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쾅.
“너 문도 안 닫고 잤냐?”
치약을 짜다 말고 뒤돌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가 방에 쳐들어오는 일은 이제 너무 익숙했다.
“잘 잤어요?”
“문을 닫고 자야 할 거 아냐, 어디다 정신을 빼고 있길래.”
구시렁거리는 데일을 보며 칫솔을 입에 물었다.
“에에, 므 끄믁을 스도 읏긋죠?(예예, 뭐 까먹을 수도 있겠죠?)”
“벨, 잘 잤어?”
“으으, 즐 즈쓰.(응응, 잘 잤어.)”
데일 뒤에서 고개를 내민 애런이 자기 칫솔을 들고 졸랑거리며 걸어왔다.
“나도 나도.”
“으.”
아이의 칫솔 위로 치약을 짜주자, 아이는 작은 입안으로 칫솔을 쏙 넣었다.
“퉤, 데일은요.”
“뭐.”
“잘 잤냐구요.”
“잘 자긴.”
넓은 보폭으로 남자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이마와 이마가 붙을 듯한 거리에서 데일이 제 눈 아래를 콕콕 짚었다.
“보이냐? 잘생긴 눈 밑이 퀭해진 거?”
아, 어제 나 대신. 맞네.
“그러네요. 그 얼굴에 다크써클이라니. 거참, 마음이 안타깝고 옥죄고 그러네.”
좁혀진 거리에서 그가 내 눈 밑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퀭해진 보람이 없네.”
“밤에 잠 못 자고 고생한 거 잘 알겠으니까 양치 마저 하게 떨어져 줄래요.”
“가까이 오니까 너한테서 치약 냄새 난다.”
“양치 중이니까요. 그래서 좋아요?”
“어.”
“얼굴에 뱉어줄까요, 치약?”
“이 자식은 항상 끝이 안 좋단 말이야.”
다시 칫솔을 입에 물려다가 돌아나가는 데일을 향해 물었다.
“그 사람들은요?”
“걔네? 걔네들 잘 자더라, 감시하는 보람도 없이. 지금은 없어, 나갔어. 재워줬으니 먼저 가서 차 빼고 있겠다던데.”
그렇구나. 다시 칫솔을 입에 물었다.
“야.”
데일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나를 불렀다.
“너 왜 울었냐.”
“퉤, 내가 그걸 알려줄까 봐?”
“…….”
이번엔 아예 방을 나갔던 그가 문틈으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야, 야아.”
“아, 나 진짜 양치질 좀 하게 냅둬요.”
“많이 힘드냐?”
“…….”
“힘들면 밤에 몰래 방으로 찾아와도 모른 척 안아줄 테니까, 어? 통조림. 알아듣냐?”
“알겠으니까…… 나가기나 해요.”
“…….”
나가래도 나가질 않고, 데일은 고개를 내밀고 서서 칫솔을 손에 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대답은 잘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툴툴거리며 방을 나갔다.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왜 저래 진짜.
그렇지 않아도 흑발을 따라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저러니까 진짜.
‘기분 뭣 같네.’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
초반의 내 계획은 진남주로 가장 유력한 흑발을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갈아타는 거였는데.
다리를 막고 있던 차들을 모두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 제 동료와 나란히 앞서 걸어 나가는 레이스란 남자를 쳐다봤다.
‘원작의 데일은 실패한다.’
결국 낙원을 못 찾지. 실패하는 건 모든 남주가 마찬가지.
하지만 진남주는 낙원의 입구 가장 가까이 갔다고.
메인 퀘스트 진행은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거고.
낙원을 찾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저쪽과 동행하는 쪽이 맞지 않나?
“눈 오네.”
길을 가다 말고 멈춰 선 레이스가 눈이 흩날리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돌아서서 나를 보고 웃는다.
“열차를 타고 수도로 가시는 건 낙원을 찾기 위해서겠죠?”
“네.”
“낙원의 눈은 다를까요?”
눈이 하얗고 내릴 때나 예쁘고 다 똑같지, 이 자식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럴까요. 전 눈을 좋아해서 그런지 기대가 돼요. 다른 세상의 눈을 볼 수 있다면 무지 설렐 것 같거든요.”
‘감상적인 남주네.’
속으로 그리 평하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데일의 손이 쑥 들어와 내 코에 내려앉은 눈을 닦아냈다.
“낙원은 따듯할 텐데, 그렇게 눈이 좋으면 굳이 안 가도 되지 않나?”
“하하, 그것도 맞는 말씀이군요.”
두 남자는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고 다시 열차가 보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레이스를 따라간다면 애런은?
내가 데리고 가야지. 꼬맹이를 어떻게 두고 가. 아니, 잠깐만…….
‘데일이 데리고 있는 게 안전하지 않나?’
그는 누구보다 아이를 잘 지켜줄 것이다. 누군가 꼬맹이를 노리는 상황에서 나보다 그가 옆에 있는 게 나을 거야.
낙원에 가서도 해줄 수 있다면 아이에게 좋은 양부모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할 테지.
데일은 내게 이미 그런 믿음을 샀다. 게다가.
