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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71)화 (71/108)

71화

“…….”

그리고 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가 쏜 총알이 아이의 이마 앞에서,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제자리에서 매섭게 돌던 총알은 회전이 점점 느려지더니…….

-톡.

가볍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애런이 그 자리에서 사위듯 쓰러졌다.

“애런? 애런??”

달려가 쓰러진 아이를 품에 안았다.

방금까지 총알이 닿았던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총알이 닿았던 부분이 살짝 붉어진 것 외에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손바닥에 닿는 이마의 촉감은 부드럽기만 했다.

‘숨은 쉬는데.’

갑자기 아이가 왜 이러지. 고른 호흡인데도 아이의 몸은 시체처럼 늘어졌다.

“애런, 애런! 데일!!”

도대체 뭐 하느라 답이 없는 거야.

축 늘어진 아이의 몸을 품에 안고 힘겹게 일어서려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실험체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말이죠.”

그림자의 주인은 레이스였다.

“금방 끝날 겁니다, 레이디.”

레이스의 긴 머리가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흐아아암.”

그 뒤로, 마지막 칸에서 몸을 일으켜 늘어지게 하품하는 보라색 단발의 모습이 보였다.

“지루했다고, 레이스. 네 능력은 번거롭네.”

“너 뭐야.”

“말씀드렸지 않았나요, 집배원이라고. 세상이 끝났다고 해서 제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탕!

이마 중앙을 정조준했다고 생각했는데.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빨랐다.

‘힘이 없어, 졸려.’

머리를 터트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총알은 놈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자의 얼굴에 생긴 붉은 선에서 또 다른 붉은 선이 흘러나왔다.

“역시 친절하세요.”

‘웃네, XX.’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기운 빠진 몸은 한쪽으로 힘없이 기울어 버렸다.

무너지는 내 몸과 함께, 품에 안겨 있던 애런도 바닥에 쿵 머리를 찧는 모습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내 방이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네이비 스트라이프 패턴의 이불 위에 앉아 있었다.

어제의 집이란 집꾸미기 사이트에서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폭신한 새 이불.

머리가 멍했다.

‘뭐지? 나 뭐 하고 있었더라?’

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던 건지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청년 치매가 늘어나는 추세라던데 설마 나도?

엄마한테만 스도쿠를 권할 게 아니라 나부터 해야 하나 싶었다.

‘냉장고에 뭐 있더라. 푸딩 남았나.’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시계 옆엔 내가 덕질하는 아이돌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역시 포스터 위치를 시계 옆으로 하길 잘했지.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언니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우리 언니 얼굴을 한 번 더 볼 때마다 시간을 체크하게 되니 뭔가 일상을 더 계획적으로 보내게 되는 느낌이다.

우리 언니도 저 얼굴로 24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6시.

곧 저녁 먹을 시간이다. 그래서 배가 고팠구나.

엄마가 퇴근하고 오면 6시 30분쯤이고 우리는 늘 7시쯤 저녁을 먹는다.

저녁은 엄마랑 마주 앉아 함께 먹어야 하니까, 일단 푸딩 하나를 까먹으면서 여유롭게 엄마를 기다려 볼까.

밖으로 나가려고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무슨 느낌이 이렇지?’

데자뷰? 그건가?

아닌데, 그건 낯선 장소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현상 아닌가.

나는 익숙한 내 방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집이 소름 끼치게 조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 소름 끼쳤다.

“…….”

XX 무서워요. 엄마 빨리 오세요.

“귀신 꺼져라. 우린 귀신 안 키운다고. 어? 어디서 내 방에 자릴 잡으려고 지금.”

괜히 무서워서 혼자 지껄여봤다.

‘좀 낫네.’

밖으로 나가 냉장고를 열었다. 푸딩이 없네.

이 집에서 푸딩 먹는 인간은 나밖에 없으니 내가 먹었을 텐데 또 먹어놓고 기억을 못 하네, 나.

정말 오늘부터 1일 1스도쿠를 시작해야 하나?

푸딩 대신 되직한 요거트에 딸기를 찍어 먹었다.

딸기가 왜 이렇게 맛있지? 어제도 먹은 딸기인데 맛이 미친 듯이 황홀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너무 맛있어서 맛에서 그리움마저 느꼈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려나.

방으로 돌아가 딸기를 먹으며 셋플릭스를 봤더니 시간이 사라졌다.

-끼익.

현관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다!’

엄마 나 오늘 집에 있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그리고 내가 어제 푸딩을 두 개 다 먹었어? 한 개는 남은 줄 알았는데 없더라. 기억이 안 나. 그리고 이 딸기 어디서 샀어? X맛있어. 앞으로 과일은 거기서만 사기로 나랑 약속해.

엄마를 보자마자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놔야지.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턱 길이에서 끊기는 찰랑이는 단발머리에 통통한 얼굴, 엄마였다.

