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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25)화 (25/108)

25화

어디 한번 내가 본 로판 중 흑발이 메인이 아니었던 로판을 꼽아볼까. 가만 보자 그러니까…….

“야, 통조림.”

“예?”

아씨. 통조림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해 버렸어.

“질문해 놓고 딴생각할래?”

“아, 미안해요. 나름 진지한 고뇌 중이었으니까 양해해 주도록 해요.”

“남자 생각이나 하면서 진지는 무슨…….”

“네??”

“네 취향이 그거냐? 까만 머리?”

아, 내가 심도 깊은 생각을 하는 동안 이놈은 이쪽으로 흘러갔네?

“아, 어…… 그러니까,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나.”

“…….”

“네 뭐, 그런 걸로 하죠. 흑발 참 좋거든요.”

“…….”

어디로 흘러가든지 됐고.

그러니까…….

어디에 있는 거냐 흑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네가 진남주 같단 말이다. 어차피 네 명의 남주들 모두 낙원으로 모여들고 있을 테니 가다보면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뭐 같은 게 뭐 같은 것만 좋아하네.”

“네? 뭐라고요?”

“어, 꼴깝이라고 말한 거 들었냐. 들었음 미안하다.”

“…….”

참자.

진남주를 만나게 되면 헤어져야 할 텐데,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잘 해줘야지. 두 번이나 살려줬는데.

“참죠, 제가. 전 가정교육을 잘 받았거든요. 이럴 땐 지는 게 이기는 거라 배웠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 달리다 보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배경을 바탕으로 차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내 뒤통수를 갈겨 보는 데일의 얼굴도.

“……”

언제 진남주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저 남자랑 둘이 오늘처럼 투닥투닥하면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지 않을까.

교도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덜컥.

차 문을 열고 나오자 눈앞에 보이는 건 거대한 시멘트 색 담벼락이었다. 높다랗게 치솟은 벽 위로 쇠꼬챙이들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꼬챙이 하나에 찢긴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차에서 내린 데일이 손가락에 감은 차 키를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눈앞에 있는 교도소요. 정확히는 저 교도소 안에 낯선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를 투시 중이랄까.”

“낯선 사람?”

데일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며 짤랑거리던 차 키 소리가 멈췄다.

“낯선 사람 여기 잔뜩 깔렸네.”

“…….”

담벼락 아래엔 두껍게 쌓인 눈에 덮인 덩어리들이 즐비했다. 마치 만들다 만 눈사람 같은 것들 사이로 삐져나온 잿빛 옷자락이 시선을 끌었다.

아이 씨. 일부러 시선 안 주고 있었는데.

“왜 겁줘요. 들어가기도 전부터 힘 빠지게.”

“넌 빠질 힘도 없잖아, 어차피.”

“…….”

제가 팩트로 후려친 걸 분명히 아는 놈이 느긋하게 차 트렁크 쪽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열린 트렁크 문 너머로 내게 눈짓했다.

‘오라고?’

다가가 트렁크 안을 바라보았다. 트렁크 안엔 내가 플로라 할머니 댁을 나서며 챙겨온 식재료 샘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복제해서 쓰면 되니까 한 개씩만 있으면 되는 물건들, 차 기름통이라든지 통조림이라든지.

“??”

데일이 씩 웃으며 내 뒤통수에 손을 감았다.

“들어가.”

“뭐요? 어딜? 트렁크에?”

“어.”

“내가 왜?”

나는 황당해 묻는데, 데일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럼 교도소에 같이 들어갈 생각이었어? 너 걸리적거릴 거 생각하면 벌써 두통 오니까 트렁크에 숨어 있어.”

“…….”

나는 교도소 앞을 한 바퀴 쭉 돌아봤다.

버려진 차량들이 수십 대였다. 죄수 운반용인지 차창에 쇠창살이 붙은 대형 차량부터, 옆으로 고꾸라져 쓰러져 있는 사이드카들도 몇 대 보이고…….

“데일, 저 차들 보여요? 공통점이 뭐게요. 하나같이 눈 쌓인 차들이라는 거죠. 근데 우리 차 지붕 봐요. 겁나 깨끗하니 누가 봐도 방금 사람이 타고 온 차네. 여기다 나를 혼자 두고 가겠다구요? 차라리 안에 따라 들어가서 걸리적거리게 해줄래요, 제발?”

내 말에 그가 주변을 쓱 훑더니 검지로 가볍게 제 입술을 쓸었다.

“어차피 여긴 사람 안 다니잖아. 뭐가 있을지 모르는 안보다 나아.”

“나 혼자 여기 두고 들어갔다 나오면 나왔을 때 나 없을 줄 알아요.”

“야.”

“뭐.”

“…….”

“…….”

데일이 답답하단 얼굴로 제 뒷목을 쓸었다.

“그럼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질 말든가.”

그런 표정? 내 표정이 뭐 어떻길래.

“내 얼굴에 무슨 문…….”

“너.”

“…….”

“내내 신경 쓰고 있잖아, 사람 찌른 거.”

“…….”