‘내가 데리고 가면 언제까지 옆에 있어줄 수도 없는데.’
만약 내가 돌아가는 일에 성공한다면 아이는 혼자 남게 될 것이다.
데일도 나도 잃게 하는 것보다는 데일 옆에 두는 게 나아.
“그럼 어젯밤은 감사했습니다.”
레이스와 그의 동료가 우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차를 정리하던 중에 대체할 부품을 발견해서 차를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갑자기 헤어져.
뭐라고 말을 해.
어제 처음 본 이 남자를 따라가고 싶어졌으니 그러겠다고?
애런에게도? 그렇게 말을 해?
‘울 텐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 준비도 없이 진남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을 마주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어쩌면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에 가장 필요할지도 모르는 사람.
이대로 그와 헤어질 순 없었다. 이번 같은 우연한 만남이 또 반복될까? 아니, 오늘 헤어지면 끝일지 모른다.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돼!’
하지만 나는 모두와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 실수다. 어떤 식으로 헤어질지 생각 못 했어.
미리 준비해야 했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
‘어떡하지, 열차에 도착했는데.’
“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장갑 낀 레이스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
“레이스, 어차피 목적지가 같다면 열차로 같이 가요. 우린 음식도 넉넉해요.”
“…….”
“나쁠 거 없잖아요.”
그는 붙잡힌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리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얘길 좀 해볼게요.”
레이스와 그의 동료는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눴다.
데일 역시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왜 이러는 거야.”
“열차에 자리도 많고, 나쁜 사람들 같지 않잖아요? 같은 목적지에, 어제 저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린 크게 다쳤을 거고.”
“왜 이러는 거냐고.”
“…….”
남자의 두 번째 물음에 입이 다물렸다.
아직 너와도 모두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헤어진다 하더라도 지금 이렇게는 싫단 말이야.
솔직히 말할 수 없어 내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자, 대화를 나누러 갔던 두 남자가 돌아왔다.
“얘기해 봤는데, 서로 충분히 신뢰가 쌓이기 전이니 저희는 어제처럼 마지막 칸에 타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방향이 같아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아.”
내 반응과 다르게 데일의 고개는 비뚜름하게 꺾였다.
그가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열차로 향했다.
❅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아래로 고개를 슬쩍 내밀자.
‘와, 어지러워.’
열차가 달리는 고가교의 높이가 아찔했다.
다리를 건널 때까지 밖은 내다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짐이 단출하네요.”
“네.”
두 남자가 열차에 오르며 가져온 짐은 별것 없었다.
여분의 외투도 없고, 가진 식량도 거의 없었으며 정말 몸만 있는 상태.
열차에 태우지 않았더라면 제국에 도착하기까지 하루하고도 반 정도의 시간을 쫄쫄 굶었겠는걸.
“두 분이 같이 움직인 지 오래되진 않았나 봐요.”
질문하며 식당칸에서 데운 우유를 레이스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우유라니, 게다가 따듯하네요.”
레이스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죠?”
“서로 편해 보이진 않아서요.”
보라색 단발머리는 마지막 칸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레이스가 제 일행을 돌아보곤 미소 지었다.
“맞추셨어요. 일 때문에 같이 다니긴 하는데 절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요.”
‘일?’
망한 세상에서도 돌아가는 직장이 있단 말인가.
‘그전에 같이 일하던 사이였다는 소린가.’
가볍게 생각하고 말을 받았다.
“그쪽도 상대를 그리 좋아하는 거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
“아…… 싫어하는 티는 감춰야 하는데 티가 나버렸나요.”
이 남자는 왜 낙원으로 가려는 걸까.
이상한 의문인가. 살기 힘든 곳에서 편한 곳을 찾아가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낙원에 가면 좋을까요? 일단 이름부터가 낙원이잖아요.”
“글쎄요.”
그는 모락모락 하얀 김이 오르는 머그잔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여기랑 비슷할 거 같은데요. 여기나 거기나 재미없는 인간들이 옮겨간 것뿐이니 싫증 나는 건 똑같을 거 같은데.”
친절한 어투로, 아 그럼요~ 좋을 거 같아요. 이럴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갈 곳은 거기뿐이니, 선택지가 없달까요.”
“…….”
“우유 잘 마셨습니다. 너무 친절하세요.”
“예 뭐, 그럼 쉬세요.”
시간을 벌었으니 차근히 생각해 볼 계획이었다.
식당칸을 잠그고 일단 방으로 돌아가야지.
이대로 저자를 일행에 넣는다면 당장 헤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하는 게 레이스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으니 어렵지 않을 거다.
다리가 급하게 커브를 도는 구간인가 보다.
창 너머로 선두를 달리는 열차의 맨 앞이 보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애런의 모습도.
“다리가 높아서 어지러우시죠.”
“네, 조금.”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별 내용 없는 말을 건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끝나요. 길지 않은 다리거든요.”
“잘 아시네요. 그럼.”
식당칸의 사잇문을 열었을 때, 애런은 막 발견한 내게로 손을 흔들며 신나게 뛰어오고 있었다.
“벨!”
-탕!
뒤에서 들린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