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레이스는 정말 일회용 고용직이었는지 가진 연락수단조차 없더군요. 보라색 단발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인데 그의 상관과 연락할 수 있게 주파수가 맞춰져 있어요.”
데일이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무전기를 골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보라색 단발은 죽었지만 레이스는 우리 손에 있어요. 그를 시켜서 실험체를 회수했으니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면?”
“그 뒤는?”
“님한테 기부 후 엄청 쎈 우리의 데일이 쓸어버린다. 완벽, 완벽하다 증말…….”
그러자 데일은 네가 그렇지, 라고 속으로 말했다.
표정에서 들렸다.
“좋을 거 없어.”
왜 없어, 내가 사이다를 마셔야겠다는데!
“자르려면 맨 위를 단번에 잘라야지, 어중간한 부분 쳐내봐야 부스럼만 긁어낼 뿐이야.”
“맨 위가 누군데요?”
“…….”
그치, 말이 없지. 너나 나나 위를 모르니까.
“누가 몰라서 안 하나 모르니까 안 하지. 자기도 모르면서 되게 전략적인 척 말하네……. 허 참, 진짜…….”
“고만 쨍알대라.”
“그렇다고 해도 그를 통해 알아낼 것들이 있을 거예요. 살려두죠. 그리고 어쨌거나, 그가 동료를 배신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거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자력으로 그 공간을 깨부수고 정신을 차렸지만, 레이스가 그 보라색 단발 각성자를 처치해 주지 않았다면…… 데일도 정신을 잃었을 때니 나는.
‘육체와 이별했겠지!’
“애런이 무슨 실험의 대상이었는지는 들은 게 없대?”
“네, 그건…… 그냥 실험체라는 말만 들었나 봐요.”
“근데 저 자식은 물리계도 아닌데 어떻게 능력을 쓴 거야? 너 말고는 없을 줄 알았는데.”
“손 줘봐요.”
나는 데일의 손바닥 위에 이제는 검게 변한 동전 같은 물건을 올렸다.
“의뢰자들이 실험체를 수거해 달라면서 줬대요. 지니고 있으면 일시적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거라면서.”
데일은 오랫동안 물건을 보며 골몰하다 그것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살려는 두자. 그래도 당분간 저건 못 풀어줘.”
“좋아요.”
레이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한 번 더 입단속을 시킬 계획으로 사잇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야 통조림, 저 새끼랑 단둘이 있지 마.”
‘왜? 위험해서? 나 잘못될까 봐 걱정되는구나. 짜식…….’
돌아보지 않아도 데일의 표정이 예상이 갔다.
다 안다, 다 알아.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내 표정이 어쩔 수 없이 조금은 흐뭇했던 걸까.
그래도 데일에겐 뒤통수만 보였을 텐데.
데일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제 귓불을 늘여대며 눈매를 좁혔다.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저번에 자고 일어났을 때부터.”
“…….”
“꿈이 기억엔 없는데, 되게 더럽고 나쁜 꿈이었던 것 같아.”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기분이 나쁠 수 있는 거야.
저 자식의 감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동물의 감이야.
“그런 건 다 개꿈이에요, 개꿈. 개꿈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만큼 시간을 소모적으로 쓰는 방법도 없을 거예요.”
“그런가?”
“그렇죠?”
“그래. 나쁜 걸 기억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지.”
데일은 뒷머리를 털며 돌아갔다.
저 자식 설마 기억하는 거 아니겠지…… 태도가 영.
“씁.”
아니겠지.
❅
그날 밤, 오랜 시간 기관실을 지킨 에즈라를 객실로 보내고 나 홀로 기관실에 있을 때였다.
나는 일어나 기관실 문에 난 동그란 창을 천으로 가렸다.
‘바야흐로 소환 준비는 끝났다.’
“후.”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은 여러모로 다이나믹한 하루였다. 사건이 일어났던 낮부터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킬 지금 이 순간까지 모두 말이다.
나는 오늘 낮에 새로 생긴 게이지를 쳐다봤다. 이름하여 ‘자기연민 게이지.’
자기연민이 영구활성화된 후 생긴 게이지다.
녹색 게이지가 끝까지 차 있는 걸로 봐서 완충된 상태 같았다.
[스킬 ‘자기연민’이 영구활성화되었습니다.
1. 이제 타인이 아닌 본인을 대상으로 스킬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2. ‘자기연민 게이지’가 풀충전 상태일 때 물건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 집 안에 있는 물건들로 한정됩니다. 식량은 제외됩니다. 물건에 따라 소모되는 게이지 양에 차이가 있습니다.]
치사하게 남을 대상으로 연민 스킬을 쓸 때는 이것저것 다 복제해 주면서, 나를 대상으로 스킬을 사용하려 하면 자기연민이 비활성화 상태라는 말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던 그야말로 거지깽깽이 같던 시대는 간 것이다.
“하하하하.”
절로 웃음이 나 크게 웃다가 괜히 쫄려서 소리를 죽였다.
어차피 기관실과 객실 사이에 있는 1호차엔 아무도 없다. 마음껏 웃어도 된다 이 말이다.
“흐흣, 흐흐흐흐.”
