 빠져서 애가 기침하는 소리도 안 들리지, 지금?”
“에취!”
“추워 뒤지겠어. 일단 젖은 몸부터 말리고 움직이죠.”
❅
열차가 호수에 다 빠진 것은 아니었다. 기관실은 완전히 잠겼고 1호차도 반쯤 침수됐지만 그 뒤는 무사했으니까.
열차의 선로 유지 보수가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이탈한 것치곤 정말 적은 피해라고, 에즈라는 혀를 찼다.
동력원이 마나핵인 것도 피해를 줄이는 데 한몫했다.
마나핵을 동력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침수된 기관실 장치 안에서도 마나핵은 여전히 구동됐으니까.
덕분에 불을 피울 수 없는 열차 안에서도 따듯하게 몸을 녹일 수 있으니 참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2호차 복도에 빨랫줄을 걸고 일등석 객실로 돌아왔다.
날 제외한 모두가 객실에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다.
-훌쩍.
기침은 멎었는데 기침 대신 애런은 이제 콧물을 훌쩍였다.
코를 훌쩍였는데 약하게 훌쩍였는지 콧물이 들어가다 말았다.
‘귀여워.’
시선을 느낀 애런이 콧물을 매달고서 바보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벨, 왜?”
왼쪽 콧구멍에 콧물을 매달고서 배시시 웃는다.
자기 코에 콧물이 매달렸다는 걸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다.
‘귀여우니까 좀 이따 닦아줄까.’
하지만 금방 들켰다.
“왜 벨? 왜 웃어? 나 또 콧물 나왔어?”
“응.”
“아이.”
손등으로 콧물을 훔쳐내려는 애런의 팔을 데일이 덥석 잡아챘다.
“형이 뭐랬어.”
“멋진 남자는 손수건을 사용할 줄 안다.”
“기억하네.”
그리고 애런이 직접 코를 풀도록 손에 손수건을 쥐여줬다.
‘아, 나 옷 널어야지 참.’
젖은 옷 수거하러 들어왔다는 걸 아이를 보다 그만 잊고 말았다.
“다들 외투 벗은 거 줘. 저기 널어서 말릴게.”
데일의 외투, 애런, 에즈라의 외투도 받아 드는데.
“제 외투는 누가 벗겨주실까요?”
손이 등 뒤로 묶인 상태라 혼자 옷을 벗을 수 없는 레이스가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애처로운 눈길로 날 올려다봤다.
“저도 똑같이 춥습니다. 게다가 전 상처가 다 낫질 않아서 몸도 좋지 않은 상태…… 윽.”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데일이 레이스의 등을 발로 차 굴렸다.
그 바람에 레이스가 객실에 깔린 카펫 위를 굴렀다.
“넌 그냥 껍질째 말려.”
그러자 레이스는 비교적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는데, 속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잠재우려는 마인드 컨트롤로 보였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역시 역경을 넘어서야 하는 거군요.”
꿈틀거리며 일어난 레이스는 조용히 데일과 적당히 멀어진 곳에 가 자릴 잡았다.
그 뒤로 외투를 벗겨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외투를 빨랫줄에 널고 돌아와 젖은 니트 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데일은 아예 상의를 탈의하고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밀림의 왕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너만 벗냐, 나도 벗고 싶다.’
젖은 니트가 무겁고 눅눅했다. 차라리 맨살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며 레이스 쪽을 쳐다봤다.
‘벗겨줘야겠다.’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저러다 열감기라도 걸려 몸져누우면 골치 아파진다.
“레이스, 등 내 쪽으로 돌려봐요.”
뒤로 다가가 묶인 손을 풀어주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얇은 셔츠 바람이 되어 내게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묶으란 소리였다.
“이래야 안심이 되겠죠.”
데일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이쪽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적막이 이어졌다.
애런은 침대 위에서 데일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가끔 훌쩍거리긴 했지만 공간이 따듯해져서 그런지 훌쩍이는 빈도는 점차 줄어갔다.
나는 소파 위에서 에즈라랑 함께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 안은 아주 훈훈했다.
덕분에 한참 전에 잠에 빠진 에즈라는 고개를 떨구다 자꾸 내 어깨에 머리를 박았다.
“어헉?”
이봐라, 또 박고 나서 이상한 소릴 낸다.
옆 객실에서 이불 꺼내오기가 귀찮아 그냥 같이 덮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나는 해롱거리는 에즈라의 고개를 꺾어 소파 등받이에 잘 붙여주었다.
그리고 나도 소파에 깊게 몸을 묻고 잠든 애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부터 애런의 잠버릇이 좋지 않다고 느끼긴 했는데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상황을 보니.
‘와 정말 나쁘구나.’
싶었다.
아까부터 애런은 데일의 허벅지를 벤 자신의 머리를 중심축으로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는데, 돌다가 자꾸 데일의 턱이나 배를 발로 찼다.
방금도 애런의 발길질에 턱을 맞은 데일은 입을 앙다물었다.
‘잘 참네.’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이런 발차기조차 다 사랑스럽지, 이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이런 상황에서 어른은 참는다, 이런 느낌이랄까.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진작에 발로 뻥 차서 침대에서 떨어트렸을 텐데.
‘나도 차였으려나, 아닌가. 저 자식 나 좋아하니까 참았으려나?’
“야, 통조림.”
“…….”
“좋아한다.”
흐흐흐 참았겠지? 나 좋아하잖아.
“흐.”
아, 속으로만 웃는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만…….
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 버린 입을 급하게 다물었다.
하지만 데일은 비록 잘 때는 죽은 듯이 자도 깨어 있을 땐 모든 감각이 예민한 자였다.
슥 나왔다 들어간 내 웃음소리를 캐치한 남자가 제 턱을 문지르며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소리 없이 벙끗거리는 입 모양새로 그가 그리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