“엄마…….”

어, 왜 눈물이 나지.

왜 이렇게 오래 보고 싶던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지.

매일 보는 엄마인데.

‘나 진짜 엄마를 XX 사랑하는 딸이구나.’

“왜 울어 딸?”

늘 들어오던 엄마 목소리다.

“엄마는 나보고 왜 안 울어?”

“뭐래니, 얘가.”

“엄마는 복 받은 줄 알아. 지금 따님이 어머니를 보고 반가워서 울고 있잖아요. 이런 딸 흔해, 안 흔해?”

“…….”

내 딸이 실성했나 하는 표정으로 날 가만히 들여다보던 엄마는 웃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뭐 사 왔어?”

“응?”

엄마가 든 장바구니를 가리켰다.

“그 안에 뭐 들었냐구.”

그러자 엄마는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장바구니와 그 안에 든 물건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기한 눈길로 바라봤다.

‘왜 저런데.’

“장바구니에 뭐 묻었어?”

“아니.”

“그럼 이리 줘, 무겁잖아.”

건네받은 장바구니를 식탁에 올렸다.

장바구니 안엔 맛있는 것들이 잔뜩이었다.

냉장고에 넣을 것, 과자 칸에 넣을 것 등등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엄마가 왜 저러지.’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거실 한가운데 서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남의 집에 온 사람 같은 저 행동은 뭐란 말인가.

내가 그런 그녀를 관찰하듯 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엄마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딸.”

엄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 아줌마가 오늘 간지럽게 왜 이러지.’

그렇지만 내색하면 삐질 수 있다. 이럴 때 모녀간의 애정을 확인하고 그러는 거지. 나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가 외투에다 겨울바람 냄새를 묻혀왔나 보다.

차갑고 쌀쌀한 냄새 안에 숨어 있을 따듯하고 달큰한 엄마의 온기를 찾아 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응.”

“바디로션 바꿨어?”

“왜?”

“코코넛 냄새가 안 나서.”

엄마가 쓰는 바디로션은 코코넛 향인데.

카카오와 패츌리가 섞인 코코넛의 기분 좋은 향.

“…….”

엄마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엄마가 아니었나?’

그럼 이 기억은 무슨 기억이지.

분명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에게서 맡았던 기억이 나는데.

“엄마 머리 숙여봐.”

“응?”

엄마의 정수리를 확인했지만 흰 머리는 없었다.

“우리 엄마 아직 젊다. 흰 머리가 하나도 없네.”

내가 착각했나 보다. 오늘 엄마도 나도 여러모로 좀 이상하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밥이나 먹자.”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찌개를 끓여 식탁에 올렸다.

평소라면 분주히 움직였을 엄마는 계속 멍한 상태였다.

오늘 일이 많이 피곤했던 걸까.

“엄마! 다 했어. 먹자 먹자.”

팔팔 끓인 엄마표 찌개는 역시나 국물 맛이 환상이다. 특히 찌개 끓인 첫날 말고 둘째 날의 맛은 정말 말로 다 못…….

“……??”

“…….”

“왜…… 그렇게 봐?”

“무슨 맛이야?”

찌개를 떠먹는 나를 보는 엄마의 눈길이 기묘했다.

“무슨 맛이긴…… 엄마가 해준 찌개는 항상 맛있는 맛이지. 우리가 아는 그 맛. 오늘 이상하다 정말.”

그리 대답하고 찌개를 한입 더 입에 넣는데, 나 역시 기분이 기이했다.

그리고 들려온 어떤 남자아이의 목소리.

“맛있어!”

“맛있는 냄새!”

탁,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놨다.

“내가 아까 말했지.”

“…….”

“우리 집 귀신 안 키운다고. 아직도 안 갔냐? 진짜 빨리…… 빨리 가주세요. 어서요.”

“…….”

식탁 건너편에 앉은 엄마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속삭이기 위해서였다.

“엄마 내가 아까부터 느낌이 되게 이상했는데, 집에 뭐가 있는 것 같아. 귀신 악령 뭐 이런 거. 어떡하지?”

“집이 이상해?”

“어! 이상해애~ 우리 집 같지가 않아.”

엄마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우리 엄마 같지가 않았다.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서 집값이 떨어지면 그 누구보다 화낼 거면서 왜 저리 가만있대.

“아…….”

아, 머리야. 머리가 갑자기 왜 이렇게 아프지.

잠잠한 엄마의 얼굴 위로 자꾸 모르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하얀 남자, 꼬맹이, 분홍 머리의 여자.

‘누구지, 난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리고 난생처음 보는 시스템 창도.

[현재 당신의 감정 상태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당신은 이 그리웠던 공간에 계속 머물길 바라고 있습니다.

떠오르는 기억을 삭제하고 이곳에서 계속 머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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