자기연민이 활성화되면 아마 나를 대상으로 스킬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스킬 설명의 2번 내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물건 중 이세계로 소환했을 때 가장 유용한 것은…….’
핸드폰이다. 뒤로 굴렀다가 앞으로 굴렀다가 생각을 해봐도 핸드폰을 가져와야 했다.
내가 구매했던 이 소설의 초반 회차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이미 은발 남주, 흑발 남주가 여기 있으니 원작은 비틀렸겠지만, 어쩌면 최후의 낙원으로 가기 위한 힌트나 이 세계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근데 충전은 돼서 오나?’
모르겠다. 그런 걸 일일이 다 생각하다간 아무것도 소환하지 못할 것이다.
“…….”
근데 소환 순서 같은 건 없는 건가? 시스템은 늘 설명이 부족했다.
됐고. 일단 아무렇게나 시도해 보자.
내 앞엔 떠다 놓은 물 대신 종이 놓여 있었다.
나는 차분히 숨을 내뱉고 내 폰과 충전기의 이미지를 세트로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내 핸드폰이랑 충전기 가져다줘.”
그러자.
-웅.
종이 날아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내 위를 빙글빙글 돌며 금빛을 뿌렸다.
나는 내리는 눈을 맞는 어린아이처럼 양 손바닥을 모았다.
가지런히 모은 손바닥 위로 금빛이 물결치더니 점점 밀도를 더해가 쨍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지는 그 빛이 너무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오랜만이다, 내 폰. 잘 있었니?”
손바닥 위엔 내 사랑스러운 핸드폰과 충전기가 나타났고, 끝까지 차 있던 녹색 게이지는 폰을 소환 후 1/4 정도가 투명하게 바뀌어 있었다.
‘오구오구 잘 왔다, 잘 왔어.’
화면을 터치했지만 까만 화면만 이어졌다. 역시 충전은 안 돼서 왔군.
‘잠깐만, 이 열차의 동력원은 마나핵인데…… 전력으로 변환이 되나? 안 되면 충전기가 있어도 소용이 없을 텐데.’
충전기를 손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내 눈에 의외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기관실의 동력장치 안에서 웅웅거리고 있는 마나핵이었다.
‘어쩌면?’
나는 마나핵 위로 폰을 올렸다.
충전되기 시작했다.
마나핵, 그것은 예쁘고 성능 좋은 무선충전기였다.
❅
에즈라가 천천히 열차의 속도를 줄였다.
“여기 커브만 돌면 쭉 직진 길이야. 곧 제국 수도에 도착해. 한 4시간쯤 남았어.”
에즈라가 펼친 지도 위로 모두의 머리가 모였다.
“우리는 이쯤, 이 길을 쭉 타고 들어가서 수도의 16구역을 통과 후 종착역이 있는 7구역에서 멈추게 돼.”
수도는 동그란 형태로 총 20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 가운데 1구역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소용돌이치듯 돌아 20구역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탄 열차의 철로는 수도의 옆구리, 서쪽에서 진입하고.
“7구역에서 내려서 바로 그 위, 8구역으로 올라갈 겁니다. 제 일행이 수도를 찾아왔다면 거기 있을 확률이 높아요.”
지도 위, 데일이 제 일행이 있을 만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나는 결국 애런을 찾아오란 명령에 응한 자들을 찾아가 경고하는 일을 접었다.
경고가 과연 긍정적인 변수로만 작용할까? 하는 물음에 확신할 수 없었고.
수도로 가서 자신의 일행과 우선 합류하자는 데일의 설득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정 지역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세 번째 메인 퀘스트 오픈을 위한 특정 조건을 곧 만족합니다.
오픈 조건: 특정 지역 안으로 들어가기]
위와 같은 시스템 창이 떴기 때문이었다.
[퀘스트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동료를 지켜내세요.’ (1/1)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호텔에서 불독을 물리쳤을 때, 시스템은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클리어되었음을 내게 알렸고, 연달아 세 번째 메인 퀘스트는 특정 지역에 가야만 열린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역시 세 번째 메인 퀘스트를 위한 특정 지역은 수도였구나.’
우리는 일직선으로 수도와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특정 지역으로 다른 곳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데일이 짚어준 지도 위를 쳐다봤다. 7구역과 8구역은 바로 맞닿아 있었다.
어떤 위협이 도사릴지 모르는 장소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 꺼려졌는데 잘됐다.
“이동 거리가 짧아서 좋네요.”
4시간 남았다 이거지…….
“4시간밖에 안 남았다니, 벌써 낙원에 도착한 듯 감격이 벅차…….”
-도르르르르.
‘뭐지?’
지도 옆에 가만히 올려두었던 펜이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지금 열차가 기우뚱한 느낌 든 사람?”
나부터 손들자, 데일과 애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차례대로 손을 올렸다.
“저도 느꼈어요오~”
열어둔 사잇문으로, 1호차에 묶여 있던 레이스가 묶인 손 대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보였다.
“으음?”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방금 에즈라가 설명한 대로 열차는 커브 길을 아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왼쪽으로 느리게 흘러가다가 점점 다가왔다?
“에, 에즈라?”
“탈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