“어휴…….”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교도소 담벼락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나는 차 옆에 멀뚱히 서서 그의 다음 행동을 바라봤다.

-퍽퍽.

옷깃이 삐져나온 거대한 눈덩이를 그가 발로 퍽퍽 차 무너트렸다.

그러자 부서져 내리는 눈덩이 안에 감춰져 있던 시체 한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없이 늘어지는, 파랗게 얼어붙은 죽은 사람의 손을 보고서 나는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씨X. 너구나, 찌른 게.”

가라앉히려 애를 쓴 일이 무색하도록, 시체를 보자마자 그날의 감각이 생생히 솟구쳤다.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 벌어진 틈으로 보이던 초록 모자.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겁에 질려 누군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찔러 넣었던 창 손잡이의 감각.

창에 관통당한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리던 몸의 기억들.

“너 쓸데없는 죄책감 갖고 있지.”

“…….”

죄책감? 내가 왜. 거기서 찌르지 않았으면 나도 죽고 플로라 할머니도 죽었다.

그쪽에서 먼저 우릴 헤치려 들었잖아. 마땅히 해야 할 행동해놓고 죄책감 같은 거 가질 이유 없지.

나는 내가 아주 잘했다고 생각하는걸?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행동하기 전에 제대로 확인은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확인은 얼어 죽을.”

가소로워 죽겠다는 입매로 데일이 다가와 낮게 지껄였다.

“확인이고 나발이고 그런 여유는 강자들이나 부리는 거야. 너 같은 건 그런 여유 부렸다간 바로 저승행이라고. 쓸데없는 죄책감 갖지 말고 앞으로도 보이면 바로 행동해. 바로 찌르고, 바로 쏴. 알겠어?”

“만약에 창고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들이 아니라 데일이었다면요.”

비웃는 남자의 기색이 한층 짙어졌다.

“내가 네가 찌르는 그 맥아리 없는 칼질에 맞을 거 같냐? 너 아주 걱정을 근성 있게 한다.”

“오, 그러시구나. 덕분에 잔걱정이 말끔히 사라지네요. 나중에 실수로 칼 맞고 울지나 마요.”

“걱정은……. 알겠으면 들어가.”

남자의 시선이 가볍게 내려가 트렁크를 찍고 올라왔다.

아니, 나 여기 안 들어간다니까 말이 안 통하네.

“물건이 많아서 비좁긴 한데, 옆으로 밀면…….”

데일이 트렁크 안을 정리하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용히 외투 주머니에 고이 들어 있던 권총을 빼 들었다.

-탕!

울려 퍼진 총성에 혼비백산한 새 무리가 교도소 상공으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굽혔던 상체를 펴지도 않고 ㄱ자로 허리를 꺾은 데일의 시선이 그의 발치에 떨어진 탄피로 향했다가-

그가 발로 차서 내게 꺼내 보였던 시체 옆에 박힌 탄환으로 돌아갔다가-

“…….”

“…….”

방금 총을 쏜 내 얼굴에 와 박혔다.

권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얘가 제정신인가?”

“그러니까 트렁크에 안 들어간다고 말했잖아요.”

“…….”

“총성이 울렸으니 근처에 사람이 있다면 이곳으로 집합하겠네요, 이제. 그럼 당신도 없이 트렁크에 혼자 숨어 있던 나는 발각돼서 죽임을 당한다는 뻔한 시나리오가 나오는데 어쩔래요? 같이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랫입술이 살짝 벌어진 데일의 표정은 ‘내 눈앞에 있는 이게 사람 새끼가 맞나?’ 하는 표정이었다.

“와, 내가 뭘 주운 거지?”

“미치게 사랑스러운데다가 황금알까지 낳는 거위죠.”

총 식었나? 다 식었네.

나는 원래 총이 있던 주머니로 권총을 찔러 넣었다.

“답 나왔죠? 춥다. 누가 오기 전에 들어가죠.”

-탁.

트렁크 뚜껑을 소리 나게 닫은 그가 앞서 걸어가는 내 뒤로 빠르게 따라붙었다.

“야, 통조림. 너한테 했던 사랑한다는 말 취소야. 나 미친 사람은 사랑 안 해.”

“아, 그래요? 역시 쏘길 잘했네.”

“이게 진짜.”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트렁크에 들어가는 건 너무 답답하고 숨부터 막히는 데 어쩌라구요.”

데일이 옆에서 자꾸 날 미친 사람 취급하며 구시렁거렸다.

교도소 정문을 통과하며 내가 쏜 탄환이 박힌 자리를 눈에 담았다.

‘속성으로 배웠는데 효과 만점이네.’

떠나기 전, 세바스찬 할아버지한테 속성 사격 훈련을 받았는데 가르쳐 준 사람이 워낙에 잘 떠먹여 줘서 그런가, 탄환은 내가 의도한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박혀 있었다.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안 듣냐, 너.”

“조용히 좀 해요.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듣고 다 뛰쳐나오겠네.”

“와…….”

“헤헤, 그리고 앞장은 님이 서시라구요. 난 약자니까.”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데일의 등을 떠밀었다. 남자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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